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을 감싸 도는 바람은 때론 장난스럽고, 때론 깊은 위로처럼 마음을 어루만진다. 나는 해안도로를 따라 천천히 걸으며 그 바람에 귀를 기울였다. 말없이 불어오는 그 속삭임에는 마치 오래전 누군가의 마음이 실려 있는 듯했다. 눈을 감자, 바람이 전하는 작은 편지들이 마음속에 내려앉았다.
바람은 제주를 닮았다. 검은 현무암 돌담 사이를 스치며 지나갈 때는 단단한 듯하면서도 부드럽고, 푸른 바다를 지나 내 어깨에 닿을 때는 차가우면서도 따뜻했다. 그 이중적인 감정 속에서 나는 잊고 지냈던 기억들을 마주했다. 사랑했던 사람, 놓아버린 시간,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 제주의 바람은 그것들을 조용히 불러내는 마법 같았다.
올레길 한 편에 앉아 바람을 맞으며 편지를 써보았다. 종이가 바람에 날리지 않게 조심조심 눌러가며, 그동안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적었다. "괜찮아, 잘하고 있어. 여기서 다시 시작해도 돼." 그 편지는 누구에게 보낼 것도 아니었지만, 어쩌면 제주의 바람이 대신 전해줄지도 모른다. 누군가 오늘 그 말을 듣길 바라는 마음으로, 나는 그저 마음을 담았다.
해질 무렵, 바다는 노을에 물들고 바람은 한결 더 잔잔해졌다. 하늘과 바다 사이에서 바람은 여전히 편지를 품은 채 이곳저곳을 헤매고 있었다. 그 모습은 마치 사라진 시간의 흔적을 다시 꺼내려는 듯했고, 나는 그저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제주라는 섬이 건네는 편지는 말보다 더 깊게 스며들었다.
언젠가 다시 이곳을 떠나야 할 때가 오겠지만, 제주의 바람은 내 마음 어딘가에 계속 머물 것이다. 그것은 단지 자연의 현상이 아니라, 나에게 닿은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바람을 타고 오늘도 누군가의 마음에 닿고 있을 것이다. 제주의 바람이 전하는 편지는 그렇게, 끝없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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