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후의 장례식 날, 오라비인 황자가 황제와 황비는 물론이고 제 목까지 쳐, 피 묻은 황위를 거머쥐는 비참한 결말이 기억나버렸다. 비극을 피하기 위해선 황제를 설득하고, 오라버니에게 미움 받지 않아야 하며, 마지막으로 제 목을 벤 기사에게 동정 받아야 한다. 백설을 죽일 수 없어 도망치게 도와주었던 사냥꾼처럼. 그렇게 그에게 동정 받을 생각이었는데…. “있죠, 눈 마주치고 대화해주면 안돼요?”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불편이라니요. 꼭 동백꽃 같아서 예뻐요.” 왜 내가 동정하고 있는 건지! * “제가 만일 명예를 빛내고 돌아올 수 있다면….” “…그때는 부디 전하의 곁에 머무르는 것을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울음이 목 끝까지 치닫고서야 막연히 깨닫게 된다. 이 감정의 이유를. 수시로 당신을 떠올리고, 함께한 시간들을 그리워하고, 이토록 간절히 당신의 행복을 바라는 이유는, 당신이 어느새 부터인가 내게 소중한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랜 투병 생활 끝, 삶의 유일한 낙이었던 소설 속 세계에서 다시 눈 뜨게 되었다. 멀쩡한 육신과 넘치는 재력, 뛰어난 마법 능력과 아낌없이 사랑해 주는 가족까지. 무엇보다 최애가 제 약혼자라니. 마치 제 행복을 위해 빚어진 세상 같지 않은가. 하지만 다른 이를 향해 해맑게 웃는 그를 발견했을 때, 그녀는 뒤늦게 떠올렸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자신이 아니었다는 것을. * 햇살을 가득 머금은 다정한 눈빛, 부드럽게 얽힌 손, 그리고 누구보다 행복해 보이는 저 웃음. 그래, 그림 같은 연인이란 바로 저들에게 어울리는 말이겠지. 마주 선 남자와 여자를 지켜보며 샤르티아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제 동생과 제 약혼자를. “사랑하고 있습니다.” “……저도 그래요. 사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이 완벽한 고백이 알리는 바는 한 가지다. 당신의 행복은 그곳에 있고, 이제 그 손아귀에 거머쥐었다는 것. 그의 행복을 바랐으니 분명 기뻐해야 하는데. 참 이상한 일이다. 어째서 세상이 흔들리는지. 시야가 젖어 드는지, 심장 깊숙한 곳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고통스러운지 모르겠다. 그런 끔찍한 기분 속에서 샤르티아는 인정했다. 사실 오래전부터 자신은 괴로웠으며, 이제 더는 버틸 수가 없노라고. 결국 그녀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소에서 도망치듯 뒤돌아섰다. 제 노력이, 제 육신이, 제 사랑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 버리기 전에. 그녀는 그를 떠나기로 했다.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빙의됐다. 내 가방끈 돌려주세요! 답도 없는 상황에 절망하길 잠시. 기왕 이렇게 된 거, 돌아갈 방법을 찾기 전까지 공부하느라 미뤄 둔 즐거움을 좀 누리기로 했다. 연애라든가, 연애라든가, 연애 같은. 마침 옆집으로 이사 온 남자가 절세가인이니 내 남자 삼기로 결심했다. “로, 로브는 안 벗으면 안 될까요? 얼굴을 보이는 게 부끄러워서…….” 물론, 공대생의 체크 셔츠마냥 로브 못 잃는 너드지만. “……만약 제가 그 마탑주라면, 저를 버리실 건가요?” 게다가 성격 파탄 난 사이코패스라는 그 마탑주와 동일인인 것 같지만. “그, 그러니까 이 방은 들어가지 말라고 말씀드렸는데…….” 심지어 내 사진과 그림, 기사들을 방 가득 붙여 둔 음침한 인간이지만……. 딱히 큰 문제는 아니었다. 기껏해야 로맨스물인 줄 알았던 이 세계가 사실은 내 목숨을 노리는 공포 생존물이라는 사실에 비하면야.
낯선 세계에 떨어져 구원자란 사명을 짊어지게 된 이우. 어느새 부모가, 친구가, 연인이 된 사람들을 위해 기꺼이 희생을 택했건만 결국 돌아온 건 모든 것이 기만이었다는 차가운 사실 뿐이었다. 절벽에 스스로 몸을 던진 이후, 첫 만남으로 되돌아간 그녀는 결심한다. 이 세계의 구원자가 아니라 파괴자가 되리라고. 복수를 위해 선택한 인물은 그녀가 아는 한 유일한 선(善)이었던 남자, ‘백 번째 하얀 가지’. “저는 당신이 필요해요.” “저를…… 말입니까.” “네, 당신이요. 당신이어야만 해요.” 이 세계의 악을 자처한 구원자는, 이 세계의 선인 남자를 복수의 수단으로 사용할 계획이었다. “고해하겠습니다. 이제, 당신이 나의 신입니다.” 그러니까 이 증오스러운 세계의 피조물을,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는 일은 전혀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의 구원이 끝난 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