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에서 지훈은 낡은 벤치에 앉아 있었다. 도시의 소음이 멀리서 들려왔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직 바람 소리만이 남아 있었다. 그날의 바람이었다. 몇 년이 지나도 결코 잊히지 않는, 그 목소리와 함께 불어오던 바람.

그날, 그녀는 떠났다. 아무 말도 없이, 그저 미소만 남기고. 바람이 불었고, 그녀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 순간의 모습이 지훈의 기억 속에 그대로 남았다. 세상이 멈춘 듯한 그 장면이, 그의 인생의 가장 선명한 조각으로 남아 있었다.

그 후로 지훈은 바람이 불 때마다 그녀를 떠올렸다. 계절이 바뀌어도, 시간은 흘러도, 바람은 늘 같은 향기를 품고 있었다. 그는 가끔 묻곤 했다. “그녀도 이 바람을 느끼고 있을까?” 대답은 없었지만, 바람은 언제나 그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어느 봄날, 오래된 거리를 걷던 지훈은 익숙한 향기에 발걸음을 멈췄다. 꽃잎이 바람에 날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뒷모습이 보였다. 순간, 숨이 멎었다. 그녀였다. 아니, 그녀와 너무도 닮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를 알아보지 못한 듯 조용히 지나갔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 바람이 불었다. 그날과 똑같은 바람이었다. 지훈은 미소를 지었다. 그 바람이 전해주는 것은 슬픔이 아니라, 이제는 따뜻한 기억이었다.

지훈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이 얼굴을 스쳤고, 그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잘 지내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의 바람은 여전히 불고 있었고, 그 바람 속에서 그는 마침내 이별을 이해했다. 사랑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람이 되어 계속 그의 곁을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