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님 글 솜씨는 확실한 것 같은데, 모든 씬이 제게는 늘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일까? 분명 잘 쓴 글인데.... 9권 9화까지 꾸역꾸역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마 파워 인플레와 함께 대다수의 인간관계가 일차원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 얕보다가 실체를 겪고 충격 받거나, 주인공의 진면모를 진작부터 알고 있거나 둘 중 하나로 축약되요. 심지어 주인공의 진면모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인물들도 결국 따지고보면 "과거에" 주인공 얕보다가 실체를 겪고 충격 받은 이들입니다... 다른 형태의 관계가 없어요.
이 글은 산업혁명 정도부터 2차대전 후까지의 서구권 시대정신의 변화를 테마로 판타지 소설로 재현했습니다. 절망조차 긍정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글의 짜임새나 구성? 완벽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여자보다 이쁘장하다는 설정이나 간혹 등장하는 허접한 삽화 등 종종 독자의 항마력을 테스트하는 부분도 있죠. 서사보다 인물에 몰입하시는 분이라면 특히 견디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쓴 글이고, 강하게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이 퍼지며 종교의 권위는 나날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산업혁명을 거쳐 기초과학기술이 한창 발전하고 이성이 종교를 대체한 1800년대에 이르러서 니체 허무주의 "신은 죽었다"로 이어집니다. 니체 철학의 포인트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적인 주장이 아니라 '그래서 신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을 믿고 따르는가?'에 대한 질답입니다. 종교가 유세하던 고대에는 신을 모시고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을 실천하고 사후를 준비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어요. 피라미드 지으라면 짓고, 부모님 공경하라면 공경하고, 일요일에 교회 나가라면 나가고. 그래도 뭐,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됐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죠.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몰락했을 때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책임이 막중해졌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해야 했거든요. 십계명이 헛것이 되니 더 이상 무엇이 올바른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논리적인 답을 찾기 어려웠죠. 이 상태의 인류는 비유하자면 '부모의 품을 막 벗어나 밤새도록 술마시며 자유를 만끽하는 새내기 대학생' 입니다. 그렇게 방종하면 보통 시험을 망치게 됩니다. 이것이 2번에 걸친 세계대전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브레이크를 걸 제도장치도 마련되어있지 않았고, 그동안 인류의 윤리관에 기준을 제시해왔던 종교가 힘이 약해진 상태였어요. 나치와 일제는 별의별 고문과 인체실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유태인 모아서 방에 가두고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나아가 미국은 핵무기까지 사용했죠. 자기들 맘대로 다 하다보니 그 꼴이 난 겁니다.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지식인들은 말문이 막혔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인간이란 이렇게 악하고 나약한 존재였나? 인간은 정녕 신의 보살핌 없이는 자멸할 존재인가? 작중 길과 마레가 바로 이 절망한 지식인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길 아잘록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된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허무함에 흑화해버린 케이스죠. 대학생 비유를 계속하자면, 길 아잘록은 학기 내내 놀기만 하다가 시험을 망친 새내기들에게 너희는 어차피 평생 그렇게 주어진 자유를 낭비하고 육욕만 채우다 사회에 기여 1도 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며 차라리 자살을 종용할 매우 냉소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차는 있지만, 대개 2학년이 되면 정신을 차리는 편입니다. 전년의 암울한 성적표를 보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밤을 새죠. 