김나래(느린오후)
김나래(느린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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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하야…….”닿을 수 없는 말들.잠시 기억을 덮은 물결의 발걸음이 그때 그 건물 앞에 닿았다. 여기였던가, 저기였던가. 아스라진 추억의 한 자락에서 주저앉아 버렸다. 미친 듯이 눈물이 흘러내렸다.우린 긴 이별 중이었다.* “나 안 보고 싶었어?”해맑은 물결의 말에 재하가 슬며시 웃었다.“기다려 줘서 고마워. 존중해 줘서.”“고맙긴. 보고 싶었다는 말을 그렇게 표현하니.”“김물결. 미치도록 안고 싶었어.”본인이 말하고도 쑥스러운지 재하가 웃었다. 가면 갈수록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점점 능숙하게 하는 재하. 이젠 익숙해질 때도 됐는데 볼은 눈치 없이 연분홍빛을 띠었다.“우리 오늘은 작정하고 걷기로 했으니 실컷 걷고 실컷 먹자. 삼청동 거리 배회!”“오케이. 네가 좋아하는 고르곤 졸라 피자랑 까르보나라도 먹고. 전에 거기 가보고 싶다고 했잖아.”“으응. 좋아.”“귀 빨갛다.”물결의 귀를 두 손으로 스스럼없이 감싼 재하가 그녀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살짝 문질렀다.“잠시만.” 자리를 비운 지 5분도 안 돼서 재하의 손에 들린 귀마개는 물결의 귀를 따뜻하게 감쌌다. “토끼 같아. 하얀 토끼.”“너도 춥잖아.”“춥긴. 내가 너 지켜 줄 거야.”“허풍은.”허풍일지라도 좋았다. 그때는 모든 게 좋아서 녹아내릴 것처럼 온전히 설렜다.그는 더 이상 내 옆에 없었다.이별 통보도 그 어떤 아무런 말도 없이 그는 내 곁을 떠났다. 이젠 내 꿈엔 온통 재하가 끈질기게 나왔다. 봄날은 매정할 만큼 잔혹했다.

아스라한 청춘

중간 중간 수환은 은규의 발이 괜찮은지 상태를 체크하며 그녀를 걱정했다.“잠시 가만히 있어. 벚꽃 묻었네.”꽃잎이 은규의 눈썹에 묻었는지 수환이 떼어 주자 은규가 멈칫하며 눈을 감았다.그러자 수환이 은규의 두툼한 눈에 입을 맞췄다. 어쩔 줄 몰라 은규가 가만히 있자 이번엔 그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침범했다.스무 살의 첫 키스였다. * 아픔도 이별도 계절의 흐름에 담담히 지나갔다.봄바람에 같이 불어오던 그 마음은 어디로 달아난 걸까.그들의 청춘엔 보통의 사랑이라는 꽃이 피고 이별이라는 열매도 때론 지리멸렬하게 아뭅니다. 평범한 노선을 따라 이어가는 그들의 종착역, 아스라한 청춘. 과연 어떤 형태로 남아있을까요?

우리의 오후

서울로부터 버스로 4시간, 서울의 답답함으로부터 빠져나와,한적한 시골마을로 떠나온 ‘은서’는 새로 구한 집의 주인집 아들, ‘한성’과 만나 자연스레 가까워진다.함께하는 시간이 거듭될수록, 서서히 서로에게 마음의 문을 열어가는 두 사람.어느새,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데….“이은서.”“….”“내 심장 소리 들려?”“…응.”“잠시만, 잠시만… 이대로 있자.”언제부터였을까, 그녀의 마음이 조금씩 기울기 시작한 것이,중요한 것은 단지 그와 함께하는 소중한 시간을 음미하는 것 뿐.작은 인연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긴 끈과 같은 인생,유난히 잊히지 않을 것 같은 올해의 진한 여름날도 점점 저물어져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