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다른 아버지> “스물하나에 뭘 했더라? 남자에게 차여 식음을 전폐한 뒤 말라 가고 있었던 기억이 난다. 나쁘지 않았군.”
능청스러운 입담 속 서늘한 통찰로
새로운 가족 서사를 쓰는 이주란의 첫 번째 소설집
2012년 《세계의 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한 소설가 이주란의 첫 소설집 『모두 다른 아버지』가 민음사에서 출간되었다. 이주란은 도시의 외곽에서 살아가는 빈곤한 사람들의 삶을 낙담과 자학이 섞인 넉살로 재현해 왔다. “구질구질한 이야기를 신세 한탄이 아닌 뻔뻔스러운 농담으로 승화시킬 줄 아는 능청스러움이 믿음직스럽다.”는 평가로 문단에 존재감을 드러낸 이주란의 첫 소설집은 웃음과 씁쓸함이 수시로 교차된다. 찰리 채플린에게 삶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었다면, 이주란에게 삶은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곳에서 포착된 희극과 비극의 뒤섞임이다. 쓴웃음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주란만의 오묘한 비감이 소설집의 유머러스한 핍진성을 완성시킨다.
이주란식 업둥이의 탄생
<모두 다른 아버지>의 주요 모티프는 가족으로, 이주란의 가족 서사는 다양한 방식으로 ‘가족’을 무너트린다. 그 무너짐의 시작에 “모두 다른 아버지”들이 있다. 이주란 소설에 등장하는 아버지들은 ‘나’와 이복형제들에게 모두 똑같은 이름을 지어 주거나, 편의점 직원에게 폭력을 휘둘러 한쪽 눈이나 멀게 한다. 이 문제 많은 아버지들은 징그러우면서도 우스꽝스럽고 두려우면서도 한심하다. 이주란 특유의 입담으로 희화화되는 아버지라는 대상은 더 이상 어떤 권위도 지니지 못한다. 가부장 중심의 전통적인 가족의 연결 고리는 아버지의 몰락을 통해 느슨해진다.
그 틈을 뚫고 이주란식의 ‘업둥이들’이 탄생한다. 이 업둥이들은 부모라는 성역을 무력화하며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지만, 동시에 자신과 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함께 고통받은 자매(형제)만은 가족으로 인정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이주란의 소설 속 인물들을 가족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몸속에 흐르는 피가 아니다. 가족 구성원으로부터 받은 고통에 대한 공통된 경험이다. 혈연이라는 질긴 믿음을 허상으로 만들면서 무너트린 가족의 자리에는 고통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가족이 있다.
나의 것이 아닌 삶을 살아가기
이주란의 소설은 농담과 거리 두기로 삶을 견디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마치 타인의 인생에 촌평을 더하는 것처럼 “내 인생은 내 인생이 아닌 것 같다”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들은 인생이 ‘나’의 소유가 아니니 이대로 가난하고 지질하게 살거나, 삶을 포기해도 된다는 듯이 무기력하게 군다. 이때 소설 속 인물들이 내비치는 무기력함은 희망에 속지 않고 불행에 잠식되지 않기 위한 방어막이다. 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운명적으로 함께한 가난과 불행을 똑바로 응시하지 않는다. 한눈을 팔면서 자신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소소한 이유들을 찾는다. 「에듀케이션」에서 ‘나’는 “다음 선거를 기다리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살아 있는 것 말고 무엇인지 생각했다.”고 말한다. 「참고인」에서의 ‘나’는 “앞으로는 절대 희망적인 글을 쓰지 않으리라” 다짐한다. ‘다음 선거’와 ‘앞으로는’이라는 말 속에 든 미래는 여전히 밝지 않지만 그럼에도 살아가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주란의 소설이 미래를 기다리는 방식이란 “이번 생은 망했어”라고 말하면서도 지금보다는 나은 미래를 소심하게 기다리는 우리의 현재와 닮았다.
느슨하면서도 매력적인 ‘백치’들의 목소리
자학적인 농담들이 곳곳에 산재한 이주란의 문장은 의식의 흐름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어디로 튈지 예상불가능한 독특한 리듬으로 전개된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거리낌 없이 자신을 멍청하다 말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자신을 체념한다. 마치 스스로를 보호할 줄 모르는 백치처럼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내보이는 데 주저함이 없다. 이주란은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고스란히 소설로 가져와 ‘백치의 언어’를 발명한다. 일말의 엄숙함도 들어설 자리를 만들지 않는 능청스러운 문장들로 삶의 지난함을 끄집어낸다. 아무렇지 않다는 듯 가볍게 말할수록 삶의 균열은 더 선명해진다. 이주란의 백치들이 우리 주변에 실존하는 누군가로 느껴지는 순간, 문학과 현실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희극과 비극은 뒤섞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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