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로 이사 온 고등학생이다.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이 서툴렀던 그는, 새 학교에서도 말없이 조용히 지내기를 바랐다. 마을은 고요했고, 하늘은 도시보다 훨씬 맑았지만, 윤호는 어딘가 모르게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는 우연히 달빛이 밝게 내리쬐는 언덕 위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된다. 하얀 셔츠를 입은 또래 소년, ‘은’이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였다.
은은 묘하게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말투도 어딘가 옛스럽고, 요즘 아이들과는 다르게 자연스럽게 시와 별, 바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윤호는 그와 함께 있는 시간이 점점 편안해졌고, 매일 밤 달이 뜨는 시간만 되면 은을 만나러 언덕으로 향했다. 이상한 것은, 은은 해가 뜨거나 흐린 날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처음에는 상상 속 친구일지도 모른다는 의심도 들었지만, 은과의 대화는 너무나도 생생했고, 무엇보다 윤호의 마음을 점점 치유하고 있었다.
어느 날, 윤호는 은에게 물었다. "넌 도대체 누구야?" 은은 조용히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 마을에서 아주 오래전에 살았던 아이야. 달빛이 아주 밝았던 어느 여름밤, 이 언덕에서 길을 잃었지. 그리고 그날 이후… 여기에서 나갈 수 없게 되었어." 윤호는 충격에 말을 잃었지만, 은은 담담했다. "넌 오랜만에 이곳에 찾아온 사람이야. 그리고… 내 말을 들어준 첫 번째 사람이기도 해."
그날 이후, 윤호는 달빛이 있는 밤마다 은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조금씩 그의 이야기를 통해 과거 마을의 비밀을 알아갔다. 전쟁, 가족의 이별, 잊힌 이름들. 은은 마치 달빛이 기억하는 모든 시간의 조각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윤호는 처음으로 자신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위로를 느꼈다. 그동안 스스로를 외롭게 만든 건, 마음을 닫아버린 자신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름이 끝나갈 무렵, 윤호는 마지막 편지를 받게 된다. 달빛 아래 놓여 있었던 하얀 봉투에는 ‘은’의 필체로 짧게 적혀 있었다. "고마워. 이제 나는 떠날 수 있을 것 같아. 너도 이젠 혼자가 아니니까." 그날 이후, 윤호는 더 이상 은을 볼 수 없었다. 언덕은 여전히 달빛 아래 아름다웠지만, 그곳엔 조용한 바람만이 머물고 있었다.
그 후로 윤호는 매일 밤 언덕에 오르진 않지만, 가끔 특별한 날에는 그곳에 앉아 달을 바라보며 속삭인다. "잘 지내고 있지?" 달빛은 아무 대답도 없지만, 윤호는 알고 있다. 누군가와의 진심 어린 동행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영원히 남는다는 것을. 그 밤의 친구, 달빛 동행자는 이제 윤호의 가슴 속에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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