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서 도망갈 수 있을 줄 알았나 봐요?” 여주인공 외에는 관심 없는 흑막 재상이 나긋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그렇게 둘 줄 알다니. 날 아직도 모르나, 내 주인님은?” 그는 매끄럽고 긴 손가락으로 내 목을 간질이듯 쓸어 올리더니 볼을 감싸 쥐었다. “그러게 내가 진즉 사슬로 묶어 놓자고 했잖나.” 재상 뒤에 있던 소드 마스터가 무표정하게 덧붙였다. 그러나 그의 하의는 다소 불순했다. “나를 이렇게 만들어 놓고 떠날 셈이었나?” 내게 다가온 그가 단단하고 커다란 손으로 내 뒷덜미를 탐욕스럽게 만지작거렸다. “마탑에 가둬 놓으면 도망 못 간다니까, 다들 왜 말을 안 들어서 이런 불상사게 생기게 하죠?” 내 앞에 무릎을 꿇은 마탑주가 세상에서 가장 순진한 눈망울로 날 올려다보았다. “다시는 도망가지 못하도록 마법을 걸어 놔야겠어요.”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말은 기겁할 만한 종류의 것이었다. *** 내가 쓴 19금 피폐 역하렘 소설 『다 같이 살아요』에 빙의했다. 작가라 이 세계를 탈출할 방법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해 평범한 가게 직원1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남주들에게 정체를 들켰다.
귀족은 귀족답게 품위를 지키고, 책임을 다해야 한다. 그것은 엘리시아 헬렌이 평생을 지켜온 방식이었다. 올바른 길로 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뭘 잘못한 걸까. 20년을 함께한 약혼자. “파혼하자. 나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어.” 그가 사랑한 여인. “헬렌 영애, 그만 욕심부리고 우리 좀 놔주세요.” 그들이 쓴 이야기에서 자신은 악녀였다. 두 사람을 괴롭히다 결국 가문이 몰락하고 노예로 전락한 악독한 계집이었다. 모든 것을 잃은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준 한 남자. “내게 와. 공작가를 네 발아래 무릎 꿇려줄 테니.” 그에게 맹세를 건네는 악녀. “황제로, 만들어드릴게요. 제 복수를 도와주세요.” 소설의 첫 장이 펼쳐졌다. 이것은 악녀의 이야기다. 악녀, 엘리시아의 복수극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