서구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전쟁 후 크게 절망하긴 했으나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습니다. 인류가 벌인 일이니 인류가 책임져야죠. 이들이 허무주의의 계보를 잇는 철학파, 실존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인정합니다. 인류는 노답이라고. 작중 길 아잘록의 말대로 "이토록 많은 실패와, 실패와, 실패밖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가치했느냐? 길 아잘록은 무가치했다고 말하지만, 실존주의자라면 무가치했다고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실패로부터 배웠으니까요. 절망했지만, 다시 일어섰으니까요. 아이가 말했죠. "인간은 패배하지 않아. 절망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패배하진 않아." 아이는 실존주의자입니다. 부모를 잃고, 누나를 잃고, 보호자를 잃고, 동료를 잃고, 신을 잃고... 존재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실연이란 실연은 죄다 겪고 상실감에 몸부림쳐도, 절망할지언정 인류를 포기하거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허무함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 부처님이 세상에 없어도, 태어난 이유따위 없어도, 사실은 전혀 상관 없으니까요. 사람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길을 개척하는 대자적 존재이니까요. 그저 태어나서 정해진 삶을 살다 죽는, 주어진 목적에 순응할 뿐인 대자연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작가는 아이로 하여금 아하스베루스에 도달하게 한 겁니다. 아하스 베루스는 "방황하는 유태인"이라고 널리 알려져있는 기독교의 전설이죠. 예수에게 저주받아 예수재림의 날까지 불사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본작 중 아하스 베루스는 신에 도달했지만 인간으로 남아 죽기를 택했죠. 초인. 워버만쉬 그 자체. 신의 독선적인 질서보다 인간의 자유로운 무질서를.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인 해석을. 신보다 인간을. 즉자보다 대자를. 그야말로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 아하스 베루스는 목자 예수를 잃고 절망스런 삶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그러나 절망을 딛고 일어서 목적없는 삶을 즐기는 어린양을 상징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포스처럼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허무주의자 니체는 사람의 단계를 낙타, 사자, 아이의 3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순종하는 낙타. 신을 믿던 인류죠. 반항하는 사자. 핵무기 쓰던 인류입니다. 마지막으로, 긍정하는 아이. 아무런 룰이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삶을 즐기는 존재. 삶이 무료하고 허무해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주체. 몇번이고 넘어져도 웃으며 일어나는 오뚜기. 위버만쉬. 실존주의자. 긍정하는 “아이”.
높은 평점 리뷰
이 글은 산업혁명 정도부터 2차대전 후까지의 서구권 시대정신의 변화를 테마로 판타지 소설로 재현했습니다. 절망조차 긍정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바치는 오마쥬입니다. 글의 짜임새나 구성? 완벽하진 않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이 여자보다 이쁘장하다는 설정이나 간혹 등장하는 허접한 삽화 등 종종 독자의 항마력을 테스트하는 부분도 있죠. 서사보다 인물에 몰입하시는 분이라면 특히 견디기 어려우실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쓴 글이고, 강하게 추천하는 작품입니다. 르네상스 이후로 인간중심적 사고방식이 퍼지며 종교의 권위는 나날이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산업혁명을 거쳐 기초과학기술이 한창 발전하고 이성이 종교를 대체한 1800년대에 이르러서 니체 허무주의 "신은 죽었다"로 이어집니다. 니체 철학의 포인트는 '신은 없다'는 무신론적인 주장이 아니라 '그래서 신이 없다면 인간은 무엇을 믿고 따르는가?'에 대한 질답입니다. 종교가 유세하던 고대에는 신을 모시고 종교의 가르침에 따라 도덕을 실천하고 사후를 준비하는 것이 인생의 전부였어요. 피라미드 지으라면 짓고, 부모님 공경하라면 공경하고, 일요일에 교회 나가라면 나가고. 그래도 뭐, 하라는 대로 하기만 하면 됐지, 사람이 스스로 생각할 필요가 없었죠. 책임도 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가 몰락했을 때 인간은 자유를 얻었지만, 동시에 책임이 막중해졌습니다. 이제는 스스로 생각해서 행동해야 했거든요. 