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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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균평점 3.54
운명의 수레바퀴는 앞으로만 돌지 않는다
4.75 (2)

타인은커녕, 스스로조차 사랑할 줄 몰랐던 제국의 기사, 이클레이. 조국의 뜻을 따라 전쟁에 나선 그는 어이없게도 한 무명 병사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죽음을 받아들이려 했으나 무엇 때문인지 그는 낯선 곳에서 ‘블랙’으로 눈을 뜨게 되고, 그곳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된다. 제 모든 걸 포기해서라도 곁에 머물고 싶게 하는 에스델을.  * “그대를 사랑한다…….” 블랙은 에스델의 맑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다시 한번 고백했다. 이제껏 겨우 참아 내던 감정을 입에 담으니 녹아들 정도로 달큼함과 동시에 인상을 찌푸릴 정도로 쓴맛이 났다. 침묵.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할 정도로 짙은 침묵이 흘렀다. 잠시 기다렸으나 그녀에게선 끝내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며 당황해하던 그녀가 고개를 옆으로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예상했던 결과인데도, 마음 한구석이 무너졌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다.” “…….” “나를 가엽게 여기는 것뿐이라도 좋아.” 블랙이 상체를 수그리며 제 이마를 그녀의 머리 위에 살포시 얹었다. 잔뜩 긴장했던지 그녀의 몸이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그저 나를 향한 감정이 동정뿐이더라도, 그대를 내 곁에 묶어 둘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나약해질 대로 나약해진 제 심장을 그녀에게 바쳤다. 심장을 불로 지진 듯한 통증이 뒤따랐다. 그녀를 한없이 바라보던 그는 힘없이 눈을 감았다.   * 이것은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겁고 값진 것인지를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두 사람의 이야기.

그대와 나 사이의 간격
3.43 (22)

시골 자작가의 장녀인 헤리에타는 왕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고 부유한 가문의 후계자, 에드윈을 짝사랑한다. 헛된 꿈이라는 걸 알기에 그에게 말 한마디조차 건네지 못하고 속만 태우던 그녀. 그리고 갑자기 전해져 온 그의 약혼 소식. 실연의 상처에 아파하던 헤리에타가 마음을 추스르며 회복하기 시작할 무렵, “얼굴들 익혀 둬. 앞으로 이곳에서 함께 지내게 될 노예니까.” 노예가 된 에드윈이 헤리에타의 집으로 오게 된다. * * * “더 구속하고, 더 억압해 주십시오. 헤리에타 님. 그것이 당신에 의해서라면 저는 기쁘게 받아들일 겁니다.” “뭐라……고요?” 구속하고 억압해 달라니. 이해하지 못할 에드윈의 요청에 헤리에타가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그녀의 질문에 대답하는 대신 말없이 그녀의 손을 제 쪽으로 가깝게 끌어당겼다. “‘그대여. 그대는 나 스스로가 인정한 나의 유일한 주군이자 삶의 숨이니…….’” 에드윈이 고개를 숙여 헤리에타의 손등 위에 조심스럽게 입맞춤을 했다. 손등에 닿은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그대는 부디 그대의 충직한 검이자 충실한 종인 나를 휘두름에 주저하지 말라.’” 그것은 기사의 서약 중 일부분으로, 기사 작위를 하사받는 이가 앞으로 자신이 모시게 될 주군을 향해 읊는 충성의 맹세였다. 눈 한 번 제대로 맞출 수 없던 고귀하고 드높았던 에드윈은 이제 그녀 발아래 있었다.

단 하루도 너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데프니 싱클레어. 아름다운 외모와 훌륭한 에티켓, 남심을 녹이는 눈웃음을 가진 그녀는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백작만으로는 부족해, 데프니. 적어도 후작쯤은 물어 와야지.” 원치 않아도 따를 수밖에 없는 숙부의 명령. 동생을 살리기 위해 그녀는 그의 꼭두각시가 되기를 자청했다. “데프니. 당신에게는 아름다운 외모 외에도 수많은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 당신에게 매료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겠죠.” 모든 걸 포기하고서라도 함께하고픈 남자. 라이언을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일종의 놀이였을 뿐이에요. 지루한 시골에서 시간 때우기에 적합한.” 하지만 그녀는 결국 라이언에게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내가 세운 기준에 미치지 못해요. 난 여태껏 단 한 번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고 바란 적이 없어요.” 허리를 펴고 시선을 맞춘 채, 그의 마음을 잘근잘근 짓밟았다. 그 뒤로 제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 채. * * * 다시 만난 그는 그 대단하다는 맥클리프트 공작가의 가주로서 그녀를 맞아 주었다. “일종의 놀이였을 뿐입니다. 지루한 시골에서 시간 때우기에 적합한.” 그리고 완벽한 귀족의 모습을 한 채 무심한 얼굴로 그녀가 했던 말을 되돌려 주었다. “혹시 내가 그때 사랑한다고 말했던 것을 진짜라고 믿은 겁니까?” 피식. 차가운 비웃음 소리와 함께 그의 입꼬리가 비뚜름히 올라갔다. 턱을 살짝 든 채 그녀를 내려다보던 그가 천천히 몸을 기울였다. “어리석고도 가엾은 데프니.” 그가 덜덜 떠는 데프니의 머리카락을 그러쥐며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내가 설마 당신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질 리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