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열의 낙랑공주> <정열의 낙랑공주>는 개화기 문인이자 영화인이었던 윤백남의 소설이다. 무르익었던 봄빛도 차차 사라지고 꽃 아래서 돋아나는 푸르른 새 움이 온 벌을 장식하는 첫 여름이었다. 옥저(沃沮)땅 넓은 벌에도 첫 여름의 빛은 완연히 이르렀다. 날아드는 나 비, 노래하는 벌레…… - 만물은 장차 오려는 성하(盛夏)를 맞기에 분주하였다. 이 벌판 곱게 돋은 잔디 밭에 한 소년이 딩굴고 있다. 그 옷 차림으로 보 든지 또는 얼굴 모양으로 보든지 고귀한 집 도령이 분명한데 한 사람의 하 인도 데리지 않고 홀로히 이 벌판에서 딩굴고 있다.
<윤백남 소설정획점고인> 평양에서 서울로 아버지를 따라간 후 정인을 못 잊는 외아들! 외아들 성세창은 평안감사로 있던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평양 감영에서 옥소선이란 명기를 만나 사랑에 빠졌던 그는, 아버지를 따라 가느라 정인을 평양에 두고 왔습니다. 음식도 잘 먹지 않고 글도 읽지 않고... 이런 아들을 보는 어머니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아버지는 그를 망월암으로 보내는데... 성세찬은 망월암에서 몰래 옥소선을 보러 탈출합니다. 앞으로 성세찬에게는 어떤 일들이 일어날까요? 부모님은 외아들이 사라진 것을 알게 될까요? * 소설정획점고인(掃雪庭獲覘故人)은 ‘뜰에서 눈을 쓸며 마음이 멀어진 사람을 엿보아 얻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윤백남 이식과 도승> 양반집, 총명하나 허약한 어린 아들의 선택과 그 결과! 광해조 시대, 저평읍 백아곡에 열 살 된 이식(李植)의 집이 있습니다. 이식의 집은 이 곳에서 여러 대 동안 양반으로 살아왔고, 가세도 부유하였으며 사람들이 착하고 어질어 마을의 존경을 받는 집안이었으나 늦게 얻은 외아들, 식이가 총명은 하지만 항상 몸이 약한 것이 걱정이었습니다. 어느 날, 식이가 어머니에게 용문산 같이 훌륭한 절에서 여러 고승(高僧)을 모시고 몇 달이나 몇 해를 지내고 보면 필시 몸도 건강해지고 학업도 심히 진취할 것 같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식이는 부모는 고심 끝에 식이를 용문산 절로 보내는데… 과연 식이는 절에서 어떤 고승을 만나게 될까요? 그리고 그의 삶은 어떻게 바뀌게 될까요? 이제 식이와 고승을 만나봐야겠습니다.
<윤백남 원수로 은인> 군법대로 처벌한 아버지의 원수를 갚으려는 소년이야기! 때는 정조 기유 이월, 아직 부는 바람이 몹시 추운 이른 새벽. 군언 이주국이 무과총사로 처음 제장을 통솔하여 한강의 모래밭에 군기를 배열하고 습진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모두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이 낙오하여 있음에 몹시 모욕감을 느낀 주국. 그래서 빨리 대열에 합류하라고 소리쳤으나 그 병사는 이내 쓰러져버리는데…. 군법에 충실한 주국은 그 병사에게 곤장 30대를 치라고 하고, 그 매를 다 맞고 죽어버린 병사… 병사의 아내와 총기 있는 아들이 찾아와 목놓아 우는데… 과연 이주국과 병사의 아들은 어떤 관계를 맺고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요? 이 두 사람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윤백남 상방기현> 열네 살에 상경한 어린 총각의 기이한 선택! 홀어머니가 시골에서 글방에 보내 글을 가리키며 키운 상동이가 있습니다. 가세가 기울자 어머니는 출세의 길을 찾아보라며 그를 서울로 보냈습니다. 그때 그는 열 네 살이었습니다. 정한림의 상노로 들어가 서울살이에 좀 익숙해진 상동이는 어느 날 소경을 만나 장난을 치게 됩니다. 그 후, 상동이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그의 운명을 바꿔놓는 신비한 일들이 펼쳐지는데... 이제 상동이와 인연을 맺을 사람들을 만나봐야겠습니다. * 상방기현(廂房奇現)은 ‘행랑방에서 기이한 일이 나타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윤백남 초췌연화편> 젊은, 고려 충선왕이 원나라에 두고 온 정인이야기! 오늘도 충선왕은 원나라에 남겨 두고 온 정인을 잊지 못해 잠들지 못합니다. 원나라에 머물 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나누었던 처녀는 원나라 종실의 딸입니다. 고려 부왕의 갑작스런 승하로 고려로 돌아가 왕이 되어야 하는 긴급한 상황인데, 처녀는 귀하신 외동딸이라 부모가 먼 나라로 보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셔서 생이별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충선왕은 매일 밤, 달을 보고 그녀를 그리워하며 나날이 수척해지고 있습니다. 과연 충선왕과 원나라 처녀의 사랑은 어떻게 될까요? 모든 것을 버리고 그녀에게 갈까도 생각하는 충선왕의 애뜻한 사랑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윤백남 순정의 호동왕자> 낙랑공주를 잃은 호동왕자의 가슴 아픈 사랑! 낙랑공주가 국보인 나발과 북을 깨뜨려 버려 낙랑국을 고구려에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낙랑왕 최리의 노염을 사서 그녀는 참사를 당했습니다. 호동왕자는 죽은 낙랑공주를 잊지 못해 애마를 타고 그녀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호동왕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계속 눈물만 흘립니다. 이런 호동왕자를 사랑한 국왕은 그에게 태자의 자리를 주려고 하는데... 과연 호동왕자는 고구려의 왕이 될 수 있을까요? 호동왕자가 진정으로 사랑한 낙랑공주를 위해 어떤 선택을 하는지...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봐야겠습니다.
