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내가, 아주 희한한 소리를 들었어.” 서래 정씨 16대 종손인 백야식품 정 회장의 둘째 손자, 정이준 전무. 그리고 정 회장의 장손인 정귀현의 정혼녀로 25년을 살아온 김시연. “어렸을 때 형이 입던 옷이나 쓰던 물건 중 쓸 만한 걸 가끔 물려받긴 했지만, 형이 내내 끼고 있던 여자까지 물려받는 건 너무하지.” 그는 어딜 찔러야 시연이 고통을 느끼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걸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니, 평생 시동생으로 생각했던 남자를 남편으로 맞을 수는 없다고 네가 정리하면 될 일이야.” 그가 여유 있는 태도로 커피 잔을 들어 마셨다. “…무슨 뜻인지 알아들었어요.” “알아들었다니 다행이네.” “형하고 붙어먹던 여자가 어떻게 동생하고 결혼할 수 있겠냐고 말씀드리라는 거잖아요.” 찻잔 속을 응시하던 그의 시선이 느리게 올라왔다. “정확해.” 깔끔하게 떨어지는 답변이었다.
니베이아에게 세상은 언제나 겨울 같았다. 하녀의 소생이라며 무시하는 사람들과 냉랭한 부모님. 엄동설한에 홀로 떨어져 벌벌 떨어도 돌아보는 이 없는,그야말로 삭막한 겨울이었다.하루하루 인형처럼 살아가던 중, 니베이아는 약혼을 했다. 선친들끼리 맺은 태중 혼약이었다.상대는 외스타슈 공작가의 발레르 외스타슈.모든 비극의 시작이자, 빌어먹을 사랑의 시작이었다."사랑에는 때가 있어요. 당신은 그걸 전부 놓쳤고, 나는 더 이상 당신을 사랑하지 않아요."니베이아는 10년간 단 한 번도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던 약혼자를 두고 돌아섰다.그리고, 제국을 떠났다. 이웃나라의 황후로서.이곳에서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그저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자신을 향한 황제의 태도가 지나치게 다정하다."나는 그대가 행복했으면 해.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계절을 주고 싶어."아렌트를 만난 후, 니베이아의 겨울이 넘쳐흐르기 시작했다.눈이 녹는 봄을 향해.#계약결혼 #순정->무심여주 #가족후회 #집착남주 #후회남조 #회빙환X* 표지 일러스트 : ZAF* 표지 타이틀 : 은해윤
전쟁을 제패하고 돌아온 북부의 지배자, 페르난 카이사르. 모든 것이 완벽한 그 남자는, 율리아의 불행한 어린 시절 속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 남편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아는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해. 성을 개조하든, 보석을 사들이든, 파티를 열든 전부 상관없으니.” “…….” “다만, 아침부터 그대를 마주하고 싶진 않으니 이런 짓은 삼가고.” 기억 속 다정했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일말의 애정도,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 냉랭한 사내만이 서 있을 뿐. “그대의 마음은, 내게 단 한 자락도 쓸모가 없어.”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사랑한 것이, 율리아의 가장 큰 실수였다. * 절벽 끝에 선 율리아는 한 때 제 세상이었던 남편의 얼굴을 천천히 눈 안에 새겨넣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또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더는, 그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 절박하게 달려드는 남편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사라져드릴게요, 대공 전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