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유언을 받들어 꼭 오라버니를 과거 급제시키고자, 죽어라 뒷바라지 했다.장작 패기, 바느질, 사냥해서 가죽 팔기, 물 긷기, 매실 장사 등 안 해본 일이 없었다.그러나 공부는 귓등으로도 보지 않고, 밖으로 나다니기만 해서 속이 터지는데….“아, 내가 이 녀석을 꾀어낸 게 아니라….”이번엔 또 나쁜 친구까지 사귀었다.한량이 꿈이라는 오라버니의 술벗, 부잣집 공자님.“두 분이 어찌 만나게 되신 건진 모르겠으나, 제 오라비와 사귀신 것을 보면 썩 건전하고 바른 분은 아닌 듯합니다.”오라버니를 흔드는 그의 등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그에 대한 인상은 그게 전부였다.생김새도 목소리도 이름도 성격도 기억에 남길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다시 볼 사람이 아니니까.마침 나라에서는 황녀 전하를 호위할 여자 금위위사를 선발한다는데, 녹봉이 괜찮단다.지붕도 새고, 오라버니도 밖으로 새는데, 그 돈이면 지붕이든 사람이든 하나는 고쳐 쓸 수 있겠지.그렇게 금위위사 선발 시험에 급제하고 황제를 뵈었다.“이렇게 또 보는구나.”또? 살면서 황제의 용안을 뵐 일이 지금 같은 때 말고 또 있을 수 있나?“설마 날 못 알아보는 게냐?”설마라니? 뵌 적이 없는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하지.한데, 왜 황제께서는 황당하고 서운한 표정을 지으시는지…?“나중에 알아보면 후회할 게다.”관직 생활 시작부터 황제의 으름장을 들었다.그리고 순탄하지 않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조금씩 맞아떨어져 가고 있었다.첩첩난관, 아니 첩첩연정의 시작…!
[단독선연재]신우조는 그녀를 더욱 모질게 몰아세웠다.“자존심이 없나?”하던 말을 멈춘 문지담의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차갑고 무정하고 오만한 이.그녀는 저를 경멸하는 사내의 얼굴을 더는 올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없는 줄 알았는데…….”작게 중얼거리는 대답에 신우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문지담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기분 탓일까?버림받은 여인의 땅을 딛는 걸음에서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신우조는 한참이나 그녀의 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오 년이 지났다.가죽 갑옷을 입은 늘씬한 여인.문지담이 작은 봇짐에서 전출 명령서를 꺼내 내밀었다.“소사관 문지담이라고 합니다.”신우조가 끊어버린 정혼녀, 문지담.세상이 다 아는 그 악연이 그의 부하로 왔다.참으로 처세술이 좋은 계집이다.그때나, 지금이나.불편하게 깨진 인연의 아슬아슬한 재회가 시작되었다.
[단독선연재]신우조는 그녀를 더욱 모질게 몰아세웠다.“자존심이 없나?”하던 말을 멈춘 문지담의 입술이 다물어지지 않았다.차갑고 무정하고 오만한 이.그녀는 저를 경멸하는 사내의 얼굴을 더는 올려다보지 않고 고개를 떨구었다.“없는 줄 알았는데…….”작게 중얼거리는 대답에 신우조가 미간을 찌푸리며 집중했다.“아직 남아 있었나 봅니다.”문지담은 몸을 돌려 왔던 길을 돌아갔다.기분 탓일까?버림받은 여인의 땅을 딛는 걸음에서 단단한 의지가 느껴졌다.신우조는 한참이나 그녀의 등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그리고 오 년이 지났다.가죽 갑옷을 입은 늘씬한 여인.문지담이 작은 봇짐에서 전출 명령서를 꺼내 내밀었다.“소사관 문지담이라고 합니다.”신우조가 끊어버린 정혼녀, 문지담.세상이 다 아는 그 악연이 그의 부하로 왔다.참으로 처세술이 좋은 계집이다.그때나, 지금이나.불편하게 깨진 인연의 아슬아슬한 재회가 시작되었다.
재앙의 원흉이자 황실의 천박하고 불운한 사생아.별궁에 갇혀 모진 학대를 받았던 소효에게 남은 것은 신탁을 빙자한 죽음뿐이었다."죽기 전에 1년만, 백유하라는 자와 혼인해서 살아 보고 싶습니다. 측실이라도 좋습니다."스무 살에 죽어야만 하는 공주, 소효는 그렇게 마지막 청을 올린다.어린 시절 그녀가 물속에서 구해 주었던 소년이자, 그녀의 첫사랑인 백유하를 한 번이라도 만나기 위해.“내가 불쾌하지 않도록 눈에 띄지 말고, 이곳에서 얌전히 지내거라.”대장군이 되어 전장에서 돌아온 백유하는 갑자기 생긴 측실의 존재가 거북하지만…….“설마, 날 유혹이라도 해 보려는 건 아닐 테지?”“장군께서 두려워하시는 게 불운한 저주가 아니라 제 유혹이었습니까?”햇빛에 반짝이는 붉은빛 눈동자가 유하의 가슴에 박혀 온다.마치 오래전 저를 구해 주었던, 얼굴도 모르는 소녀의 것과 닮아서.“보름에 한 번, 장군께선 와 주실 겁니다. 저를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제게 유혹당하지도 않으실 테니까요.”그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고 싶어졌다.“백가의 기운으로 저를 짓밟으러 오십시오.”소효는 주눅 들지 않고 당당하게 말했다.“절 단속하셔야지요. 제가 다른 마음을 품지 않도록.”소효의 말에 유하는 차갑게 대꾸한다.“차라리 울어. 울면서 애원하면 들어줄지도 모르잖아.”“그건 좀 더 나중에요. 아껴 두려고요.”언젠가 저를 자유롭게 놓아달라고 빌 때를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