<후백제 비화> 윤백남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전5권 중 5권이다. 후백제비화, 이식과 도승, 종침교명명유래기, 집념 4편을 실었다. 후백제비화 “이봐라. 우리가 지금 아무리 일개 이름 없는 농군의 집안이라고 하나, 우리 조상은 대대로 백제의 녹을 먹은 백제 명족의 줄기로다. 백제 망한지 이백 년, 발하자면 우리가 신라 백성노릇을 한지도 오륙 대가 넘고 백제 왕국의 자취는 지금 찾아보려야 볼 수도 없는 지성이지만 그래도 우리는 백제의 후손이고 백제의 피를 받은 사람이로다.” “백제왕국을 재건하겠습니다.” 십 수 년 후, 한창 북원 도독 양길이 성하고 그의 부하 궁예의 작패가 나날이 심하여 갈 때 갑자기 서울에 나타난 견훤은 군사 되기를 지원하였다. 한창 신라에서는 군사를 모집하던 중이라 곧 군사에 뽑혔다. 여왕은 견훤에게 일천의 군사를 맡겨서 궁예 토벌의 길을 떠나기를 명하였다. 이튿날 왕이 준 일천 정예를 인솔하고 토벌의 길을 떠났다. 이러한 삼사 일이 지나서 서울서 거리가 좀 멀어진 때쯤 하여 저녁 때 어떤 성에 들어갔던 이 궁예 토벌군은 갑자기 창끝을 들어서 그 성을 빼앗았다. 그의 손 안에는 일천오백 명의 군사가 있었다. 견훤이 치면 반드시 함락이 되고 함락이 되면 반드시 몇 백 명의 군사를 얻게 되고 - 이리하여 십여 일간을 좌충우돌한 뒤에는 그의 막하에는 오천 명이라는 적지 않은 군사가 달리게 되었다. 이 오천이라는 대군으로서 그가 들이친 것은 신라의 웅성雄性 무진주武珍州였다. 무진주도 삽시간에 함락이 되었다. 이 무진주까지 함락이 된 뒤에는 견훤은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다. 효공왕 삼 년 - 즉 견훤이 스스로 칭왕한지 구 년 드디어 견훤의 세력은 완산주에까지 폈다. 백제의 옛 터도 인제는 자기의 손아래로 들어왔다. 완산주가 함락되던 날, 부하 장졸들은 모두 전승의 축하연을 열고 정신없이 좋다고 날뛸 때에 그들의 왕인 견훤은 홀로 사람들을 물리치고 외따른 곳으로 가서 하염없이 울었다. 국호는 후백제後百濟라 하였다. 그새 구 년간을 왕이라 자칭하면서도 벼슬을 베풀지 않고 조朝를 열지 않던 견훤은 국토를 세운 뒤에 비로소 관제를 세우고 국가로서의 의식을 차렸다. 이식과 도승 “저 같은 외모 저 같은 총명을 가진 아이가 어찌하여 그렇게 몸이 약할꼬.” “참 신명도 야속하시지. 그것을 슬하에서 기르지 못하고 떠나보낸 후 우리 두 늙은이가 앙상하게 남겠구려.” 이렇게 하여 이식은 소망하였던바 용문산에 기식하여 몸을 조양하는 한편 학문을 닦게 되었다. “다시 한 번 부탁하는 것은 세상 어떤 사람에게든지 배울 생각을 하고 남을 업수이여기지 말라.” “연소한 서생書生이 끊임없는 생각으로 연구하고 애쓰나 깨닫는 바가 지극히 적은 모양이니 참 가엾다. 저 젊은 심력을 헛되이 허비하는 것이 보기 딱하지만 바로 일러주지 못하니 더욱 딱하구나.” “스승으로 모시게 해주소서.” “글쎄, 아직은 잘 모르겠네마는 내년 정월에는 경사로 자네를 찾아갈 터이니 그때 이야기하지.” 그 해 문과文科에 장원하여 영광이 미칠 데 없었다. 곧 시골의 부모를 모셔 올리고 다시 경사의 귀족과 통혼하여 일가일문이 융흥하였으나 항상 잊지 못하는 것은 용문사의 스승이던 부목승이다. “병자년丙子年에는 큰 난리가 일어날 것이니, 공은 필시 일가를 이끌고 영춘永春 땅에 피하여 있으면 가히 면할 것이오.” 하며 그곳의 지리와 형태를 일러주었다. 이식은 고맙게 받들어 들고, “그럼 또 언제나 뵈올 수 있사옵니까?” 하니 노승은 태연히, “○○년 ○○○○날 ○시時에 관서關西에서 만날 것이오.”하고 대답한 후 또다시 표연히 가버리었다. “그 사람이 ○○년 ○○○○날 ○시에 관서에서 만나기로 하였사오니 그때 신을 관서로 보내어주시면 만나볼까 하옵니다.” 방금 자기가 타고 가는 남여의 앞잡이를 멘 늙은 노승 - 그 사람이야 말로 공이 여태까지 기다리고 두루 찾던 그리운 스승이 아니었던가. “이렇게 다니시다가는 나중에 외로이 임종하실 거니 부디 동행하기 바라오.” 그러나 노승은 현현히 고개를 젓고, “다 천명이니 나는 천명을 봉승할 뿐이오.” 하며 사흘 동안에 여러 가지로 도道에 대한 설법을 들려주었다. 공은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 “스승의 이 가르치심을 널리 달達케 하오리다.”하니, 스승은 다시 위로는 나라의 일로부터 아래로는 가사家私에 대한 것까지 여러 가지로 미리 말하여준 후, “이 말대로 행하면 길이 평안히 있을 것이오.” 하고 공의 손을 어루만졌다. 종침교명명유래기 “당신두 법도를 지켜야 남두 예절을 지키지.” “윤비는 성품이 포악하고 투기가 자심하여 용안에 조흔(손톱 자국)이 끊일 날이 없으니 국모의 체례를 잃은지라 장차 어이하면 좋을 것이냐.” 이리하여 정승 윤필상尹弼商을 비롯한 이세좌李世佐, 이극균李克均, 성준成俊, 이파李坡 등등의 중신들이 연서하여 폐비헌의廢妃獻議를 올리게 되었던 것이다. 허종許琮, 허침許琛 같은 유명한 형제도 있었지마는 그들은 교묘히 폐비헌의에 빠지고 말았다. 