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의 첫눈이 내리던 날, 은우는 낡은 카메라를 들고 산길을 걷고 있었다. 눈발이 천천히 내려앉는 소리만이 세상을 채우고 있었다. 그는 한참을 걷다가, 오래전에 함께 사진을 찍었던 벤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눈 위에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하얀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그 벤치는 수진과의 마지막 추억이 머물던 자리였다. 그녀는 항상 하얀 코트를 입고, 눈처럼 맑은 미소를 짓던 사람이었다. 그날도 같은 자리에서 사진을 찍었다. “이 눈이 녹아도, 우리 기억은 남을 거야.” 그녀가 그렇게 말했었다. 하지만 봄이 오기도 전에,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
은우는 그 후로 한동안 카메라를 들지 않았다.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상하게도, 다시 찍고 싶었다. 어쩌면 그리움이 시간보다 더 오래 남는다는 걸, 이제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눈 덮인 벤치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셔터 소리가 울릴 때마다, 눈 위에 그녀의 발자국이 그려지는 듯했다. “수진아, 잘 지내고 있지?” 은우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대답은 없었지만, 하얀 바람이 그의 볼을 스쳤다. 그 바람 속에는 분명 그녀의 웃음이 섞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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