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하면 헌신짝 된다는 걸 또 다시 경험했던 그날 밤. 분명히 내 손으로 집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왔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여긴 우리 집인 듯 우리 집이 아닌 타인의 집. 조심조심 문을 열고 나가보니 웬 물에 젖은, 발가벗은 변태가 서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계속되는 변태와의 만남. 이 남자만 만나면 일이 꼬이고,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는 악연이 분명한데 이 남자가 조금씩 끌리는 이유는 뭘까? 샤워하고 나오니 웬 모르는 여자가 내 침실에서 나왔다. 무단침입도 황당한데 뻔뻔하게 소리까지 친다. 아랫집 윗집 이웃인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서 계속 나타나는 그 여자. 많이 엉뚱한데 또 많이 귀엽다. “……강 선생님, 앞으로 변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돼요?” “갑자기 왜 남의 성을 바꿔?” “변태혁…….” “야! 지금 사람을 뭐로 보고.” 좋다고 들이대니 친구나 하자는 그녀. 아랫집 윗집, 초등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그와 그녀의 로맨스. 과연 윗집 남자는 아랫집 여자의 철벽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이것도 꿈이라고 생각해.” “……싫어. 이게 어떻게 꿈이야.” “그럼 일탈이라고 하자.”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았다. 어느새 빗소리가 귓가에서 멀어졌다. 들리는 건 오로지 서로의 숨소리뿐이고 느껴지는 건 서로의 따스한 온기뿐이었다. “그만하라고 해.” “싫어. 계속해.”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뭐든 괜찮아. 너니까.” 나의 모든 것을 다 내어줄 만큼 그를 사랑했다. 자그마한 단추가 그의 손길에 툭, 툭 힘없이 풀어졌다. “이래도?” “……응.” 그는 들릴 듯 말 듯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너……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이번이 마지막이야. 똑바로 대답해.” “후회할 거였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그리고 그가 떠난 후, 그와 보냈던 모든 순간들을 미친 듯이 후회했다. 그에게 주었던 마음은 모래알처럼 잘게 부서져 다시 주워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네가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 * * 겨우 그가 희미해졌을 무렵, 그는 다시 제 곁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하늘아.” 다정한 목소리에 밀어내려는 작은 의지마저 흐트러졌다. 바람에 연기가 사그라들듯 그의 부름에 저항하지 못했다. 퍽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이채롭게 빛났다. “나 없는 동안 다른 새끼랑 이런 짓도 했어?” 짙은 소유욕을 드러내면서도 그는 끝내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늘 그러했듯, 남유성은 7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