허종의 아우 허침許琛은 성정이 지나치게 곧은 사람이어서 폐비헌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필경 각 대신들의 미움을 받아 체직을 당하고 말았지마는 허종은 굳세게 반대도 하지 않고 태도를 모호하게 가졌다. “다행히 왕자가 유충하시니 그 비밀을 아실 리 없다고 보는데, 천만에. 세상에 비밀이란 없습니다. 감추면 감출수록 드러나기 쉬운 법이요.” 허종은 지각이 깊은 누님의 말에 대답할 말이 얼른 나오지 않아서 잠시 머뭇거리었다. 이 눈치를 본 매씨는, “공연히 자손에게 큰 후환을 남겨놓지 마시우.” 나귀는 금시 다리 중턱에 이르렀다. 이 순간 어떤 생각이 번개같이 허종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다음 순간 그는, “앗.” 하는 소리와 함께 청계천 진흙탕 개천으로 내려 떨어졌다. 이러한 고역의 묘계로서 허종은 필경 폐비헌의서에 자기 이름을 서명하는 위기를 피하고 말았다. 연산이 왕위에 오른 후에 생모 되는 윤비의 설원을 하기 위한 소위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서 전부 죽음을 당하였고 이미 죽은 한명회韓明澮 같은 사람은 그 묘를 파서 백골에게 욕을 보이는 등의 복수를 당하였건만 허종許宗 만은 폐비헌의에 참가한 문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화를 당하지 않았던 것이다. 후일 위대 사람들이 나무다리가 썩어 위태하다고 해서 동네 사람들의 추렴으로 돌다리를 놓게 되었고 돌다리를 놓게 되니 자연 이 다리 이름을 짓자하여 이런 이름 저런 이름을 가리던 중 어느 한 사람이 이 다리에서 허종 대감이 낙마해서 청계천 흙탕물에 빠졌기 때문에 이번 사화에 피해를 면했으니 허종의 종琮 자를 따다가 종침교琮沈橋라고 명명하라고 건의한 것이 만장일치로 가결되어 종침교라는 괴상한 이름이 생겼다고 하는 것이다. 집념 “아주머니 이런 말을 하오면 저년 환장을 했다고 하시겠지마는 나는 암만 생각해보아도 김감사 대감을 저버리고는 내내 살까 싶지 않습니다. 이 길로 나는 그 대감 뒤를 따라 서울로 올라갈 테니 아주머니는 이 집과 세간을 다 차지해 가지고 어린 기생 하나 데려다가 살고 계슈.” 여기는 임진강 나루터 주막이다. 김감사는 강을 건너기 위하여 자리를 뜨려하였다. 이때에 함께 서울로 수행하는 책방이 감사의 방으로 들어와서, “기생 두옥이가 대감께 뵙겠다고 뒤를 쫓아왔습니다.” “날 보러 뒤를 쫓아왔다하니 오는 것도 분수가 있지. 수백 리를 쫓아오다니 그게 무슨 망거이냐.” “평소의 소망이 평생을 대감을 모시고자 하오니 행여 저버리지 마시고 일행의 뒤를 따라 서울로 가게 해주십시오.” 하고 애원을 하였다. “이 계집 보교에 태워 곧 돌려보내라.” 이 날 밤 삼경에 주막을 빠져나온 두옥이 무심히 흐르는 임진강 물에 몸을 던져 한 많은 일생을 청산해버린다. 하루는 남판서가 어머니 방에 들어가니 전에 보지 못하던 계집애 종 하나이 윗목에서 걸레질을 하고 있다가 조용히 일어선다. 비록 손에는 진 걸레를 들었으되 그의 아미풍협은 청아한 그의 눈과 아울러 진실로 절세의 미인이었다. “저 위인이 삼월이에게 생각이 있는 게로다.” 그리하여 그날부터 삼월이는 남구만의 방종이요 겸하여 소첩이 되고 말았다. “네, 소중하신 몸을 앉아서 청해서 죄송하오이다마는 요즈음 영감께서 부리시는 삼월이란 계집은 반드시 큰 앙화를 영감께 끼칠 인물이오니 십분 조심하십시오. 요새 영감의 기상을 뵈오니 살기가 뻗쳐있습니다.” 저녁에 남구만은 문갑 서랍에서 문득 한 종이 조각을 발견하였으니 거기에는 계집의 필적으로, “영감, 소첩은 영감의 사랑을 못내 받지 못할 몸이오라 이제 영원히 돌아가나이다.”하는 간단한 유서가 씌어있다. 수일 후에 남구만은 뜻밖에 김정승의 부름을 받았다. 김정승이란 지난해 가을에 평양감사로서 내직으로 영전하여 들어온 김감사 그이다. 기괴한 병이란 다른 게 아니라 밤만 되면 온종일 멀쩡하던 사람이 별안간 통성을 내짖으며 온 방을 헤맨다. 그리고 머리를 얼싸안고 반은 죽는다. 그리고 날이 새기 시작하면 씻은 듯 부신 듯 고통은 없어졌다.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다. 젊은 계집 하나가 이 편을 등지고 서서 무슨 연장으로 김정승 아들의 머리와 몸을 난타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광경은 오직 남승지의 눈에만 보일 뿐이오,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남승지는 자기 방으로 삼월이를 데리고 들어가서, “대관절 네가 귀신인 것은 이제 확실히 알았다마는 무슨 일로 김정승의 아들을 그다지 괴롭게 하느냐.” 하고 물었더니 삼월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제 영감의 눈에 띄인 바에야 숨긴들 소용이 있습니까. 소첩은 평양 기생 두옥이란 계집으로….” 남판서는 누누이 두옥의 그른 점을 지적하여 타이르고 평생 그의 영을 위로해준다는 조건으로 그를 멀리 떠나게 하였다.
