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항상 회색이었다. 하늘도, 건물도, 사람들의 표정까지도 색을 잃은 지 오래였다. 윤호는 매일같이 같은 길을 걸었다. 일터로 향하는 발걸음은 익숙했지만, 마음은 점점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지만, 그의 안에는 아무런 온기조차 남지 않았다.
전쟁이 끝난 지 3년. 그러나 평화는 오지 않았다. 도시는 재로 뒤덮였고, 사람들은 희망 대신 생존을 이야기했다. 윤호는 그날 이후 웃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웃었던 날, 그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폭격 속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단 한마디였다. “괜찮아.”
그 말이 그를 붙잡았다. 윤호는 매일 그 말에 기대어 버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점 흐릿해졌다. 기억의 색이 바래가듯, 사랑마저도 잿빛이 되어갔다. 그럼에도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언젠가 다시 푸른 빛을 볼 수 있을까 하는, 이유 없는 믿음 하나 때문이었다.
어느 날, 그는 폐허가 된 광장에서 한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더럽고 낡은 손으로 무언가를 품고 있었다. 그것은 시든 꽃 한 송이였다. “이건 엄마가 좋아하던 꽃이에요.” 아이는 그렇게 말했다. 윤호는 말없이 그 꽃을 받아 들었다. 그 작은 생명이, 차가운 회색 속에서 유일하게 따뜻했다.
그날 밤, 윤호는 오래된 노트를 꺼냈다. 손이 떨렸지만, 그는 천천히 글을 적었다. “잿빛 하늘 아래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살아간다.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사랑을 믿는다.” 글씨가 번졌지만, 그건 눈물이 아니라 비 때문이었다. 잊었던 빗소리가 오랜만에 세상을 적시고 있었다.
제일 먼저 댓글을 달아보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