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선과 현실이 겹쳐진 우주의 틈 속에서, 수많은 문명과 생명체들이 태어나고, 사라지고, 잊혀졌다. 그리고 그 모든 ‘잊힘’의 조각들을 모아 기록하는 단 한 명의 존재가 있었다. 잊혀진 세계의 기록관. 그는 이름도, 과거도 없는 자였다.

그는 폐허가 된 차원들을 떠돌았다. 시간이 멈춘 도시, 침묵하는 별계, 존재조차 부정당한 신들의 무덤. 그곳에서 남겨진 마지막 문장을 수집하고, 바람에 흩날리는 기억의 파편을 채집하며, 모든 것의 끝자락에서 역사를 기록했다. 그의 기록은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았지만, 반드시 존재해야만 했다.

어느 날, 그는 전에 없던 신호 하나를 포착했다. 그것은 아직 완전히 잊히지 않은 세계, 마지막 불씨가 남은 차원의 울음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그 세계로 발을 들였다. 그곳은 모든 것이 흐릿했고, 과거와 현재가 섞여 있었으며, 이름 없는 존재들이 무언가를 기억하려 애쓰고 있었다.

그는 그 세계의 중심에서 소녀 하나를 만났다. 놀랍게도 그녀는 그를 인식할 수 있었고, 오히려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모든 세계를 기억하나요? 그렇다면, 우리도 기억해 주세요.” 그녀의 눈빛은 단순한 생존의 외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라짐에 저항하는 마지막 목소리였다.

기록관은 처음으로 망설였다. 그는 규칙적으로, 감정 없이, 단지 남은 것을 수집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무언가가 달랐다. 이 세계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는, 그 자체로 하나의 ‘기록’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이 세계를 ‘기록’하지 않고, 지키기로.

그 순간, 무너져가던 차원이 멈췄다. 그의 책에는 처음으로 빈 페이지가 생겼고, 그 페이지는 소녀의 말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기록관은 더 이상 단순한 관찰자가 아니었다. 그는 이제 기억의 창조자, 존재의 증인, 그리고 잊혀진 세계들이 다시 숨 쉴 수 있도록 하는 희망의 기록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