<우연의 기적> 윤백남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전5권 중 4권이다. 우연의 기적을 비롯, 안류정, 원수로 은인, 한말상관계견록 4편을 실었다. 우연의 기적 “대관절 아까 이 그릇에 무얼 담아서 먹였길래 저 애가 자꾸 그것을 달란단 말이냐.” 김진사는 며느리를 보고 묻는다. “무언지 제 먹고 싶다는 대로 주려무나.”한다. 순희는 하는 수 없어 비상을 물에 개어 놓은 이야기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동안을 이상한 눈으로 아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김진사는 며느리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서, “어서 그것을 타서 주어라. 비상은 사랑에 얼마든지 있으니. 그것이 여느 사람이 먹으면 죽되 그 병 있는 자가 먹으면 약이 되나보다. 만일에 그것으로 해서 죽는다한들 기왕 죽게 된 자식이니 무슨 한이 되겠느냐.” 하고 비상을 갖다가 며느리 손에 쥐어주었다. 안류정 “무수리 아니라 상궁이라도 못 들어간다. 못 들어가.” “아니 수문장을 며칠이나 해 먹으려고 이러세요?” 하고 무수리는 발악을 하였다. 손호관은, “이년!” 하고 벽력같은 소리를 지르며, “너 같은 년은 문소의와 함께 천벌을 받을 년이다.” “무어 어째요?” 하고 무수리의 발악이 끝나기 전에 손호관의 손은 어느덧 번개같이 환도를 빼어들고, “천벌이닷!” 하며 무수리의 어깨로써 가슴에 걸쳐 후려쳤다. 무수리는 비명도 울리지 못하고 선혈을 내뿜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물론 즉석에 절명이다. 원수로 은인 여러 사람들이 남은 매를 마저 때리고 물러났을 때, 그는 이미 숨이 끊어져 있었다. “후지자後至者 몸이 약하와 매 아래 죽었나이다.” 주섬주섬 끊어진 곤장을 주워섬기며 한 장정壯丁이 이렇게 말하니 아까부터 눈을 딱 감고 고개를 돌리었던 주국의 눈에서 처음으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정경이야 가엾지만 국법은 꺾을 수 없었다.” 그는 같은 말을 한 번 더 뇌이며 창황히 말 등에 올라탔다. “세상에 사람이 귀하다는 것은 그 지위가 높고 얕음을 이르는 것이 아니라, 그 뜻의 맑고 흐림을 두고 하는 소리요. 부인도 아는 바와 같이 저 이 아무개로 말하면 비록 내 몸을 원수로 노리기는 할망정, 십년간 품은 뜻을 꺾지 않고 아비 원수 갚기를 한시 잊지 않으니 이 어찌 출천의 효자가 아니겠소. 그러므로 이제는 그의 뜻을 꺾으려던 내가 도리어 부끄러운 생각이 들며 탄식하는 소리가 절로 나는구려.” “소인이 이미 대감마님의 넓으신 은혜를 입사옵고, 또한 오늘까지 크신 돌보심까지 받았삽더니 이제 이같이 죽을죄를 짓사옴은 오로지 사람의 자식으로 아비의 원수를 갚지 않을 수 없었음이오니 대감께옵서도 부디 소인의 배은함을 탓하지 마옵소서.” 한말상관계견록 한말시대의 상계를 논함에 확고한 문헌이 없어 회상록 내지 견문록을 체계를 무시하고 단편적으로 적록한다며 열립군列立軍과 육의전六矣廛, 부보상負褓商과 패랭이, 물산객주物産客主와 보행객주步行客主, 광고술을 통해서 본 상계商界, 상업융통자본商業融通資本은 양반계급중심兩班階級中心, 무전대금無典貸金과 전당국으로 나누어 기록했다.
<순정의 호동왕자> 윤백남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전5권 중 3권이다. 순정의 호동왕자를 비롯, 정열의 낙랑공주, 장마가 실어온 발복, 투환금은 4편을 실었다. 순정의 호동왕자 돌아와서도 무덤 앞에 묵묵히 서있을 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머리를 가슴에 푹 묻고 서있는 그의 두 눈에서는 눈물만 비 오듯 하였다. 지금 고구려에서는 낙랑을 정복하였다고 그 전승축하 기분이 온 나라에 넘쳐있다. 그러나 호동왕자의 가슴은 쓰리고 아프고 적적할 뿐이었다. 정열의 낙랑공주 그로부터 수일 후 공주에게서 다시 온 편지를 보고 호동왕자는 눈물을 흘렸다. 소녀가 몰래 그 북과 나팔을 깨뜨려버렸습니다. 이것 모두가 오로지 낭군을 뵙고 싶은 정열에서 나온 바이니 인제는 부왕께 그대로 품하시와 소녀를 데려가도록 차비를 하여 주십시옵소서. - 하는 뜻이었다. 장마가 실어온 발복 아 - 아 - 이 무슨 기적이냐. 박명원의 생각에는 시골구석에서 빈한하게 자란 색시, 오죽이나 무무하며 시골태가 오죽하랴, 이렇게 생각했더니 급기 대해본즉 눈이 확 티이는 느낌이었다. 그 청수한 용모, 단아한 동작, 순하면서도 명석한 대답소리 비록 옷은 무명옷일망정 바야흐로 귀인다운 풍도가 풍성하였다. “친정이 빈한한 것이 한 개 험절이오이다.” 하였더니 정조는, “그게 무슨 말씀요. 과인이 처가의 덕을 보잘 사람요. 친정의 빈부가 무슨 상관요.” 투환금은 “광속에 있는 돈 포대 속엔 돈은 한 푼 없고 말끔 해골쪼가리뿐이올시다.” “그게 무슨 소리냐?” 하고 감사 자신이 밖으로 뛰어나가서 광속을 검사해보니 과연 돈은 한 잎도 없고 전부가 해골쪼가리 등속으로 바뀌어져 있었다. 백성의 고혈을 빨아먹어 만든 졸부는 역시 하룻밤에 거지가 되고 말았다. 조 씨는 속으로 녹림객의 짓이로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지마는 그런 내색도 아니 한 것은 물론이었다.
