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떠나 13000킬로미터를 날아서 도착한 파리, 그곳에서 내게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법을 알려준 프랑스 남자 “내게 그런 제의를 한 여자는 평생 처음이었어.”“헤픈 동양 여자라고 생각했겠다.”“아니, 그 반대. 심장이 멎는 줄 알았지.”손바닥을 펼쳐 쏟아지는 꽃잎을 받듯이 빛을 가득 담아 내 앞에 보였다. 자신이 부린 마술이 놀랍지 않느냐는 듯 황홀한 표정이었다. 그는 햇살 속에 감싸여 웃었다. 사랑만 듬뿍 받으며 곱게 자란 막내아들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오면서 어떤 먹구름도 경험해보지 못한 순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비보다 햇빛에 더 잘 어울리는 남자였다.
<숨어있기 좋은 방> 달라진 결말로 돌아왔다! 현실에서 탈출하고 싶은 청춘들에게 소설가 신이현이 다시 보내는 빗방울 같은 응원 ● 경쾌한 정신, 니체적 질문으로 가득 찬 소설 1994년 출간된 장편소설 《숨어있기 좋은 방》은 소설가 신이현의 데뷔작이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경쾌한 정신, 니체적 질문으로 가득 찬 소설”(문학평론가 진형준)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또한 가벼움 속에서 제법 묵직한 철학적 주제를 이끌어낸 소설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 1994년 최악의 캐릭터가 2021년 공감의 주인공으로 특히 이 소설이 당대 다른 소설과 구별되는 점은 놀랄 만큼 다른 성향을 지닌 주인공 윤이금이라는 특이하고도 이상한 캐릭터의 출현에 있었다. 사회적 통념과 질서, 원칙 ‘따위’는 도무지 관심이 없는 무개념의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윤이금은 대학의 자퇴부터 직장 무단결근, 혼전순결 심지어는 인생의 중대사라 할 수 있는 결혼에 있어서도 그리고 어떤 예측 불가능한 사건이 눈앞에 닥쳐도 단 1초의 진지한 고민이나 갈등 같은 심리적 변화를 겪지 않는다. 모든 선택은 즉흥적이고 본능적이다. 90년대를 기준으로 보자면 한마디로 무책임하기 이를 데 없는 최악의 캐릭터였다. 작가는 이제《숨어있기 좋은 방》의 새로운 결말로 우리를 안내한다. ● 길을 잃어버린 청춘들을 위하여 채플린의 유머처럼 경쾌한 이 소설은 “서른 살이 여전히 멀고 아득하게 느껴지는” 귀여운 아가씨 윤이금을 통해 세상의 갖가지 위선과 거짓을 통렬하게 비웃는다. 세속적 가치에 대한 무관심과 세상의 엄숙주의를 비판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우리는 매혹적인 하나의 가능성에 도달한다. 26년 전, 소설가 신이현이 발표해 당시 젊은 독자들을 뜨겁게 열광시켰던 이 작품이 이제 지금 또 다른 세대의 주인공들에게 보내는 빗방울 같은 격려와 응원의 목소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