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미, 디본의 요정으로 불리는 헤레이스 디본. 그녀는 가문의 반역으로 모든 것을 잃게 된다. 세르펜스 공작의 사생아이자, 반역을 막아 제국에 큰 공을 세워 새로운 세르펜스 공작이 된 이즈카엘이 원한 것은 단 하나. “헤레이스. 멸문한 디본의 여식을 원합니다.” 그렇게 헤레이스는 반역죄인의 여식에서 공작 부인이 된다. “살아. 살기만 해. 나머지는 모두 내가 감당할 테니.” 이즈카엘의 노력으로 헤레이스는 점차 마음을 열고, 서로를 사랑하게 된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생긴다. 토벌을 위해 이즈카엘이 떠난 뒤, 3개월이 지난 어느 날. 돌아온 그의 옆에는 낯선 여자가 있었다. “인사해. 앞으로 나와 함께할 여인이야.” 확연히 부푼 여인의 배는 누가 보더라도 만삭에 다다라 있었다.
전쟁을 제패하고 돌아온 북부의 지배자, 페르난 카이사르. 모든 것이 완벽한 그 남자는, 율리아의 불행한 어린 시절 속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 남편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아는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해. 성을 개조하든, 보석을 사들이든, 파티를 열든 전부 상관없으니.” “…….” “다만, 아침부터 그대를 마주하고 싶진 않으니 이런 짓은 삼가고.” 기억 속 다정했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일말의 애정도,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 냉랭한 사내만이 서 있을 뿐. “그대의 마음은, 내게 단 한 자락도 쓸모가 없어.”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사랑한 것이, 율리아의 가장 큰 실수였다. * 절벽 끝에 선 율리아는 한 때 제 세상이었던 남편의 얼굴을 천천히 눈 안에 새겨넣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또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더는, 그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 절박하게 달려드는 남편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사라져드릴게요, 대공 전하》
헬렌 고드윈은 파혼을 위한 도구였다. 이용하고 버릴. “헬렌.” 레이먼드가 헬렌의 뺨을 매만졌다. 언제 장갑을 벗었는지 차가웠던 볼이 그의 체온으로 덥혀졌다. “그거 알아요?” “……뭘요?” “전야제, 겨우살이 나뭇가지 아래의 남녀는 입 맞춰야 한대요.” 강한 손길이 가녀린 어깨와 허리를 잡아 제게로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좋아해요. 헬렌.” 고작 키스 따위에 어깨를 떠는 여자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동생의 촌스러운 가정교사. 손쉬운 다정함에 아닌 척 차츰차츰 무너지는 게 재밌었다. “사랑이요? 그게 사랑인가요?” “헬렌. 나는.” “전부 기만이었죠.” 입장이 뒤바뀌기 전까지는.
사창가에서 자란 내가 세상을 구할 성녀라니,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나는 들판에 핀 제비꽃과 같은 하찮은 존재였다.천민이기에 경멸당했고,성녀이기에 숭배받았다.그러나 여기, 경멸도 숭배도 하지 않는 이가 있었다. 얼어붙은 강철같은 남자는 고요한 시선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나는 널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말 그대로, 그는 날 도와주지 않았다. 그러나 모든 것을 나와 함께했다.“네 앞에서 죽겠다.” 심지어는 죽음까지도.푸른 불꽃과도 같은 남자였다.그저 그 색이 차가워 불꽃인지 몰랐을 뿐이었다.그렇게, 기사는 제비꽃을 피웠다.
가문의 후계자도, 귀여움을 받는 쌍둥이 막냇동생도 되지 못한 어중간한 둘째로,평생 다른 사람들에게 가려진 삶을 살아온 카리나. 어느 날 그녀는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고작 1년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교류도 없던 약혼자를 무작정 찾아갔다. 그가 그토록 원하던 파혼 서류를 들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여기서 1년간 지내고 싶어요.""......미쳤나, 영애?""대신 파혼해 드릴게요." 하지만 그 때는 알지 못했다. "그대가 자꾸 모르는 척 하려는 것 같아서 확실히 말하지.""네?""난 그대가 좋아." 대가 없는 관심과 애정을 그에게 받아보게 될 줄은. 그래서 미련없던 삶에 이토록 욕심이 생기게 될 줄은. 자은향 장편 로맨스 판타지, <시한부 엑스트라의 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