<홍윤성과 절부> 윤백남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전5권 중 2권이다. 홍윤성과 절부, 사각전기, 상방기현, 소설정획점고인 4편을 실었다. 홍윤성과 절부 “이번 과거에 응시하는 사람으로는 홍계관洪繼寬의 집 대문을 두드리지 않는 이가 없으니깐.” “공은 인신人臣에 극귀할 몸이시라 군주에 다음가는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르실 줄 믿으오.” “황송하오나 과연 공이 장차 인간으로서의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것이야 두말할 것도 없지만 꼭 한 가지 너무 표한하심이 험이오니 남에게 덕행을 베푸시지 않으면 무자無子할 것이오.” “몇 해 전 아비는 죽삽고 집안도 퇴폐하였사오나 아비 임종 시에 후일 옥사를 만날 터이니 홍계관의 이름을 대라고 거듭 당부하더이다.” “우리 아버지가 죽을 때,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평생 무자하리라 하더이다.” “옛날 공이 뜻을 얻지 못했을 때에는 내 집 솥에서 십여 년을 같은 밥을 얻어먹었더니 이제 처신출세處身出世함에 내 자식 하나를 벼슬자리에 앉혀주지 않겠다니 그런 고약한 심사가 어디 있을까.” “당신이 무죄한 것은 아오마는 살려두면 장차 이 일을 세상에 알릴까 무서워.” 한마디와 함께 그는 홍계관의 아들을 죽이듯 전은前恩을 불구하고 그 목을 잘라버렸으니 어찌 이 배행의 보복을 받지 않을 수 있으랴. 노인은 눈을 감고 무엇을 생각하더니, “벌써 한 달이 넘었지. 그 삼촌 되는 사람이 홍 대감 칼에 맞아 돌아가셨다우.” “이놈 홍윤성이, 두고 보아라. 네가 이미 홍계관의 공을 잊고 그 자식을 죽인 것이며, 홍산사람(鴻山人) 나계문羅季文을 죽여 그 아내 윤 씨로 하여금 철천지 원한을 품게 한 것이며, 남의 논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한 것이며 그 외의 모든 죄과에 대한 보복을 내 비록 미천한 일개의 아녀자이지만 하늘에 대신하여 그 보복을 받게 하리라.” “경은 전은을 잊어버리고 계관의 아들을 죽였지만 짐은 그렇지 아니하노라.” 어떻게든지 그 죄과를 풀어보고자 홍계관과 그 아들을 위하여 큰 재를 올리며 지금은 초야의 한구석에 흩어져 있던 삼촌의 뼈를 모아 다시 후히 장례를 행하고 옛날 홍계관이 살던 동네를 홍계관리洪繼寬理라 이름까지 주었다. “한 사람의 숙부에게 베풀은 적악의 보복이 이만할진댄 참으로 세상에 죄과 같이 무서운 것이 없을 것이요, 또한 절부같이 귀한 것이 없으리로다.” 사각전기 “참 수가 나셨습니다. 인제 구문을 주셔야 할게 아니요.” “드리다 뿐이오. 이 어음을 찾으러 함께 가서 거기서 구문 천량을 드리리다. 그런데 대관절 그 물건이 무슨 보배요?”하고 물었다. “아니 무엇인지도 모르고 파셨습니다그려.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내가 싸게 사서 팔아먹을 것을 그랬습니다그려.” 하고는, “그게 사각蛇角이라는 것인데 수백 년 묵은 뱀의 뿔이올시다.” “그게 그렇게 값이 나간단 말이오.” “천하의 보배이죠. 지금 우리나라 황후께서 태자가 없으셔서 사각 하나를 구하셨는데 원래 사각을 한 쌍만 얻어먹으면 반드시 아들을 얻는 것이외다. 그런데 지금 황궁에 있기는 단 하나뿐이어서 각방으로 짝 하나를 구하지마는 백만 냥의 상을 걸어도 없는 것이외다.” “아니 그럼 지금 그것을 사간 상고는 백만 냥을 받겠소그려.” “놀랄 것이요. 지금 녹림국 대왕이 되었으니까.” 대감 의동은 수천 금을 업산에게 내주어 기울어진 옛 주가主家를 부흥하는데 쓰게 하였다. 상방기현 “이 자식들아 그까짓 소리하면 외눈이나 깜짝이니.” 하고 땅에 떨어진 지푸라기를 집어 개천의 똥물을 묻혀가지고 사붓사붓 걸어가서 소경의 입에다가 그 지푸라기를 쓱 문지르고는 화닥닥하고 뛰어 달아났다. 점을 친 소경은, “흥 요놈 내가 모를 줄 알고, 요놈 남의집살이하는 상가란 놈이로구나. 요놈 찾아서 다리뼈를 분질러놔야지.” “이 자식아, 나이 진득한 자식이 장난을 해두 이따위 장난이야.” “네 그저 죽을 때라 잘못했습니다. 저는 오늘부터 속죄 겸 선생님의 제자가 돼서 점 공부를 하고 싶으니 절 데리고 가십시오.” “인제 때가 돌아왔다. 너 이 길로 수구문 밖에 나가서 성을 끼고 남산 쪽으로 올라가서 큰 나무 밑에 숨어 앉아있으면 누가 송장을 메고 와서 나무 가지에다가 덕을 매고 갈 터이니 그 덕에서 송장을 꺼내서 업고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가져오너라.” “이 자식 너 같이 팔자 좋은 자식도 드물다. 불은 내가 때줄 것이니 너는 옷을 벗고 그 시체를 품고서 체온으로 녹여주어야 한다. 불은 때긴 하지만 그것은 냉기를 가시게 하자는 게고 불로 녹여서는 살 사람도 죽어.” “인제 숨을 쉽니다.” 시체는 픽픽하고 목에서 무엇이 터지는 듯한 소리를 하더니 길게 한숨을 쉬고는 몸을 약간 움직인다. “댁 아가씨가 살아계시니 뫼셔 가십시오.” “어머니 미가처녀로 이런 말을 여쭈오면 큰 변으로 여기시겠지마는 저는 출가할 생각이 없습니다.” “충신은 불사이군이요, 열녀는 불경이부라고 소녀는 이미 낭군이 있지 아니 하오니까.” 판서의 문벌로서 맹인의 집 상노 아이와 결혼하였다면 체면상 참을 수 없는 일이라 그날부터 상동을 자기 집 사랑 - 작은 사랑에 데려다두고 독선생을 앉혀서 공부를 시키었다. 상동은 초사를 하게 된 후에 장인이 집을 사준다는 것도 ‘남자 어찌 처가의 재물을 받겠소.’ 하고 고사 불수하고는 회동 큰길 가까이 흉갓집이라고 해서 텅 비어 있는 큰 기와집 한 채를 빌려서 들었다. “이 궤 속에 들은 보배는 이 방을 여는 사람에게 선물 드린다.” 소설정획점고인 평안감사로 아들 세창이를 데리고 서경에 오래 유하고 있던 성판서가 내직으로 승차가 되어 올라온 이후로 아들 세창은 나날이 초췌하여 갔다. 세창이는 아버지를 따라서 평양 감영으로 내려가서 책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동안에는 아무 탈도 없었다. 