십계명이 헛것이 되니 더 이상 무엇이 올바른지 알 수 없었고,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고 하지만 왜 그러면 안 되는지 논리적인 답을 찾기 어려웠죠. 이 상태의 인류는 비유하자면 '부모의 품을 막 벗어나 밤새도록 술마시며 자유를 만끽하는 새내기 대학생' 입니다. 그렇게 방종하면 보통 시험을 망치게 됩니다. 이것이 2번에 걸친 세계대전입니다. 과학과 기술의 발전에 브레이크를 걸 제도장치도 마련되어있지 않았고, 그동안 인류의 윤리관에 기준을 제시해왔던 종교가 힘이 약해진 상태였어요. 나치와 일제는 별의별 고문과 인체실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유태인 모아서 방에 가두고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나아가 미국은 핵무기까지 사용했죠. 자기들 맘대로 다 하다보니 그 꼴이 난 겁니다. 2차대전 이후 서구의 지식인들은 말문이 막혔어요. 우리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인간이란 이렇게 악하고 나약한 존재였나? 인간은 정녕 신의 보살핌 없이는 자멸할 존재인가? 작중 길과 마레가 바로 이 절망한 지식인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특히 길 아잘록은... 인간이라는 존재에 내재된 어처구니 없을 정도의 허무함에 흑화해버린 케이스죠. 대학생 비유를 계속하자면, 길 아잘록은 학기 내내 놀기만 하다가 시험을 망친 새내기들에게 너희는 어차피 평생 그렇게 주어진 자유를 낭비하고 육욕만 채우다 사회에 기여 1도 하지 못하고 죽을 거라며 차라리 자살을 종용할 매우 냉소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편차는 있지만, 대개 2학년이 되면 정신을 차리는 편입니다. 전년의 암울한 성적표를 보며 끝없이 스트레스를 받고 실수를 만회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밤을 새죠. 서구의 지식인들도 마찬가지였어요. 전쟁 후 크게 절망하긴 했으나 어떻게든 정신을 차렸습니다. 인류가 벌인 일이니 인류가 책임져야죠. 이들이 허무주의의 계보를 잇는 철학파, 실존주의자입니다. 이들은 인정합니다. 인류는 노답이라고. 작중 길 아잘록의 말대로 "이토록 많은 실패와, 실패와, 실패밖엔"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무가치했느냐? 길 아잘록은 무가치했다고 말하지만, 실존주의자라면 무가치했다고 대답하지 않을 겁니다. 실패로부터 배웠으니까요. 절망했지만, 다시 일어섰으니까요. 아이가 말했죠. "인간은 패배하지 않아. 절망할 수는 있어도, 절대로 패배하진 않아." 아이는 실존주의자입니다. 부모를 잃고, 누나를 잃고, 보호자를 잃고, 동료를 잃고, 신을 잃고... 존재가 겪을 수 있는 온갖 실연이란 실연은 죄다 겪고 상실감에 몸부림쳐도, 절망할지언정 인류를 포기하거나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허무함은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하나님 부처님이 세상에 없어도, 태어난 이유따위 없어도, 사실은 전혀 상관 없으니까요. 사람은 스스로 가치를 창조하고 길을 개척하는 대자적 존재이니까요. 그저 태어나서 정해진 삶을 살다 죽는, 주어진 목적에 순응할 뿐인 대자연과는 다르니까요. 그래서 작가는 아이로 하여금 아하스베루스에 도달하게 한 겁니다. 아하스 베루스는 "방황하는 유태인"이라고 널리 알려져있는 기독교의 전설이죠. 예수에게 저주받아 예수재림의 날까지 불사의 몸으로 세상을 떠돌게 되었다고 하는 내용입니다. 본작 중 아하스 베루스는 신에 도달했지만 인간으로 남아 죽기를 택했죠. 초인. 워버만쉬 그 자체. 신의 독선적인 질서보다 인간의 자유로운 무질서를. 객관적 진리보다 주관적인 해석을. 신보다 인간을. 즉자보다 대자를. 그야말로 본질에 선행하는 실존. 아하스 베루스는 목자 예수를 잃고 절망스런 삶을 이어나가야만 하는, 그러나 절망을 딛고 일어서 목적없는 삶을 즐기는 어린양을 상징합니다. 알베르 까뮈의 시지포스처럼요. 마지막으로 덧붙이자면, 허무주의자 니체는 사람의 단계를 낙타, 사자, 아이의 3단계로 구분했습니다. 순종하는 낙타. 신을 믿던 인류죠. 반항하는 사자. 핵무기 쓰던 인류입니다. 마지막으로, 긍정하는 아이. 아무런 룰이 없어도 스스로 놀이를 만들어 삶을 즐기는 존재. 삶이 무료하고 허무해도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나가는 창조의 주체. 몇번이고 넘어져도 웃으며 일어나는 오뚜기. 위버만쉬. 실존주의자. 긍정하는 “아이”.
작가님 글 솜씨는 확실한 것 같은데, 모든 씬이 제게는 늘 유치하게 느껴졌습니다. 왜 일까? 분명 잘 쓴 글인데.... 9권 9화까지 꾸역꾸역 읽으며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아마 파워 인플레와 함께 대다수의 인간관계가 일차원적이라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주인공 얕보다가 실체를 겪고 충격 받거나, 주인공의 진면모를 진작부터 알고 있거나 둘 중 하나로 축약되요. 심지어 주인공의 진면모를 처음부터 알고 있는 인물들도 결국 따지고보면 "과거에" 주인공 얕보다가 실체를 겪고 충격 받은 이들입니다... 다른 형태의 관계가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