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주는 기회예요. 도망갈 수 있는.”입술이 닿을 듯 말듯 아슬아슬한 거리에서 그가 속삭였다.“지금 아니면, 안 놔줄 거니까.”충동적으로 떠난 여행에서 만난 아름다운 남자.하루쯤, 이런 날이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도망…… 안 가요.”말이 끝나자마자 입술이 닿았다.“나한테 집중해 봐요. 내가 시키는 대로.”다정한 목소리와 달콤한 감각이 새겨진 스페인의 밤.그렇게 뜨거운 추억으로 남을 줄 알았다.“그때, 왜 그렇게 도망갔어요? 나 먹어 놓고서.”이랑의 유일한 일탈이었던 서진우, 그 남자가 다시 나타나기 전까지는.“오늘부터 함께 일하는 거로 하죠.”“네?”“책임지려고요, 윤이랑 씨를.”그가 여전히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난 누구와 다르게 책임감이 강한 사람이라서.”해사한 미소 뒤에 음험한 본심을 숨긴 채.
죽어가던 짐승을 구한 여자, 벨리아. 그때는 그가 이렇게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을지도 몰랐다…. 나라를 버리고 달아나려던 벨리아에게 손을 내민 남자, 칸. 길들여지지 않은 기운과는 달리 그의 몸짓은 다정했고 허름한 제 삶을 바꿔주겠다는 그의 속삭임은 달콤했다. “당신을 치료하게 해 줘요.” “나와 함께 가자.” 한 걸음만 더 내딛으면 그의 손을 잡을 수 있는데…. 그의 손을 잡아보기도 전에 오해만 쌓여가고. 다시 만난 그는 짐승이 아닌, 황제가 되어 있었다. “기어이, 황태자비가 되겠다는 건가.” “칸, 난 단지….” 감히 대답할 수 없었던 그의 질문. 그리고, “그 밤. 날 살리지 말았어야 했다. 그냥 죽게 내버려 둬야 했어.” 은혜를 갚겠다며 한없이 다정하게 굴던 남자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대는 죽어가던 짐승 새낄 구한 거야. 그 짐승이 그댈 어떻게 물어뜯을지도 모르고.” 그의 분노를 닮은 붉은 망토가 허공에서 거칠게 휘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