그런 것이 어느덧 감영에 출입하는 옥소선玉簫仙이를 알게 된 후부터는 딴 사람이 되고 말았다. 옥소선도 이제 한 개의 성세창이라는 인간과 정이 들게 되었다. 이렇게 지내오기를 햇수로 삼년이나 하여 오던 끝에 청천에 벼락이 내리고 말았으니 그것은 감사의 내직 승차였다. “시하에 계신 몸으로 외첩을 데리고 봉행한다는 것이 외모 조시에 체통이 사나웁고, 아드님 되신 도리에 어그러지오니 다음날 잊지 마시고 불러주시면 설혹 분골이 될지라도 기어이 승순하오리다.” “에라, 내 불효 망측하다 할지라도 소선이 한 번만 더 보고.”하는 생각으로 세창이는 몰래 자기 방으로 돌아가서 넣어둔 돈을 꺼내어 몸에 지니고 그 밤으로 망월암을 탈출하였다. “잘 있기는 하죠마는 만나보실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됐으니 그간 눈이 오면 감영에서는 눈 쓰는 막벌이꾼이 돼서 감영내하에 들어가서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이시우. 그래서도 아무 동정이 없으면 그년은 줄일 년이지.” 안색이 싹 변한 소선이는 매정스럽게 미닫이를 탁 닫쳐버리었다. “서방님 어쩌면 그렇게 무정하게 서신 한 장 없으셨소. 죽을 듯이 기다리고 있는 내 속을 모르고…. 반가와요. 서방님을 이렇게 뜻밖에 만날 줄을 뒤 알았겠에요.” “이것만 가졌으면 우리 둘이 평생은 못 살망정 몇 해 살기에야 부족하리까, 자아 이걸 가지고 어디든지 남모르는 곳으로 가서 둘이서 살아가십시다. 나는 남의 집 길쌈을 하더라도 서방님 한 분 굶기지 않을 터이니.” “아직도 조선에 인재가 남아있어.” 하시며, 시문 끝에 쓰인 응시자의 이름을 보시고 깜짝 놀라신다. “성세창, 성세창.” 과연 옥소선은 절부이었다. 그는 사랑을 끝까지 살리었다. 깊은 산중으로 애인을 데리고 들어간 옥소선은 주야로 남편을 동독하였다. 어느 때에 글 읽기를 하더라도 태만하면 나아가 우물물로 목욕을 하고 하늘에 애소하였다. 이 정성의 정열에 감격한 세창이 일심으로 글 읽기에 정력을 다하였을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초췌연화편> 윤백남의 단편소설 모음집으로 전5권 중 1권이다. 초췌연화편, 경벌포의, 괴승신수, 보은단 유래 4편을 실었다. 초췌연화편 보내신 연 꽃 송이 / 붉은빛 작작하더니 / 가지 떠남 몇 날이뇨 / 이 몸같이 여위었어라 “녜! 그래 바로 술집으로 들어가옵는데 그 속에서 또한 젊은 소년이 나와 서로 손을 잡고 더불어 음주하옵는데 보는 사람마다 욕하며 흉보옵더이다.” “죽여 줍소서.” 그는 불문곡절하고 이렇게 왕의 앞에 나와 엎드렸다. 왕도 놀라고 사람들도 놀랐다. 익재는 소매 속에서 그 때의 시구를 꺼내어 왕께 드리고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왕은 괴로운 듯이 웃으시며 몸소 익재를 부축하여 일으켰다. “모두 짐을 위하여 한 일이니 내가 용서하오.” 그것은 울상이 된 웃음이었다. 경벌포의 “감사로 계신 분이 동문수학하셨다니 설마 푸대접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 아마 일국의 왕이 되고 싶은가보이 그려.” “모르겠나? 양산박 대독이라면 짐작하겠네그려. 허 허 허.” “그런데 들으니 자네 가세가 어려워서 함흥 유감사에게로 돈을 얻으러 가가는 길이라데그려.” “내가 서울 자네 댁으로 전곡을 치송할 테니 염려 말고 며칠 묵어서 바로 서울로 가게.” “고마운 일일세마는 여기까지 왔다가 유감사를 찾지 않고 갈 수야 있나. 그 역시 우리의 옛 벗이 아닌가.” “유생을 아니 유감사를 만나더라도 내가 여기서 이 짓을 하고 있더란 말은 명심하고 누설 말게. 내가 그를 무서워하는 게 아니라 목민관으로 있어 그런 소리를 들으면 직책상 그냥 있을 수 없을 것이고 그냥 있지 않으려니 자연 나와 그 사이에 싸움이 일어날 것이니 피차 동문수학한 친구로서 병화 간에 만나기 싫어서 그러네.” 유감사를 만난 결과는 역시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서 손생원은 감사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서 동문수학하던 양군이 산적괴수가 되어 거기서 자기가 대접까지 받고 왔은즉 그를 토벌해서 공을 세워보라고 권하였다. “자네가 어려우면 나에게 군사 백 명만 빌려주면 당장에 체포해 보임세.” “자네 죄를 자네가 모르는가, 내가 작별시에 그렇게 신신당부하였거늘 경망히 입을 놀려 친구를 잡으러 오기까지 하니 그럴 법이 있나.” “저 위인을 대로상으로 내다가 버려라.” 괴승신수 “가문도 괜찮고 집안도 넉넉하였거늘 어찌 하필 중이 되었는가.”신현의 묻는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신수가 발성대소하며, “글 싫고 재물 싫고 영화 싫은 몸이 무엇 되겠소.” 한다. 신현도 옛날 보던 괴동의 기억이 삼삼하여 빙그레 웃으며, “그러면 대처식육帶妻食肉을 말아야지.” 하니, “색을 취하고 미식을 싫도록 하고보니 이제 내 마음은 아무 의심이 없고 아무 소원도 없소이다. 그러니 이 어찌 여래의 마음이 아니면 나한의 마음이 아니겠소.” 하였다. 보은단 유래 “상사 부사는 이미 결정되었거니와 이와 같이 몇 차례를 거듭 실패한 그 원인은 역관의 실책이라 만일에 이번에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오면 단연코 역관을 참하리라.” “여러분이 그렇게까지 하신다면 말씀하지요. 지금 금부禁府에 갇히어 있는 홍순언이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연전에 역관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나랏돈 이천 냥을 흠포한 죄로 갇히어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 이 돈 이천 냥을 못해 놓으면 불문가지 그 사람의 목숨은 없는 것인데 이래도 없는 목숨이요, 저래도 죽을 목숨인 바에야 여러분이 그 돈 이천 냥을 물어주고 그 사람을 빼낸 다음에 이번 사행 떠나는 길에 역관으로 보내었으면 여러분은 돈 이천 냥으로 그 사람의 목숨을 사서 보내는 것이니 이 아니 좋은 묘책이오.” “이 세상에 하루저녁에 천 냥을 던질 그런 사람이 있을까? 