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전, 잊을 수 없는 잔인한 상처를 주고 떠나보낸 남자를 내 상사의 맞선 상대로 다시 만났다.있는 힘껏 그에게서 도망쳐 보지만, 그는 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숨에 붙잡는다.“한번 도망쳤으면 끝까지 들키지 말았어야지.”“놔주세요!”“궁금하네. 언제까지 그 입술에서 존댓말이 나올지.”우리는 더 이상 우연을 가장해 스쳐서도, 만나서도 안 되는 사이라는 걸 아는데도.“자꾸 존댓말로 선 긋지 마.”숨결이 닿을 만한 거리. 내려다보는 까만 눈동자가 성이 나 바르르 떨리는 여린 입술을 응시하는 그 순간,“넘어가고 싶어지니까.”깨달았다. 더는 그에게서 도망칠 수 없을 거라는 걸.
제 누나를 죽음으로 몰고 간 윤정호와 그의 여동생 윤해수. 신혁은 배덕한 그들을 단죄하기 위해, 윤정호의 목숨을 미끼로 윤해수에게 계약 결혼을 제시한다. “……왜 이러는 건데요?” “그 새끼한테 판다고 답이 나올까?” 오빠와 집안을 살리기 위해 돈 많은 인간쓰레기와의 선 자리. 그곳에서 저를 구해 준 남자는 놀랍게도 차신혁이었다. “밑 빠진 독이야. 해수야.” 언뜻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 밑을 빼 버린 이의 말투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가 말이야. 할 수 있는 건 다했거든. 네 아버지 회사도 망가트렸고, 윤정호도 병원에서 쫓겨나게 했고.” 하나뿐인 오빠의 목숨이 위태로운 지금도. “그런데도 여전히 잠이 안 와. 잠을 못 자니까 대가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고 기분이 종일 더럽거든.” 그는 아직 끝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럼 뭘 해야 할까 생각하는데… 네가 생각나더라고.” 신혁이 웃었다. 목덜미가 서느레지는 웃음이었다. “윤정호가 가방에 매다는 인형처럼 달고 다녔던 너 말이야.” “…….” “그래서 내가 사줄까 하고.” 해수를 보는 신혁의 입꼬리가 기묘하게 올라갔다. “너 오늘 팔러 나왔잖아.”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지옥의 끝에서 그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오빠가 죽어야 끝이 나는 결혼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