과연 굉장한 현판이다.” “그렇게 간곡히 물으시니 말씀하지요. 청루에 있는 창녀의 몸으로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것은 크게 의심을 받을 말이나, 첫째는 천 냥이라는, 사람이 내기 어려운 방을 붙이어 제 몸을 헛되이 더럽히지 않자는 것이오, 그 다음에 만일에 천 냥을 아끼지 않고 던지는 분이 계시면 그 분을 좇아 일생을 마치자는 작정으로 그리한 것이랍니다.” “몰랐소이다. 그 같은 하늘이 감동할 효성이 있는 사람인줄 모르고 한낱 지저분한 생각을 했다는 것이 큰 잘못이오. 자 돈 이천 냥 여기 있으니 아버지를 바삐 구하시오.” “나 같은 사람의 성명이 필요 있소? 다만 홍역관으로 알아두시오.” “제가 그 때 하늘같은 은혜를 받은 다음 아버지도 무사하시게 되었고 더군다나 오늘에는 이렇게 석시랑의 아내가 되어 몸이 영화로우매, 아버지께 대한 은혜를 조금이라도 보답할까하고 늘 - 조선서 사신이 들어올 때면 석시랑이 반드시 대하는 때문에 늘 부탁을 해도 오시지 않아서 자나 깨나 마음이 편치 못했습니다.”
<윤백남 장마가 실어온 발복> 아들을 못 낳은 정조 대왕을 위한 충신의 선택!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이고 손자가 정조 대왕이 되었습니다. 고모 화평옹주(和平翁主)가 매사에 동생인 사도세자를 옹호하여 아버지 영조의 노염을 풀기위해 노력을 하였고, 아버지 사도세자도 누님을 하늘 아래에는 더 없는 사람으로 사모하고 의지하여 내 지하에 간들 어이 누님의 은의를 잊겠는가 하는 말을 항시 해왔습니다. 정조 대왕은 고모의 남편인 박명원을 특별히 신임하였습니다. 그는 인격이 고아한 사람이라 왕이 자신을 신임한다는 그 권세를 남용해서 남에게 해를 끼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정조는 일찍이 문효세자(文孝世子)를 한 분 두셨지만 불행히 일찍이 돌아가고 그 후로는 다시 왕자 탄생의 기쁨을 가져 보지 못하셨습니다. 만일 이렇게 지나시다가는 나라의 종사(宗嗣)가 끊일 것을 근심하는 여러 충신들은 널리 빈(嬪) 한 분을 간택해 들이어서 왕자를 탄생하시도록 상감께 권주하였습니다. 박명원 역시 정조 대왕께 빈을 들이라고 청하는데... 정조는 왕의 친척이라 해서 농권코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빈을 간택하기를 싫어했는데... 과연 정조는 박명원의 청을 받아들일까요? 박명원은 어떻게 빈을 선택하여 정조에게 후사를 잇게 할까요?
<대호전(1)> 상권 본문에 ‘大豪傳(前篇)-[원명팔호기설(原名八豪奇說)]’, 하권 본문에 ‘大豪傳(後篇)-[一名八豪奇說]’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상ㆍ하권으로 나뉘어 각각 대성당서점(1940년)과 세창서관(1941년)에서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으며, 상권은 19장 538면, 하권은 18장 491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성당서점 본에는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장편소설(長篇小說) 대호전출간(大豪傳出刊)에 제(際)하야’라는 서문격의 글이 실려있다는데 세창서관 본에는 없다. 대성당서점 본에서 작가는 「대호전(大豪傳)이 일찍 재만백만동족(在滿百萬同族)의 유일(唯一)의 보도기관(報道機關)인 만선일보지상(滿鮮日報紙上)에 게재(揭載)되어 년여(年餘)에 긍(亘)한 애독(愛讀)을 나득(鸁得)한 시험제(試驗濟)의 작품(作品)」이라고 하며, 「무명유명(無名有名)의 영사(英士)들이 전국발상(全國發祥)의 역사이면(歷史裏面)에 있어서 어떠한 기적적행동(奇蹟的行動)을 거듭하였는가. 그것을 그리어 본 것이 이 大豪傳이다.」라며 작품설명을 하고 있다. 《만선일보》에 연재되었던 정보는 확인할 수 없으며, 하권 본문 끝에 「만주사변10주년기념출판(滿洲事變十週年紀念出版)으로 대호전하권(大豪傳下卷)을 흥아(興亞)의 젊은이들에게 받치나이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중국 만주를 배경으로 한 누루하찌와 기자룡, 매랑 등 세 남녀 주인공의 용맹스러운 모습과 조선을 배경으로 한 임경업의 행적이 그려지는데, 인물에 대한 설명보다는 다양한 사건을 끊이지 않고 전개함으로써 흥미를 유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경벌포의> 손생원(孫生員)은 난생 처음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었다. 서울을 떠난지 이미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강원도(江原道)땅을 벗어 나지 못하였다. 뜨거운 염천이라 한 낮에 걷는 거리란 불과 몇 십리에 지나지 못하는데다가 나날이 기진역진 하여 가는 것이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길이 험하고 자갈 많은 강원도 산 길은 그에게 여간 고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노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장돌림말을 만나면 사정을 간곡히 이야기하고 술값으로 얼마를 주기로 하고 얻어 탄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엽전 한푼 남아 있지 않게 된 후로는 그것도 할 수 없어서 오로지 과객질을 하여 가며 길을 걸었다.
<안류정> 손생원(孫生員)은 난생 처음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었다. 서울을 떠난지 이미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강원도(江原道)땅을 벗어 나지 못하였다. 뜨거운 염천이라 한 낮에 걷는 거리란 불과 몇 십리에 지나지 못하는데다가 나날이 기진역진 하여 가는 것이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길이 험하고 자갈 많은 강원도 산 길은 그에게 여간 고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노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장돌림말을 만나면 사정을 간곡히 이야기하고 술값으로 얼마를 주기로 하고 얻어 탄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엽전 한푼 남아 있지 않게 된 후로는 그것도 할 수 없어서 오로지 과객질을 하여 가며 길을 걸었다. 그것도 상당히 사는 사람의 집을 찾아 들어 가게 되거나 사랑 한 칸이라도 지니고 사는 사람의 집을 만나게 되면 대접도 상당히 받을 뿐 아니라 짚신 값이라도 얻어 가지고 나오게 되지마는 길을 잘못 들어서 그러한 집을 찾지 못하고 날이 저무는 때는 그야말로 노찬풍숙을 하는 고생 몇 차례나 하였다. 그럴 때마다, 『예끼 내가 이게 무슨 고생인고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급기 함흥에 갔다가도 여의치 못하면 그런 놈의 고생이 더 어디 있을꼬.』 하고 곧 돌아서서 서울로 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눈 앞에 떠 오르는 것은 굶주리어 부황이 나다시피 한 늙은 아내의 얼굴이며 밥을 달라고 울며 불며 하는 자식들의 참상이었다. 손생원은 가기 싫은 길을 강잉하여 희양(淮陽)땅으로 들어 섰다.
<괴승신수(怪僧信修)> 윤백남의 야담소설집 파주(坡州) 낙수(落水) 남편에 있는 승(僧) 신수(信修)의 암자에는 오늘밤에 무슨 일이 있는 모양으로 불빛이 절 밖에까지 비치어 흐르며 흥에 겨운 듯한 사람들의 말소리까지 드믄드믄 들려온다. 때는 여말(麗末) 홍건적의 난리입네, 김용(金鏞)의 반란입네 하고 온 나라가 물끓듯하건만 이 파주 한 고을만은 세상사를 등진듯이 지극히 평화하게 지내가는 터이다. 『또 이 화상 한잔 하시나보군.』 하고 마침 그 암자 앞을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발을 멈추고 절 속을 기웃거렸다. 『흥 저자의 한잔이란 남의 백잔꼴은 되거든.』 같이 가던 한 사람이 이렇게 말을 받으며 역시 발을 멈춘다. 신수는 이미 육십 가까운 노승으로 몸이 비록 승상(僧相)이나 원체 술을 잘 먹어 얼마든지 있는대로 한자리에서 마셔 버리고 마는고로 이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모양을 바닷속의 고래가 물먹듯한다고 모두 웃었다. 더욱이 그 음주하는 태도가 유쾌하니 사람들이 실없이 놀리느라고 혹 소(牛) 오줌 같은 것을 가져다주며 먹으라고 졸라도 허허 웃고 단숨에 들이키면서, 『이 술이 심히 쓰다.』 하고 배를 두드렸다.다.
<야담소설二冊> 야담(설화)의 발생은 상고시대까지 소급할 수 있으나 오랫동안 구두로 전승되어온 까닭으로 그 발생연대를 짐작할 수 없다. 문헌상으로 볼 때 최고의 문헌 중 하나로 알려진 《구삼국사(舊三國史)》가 현재 망실되어 그 자세한 내용을 알 수는 없으나,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후대문헌들의 내용으로 미루어 정사(正史) 외에도 민간에 떠돌아다니던 이야기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어 8세기초에 신라의 김대문(金大問)이 화랑이나 승려, 또는 민간에 구전되는 일사기문(逸事奇聞)들을 모은 것으로 생각되는 《화랑세기(花郎世紀)》《고승전(高僧傳)《계림잡전(鷄林雜傳)》 등이 저술되었다고 하나 현전하지 않고 있다 야담이 주로 사대부층이나 중인층에 의해 이루어졌으면서도 정통한문문학과는 달리 당대 사회의 갖가지 모순과 갈등 및 여러 계층에 걸친 인물들의 생활상을 생생하게 담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러한 성격에서 유래한다 하겠다. 거기에 작자(편자)층이 당시의 변환기적 사회상을 체험하면서 중세적 질서에 대해 비판 혹은 회의의 시각을 지녔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 시절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상방기현> 서울온지 다섯달, 상동(尙童)은 인제 겨우 서울 길 골목 골목을 대충 대충 짐작하게 되었다. 따라서 몸에 조금만 틈이 생기면 행길에 나가서 제기도 차고 택견도 하고 동네 양반의 댁 수청방에 들어가서 장기도 두고 제법 둘만큼 되었다. 충청도에서 처음 괴나리 봇짐을 등에 지고 거치장스런 머리꽁뎅이를 수건삼아 머리에 틀어얹고 숭례문을 들어선 때는 나이도 열네살에 어린 총각이 었지마는 처음보는 서울에 얼이 빠지고 겁이 나서, 회동(會同) 정한림(鄭翰林)의 상노로 들어 간 후로는 상전의 심부름이 아니고는 큰 길에 나서지도 못하는 어리배기었다.
<집념> 색향 평양의 봄은 유자의 심사를 어질게 하매 넉넉하거니와 봄이 지나 여름이 되었다고 이 평양은 버릴 수는 더욱 없다. 보라, 기자능의 욱은 유록과 능라도의 가랑버들, 월하의 화방이며, 만일 한발 더 나아가서 모란봉 저편 강변에 꽃 같은 젊은 여자의 빨래하는 무리 들이 흥에 겨워 부르는 요요한 노래를 들으며는 그것은 납량객들의 몽매 간에도 잊지 못할 명승의 하나일 것이 분명하다. 무심히 흘러 가는 대동강 물에 발을 잠그고 버들 그늘에 누워 얼굴에 실바람을 들일진댄 무력에 젖은 창자도 바야흐로 씻기어 내릴 향락의 하나일 것 이니 대 자연의 거룩한 조화를 맛보는 자는 봄보다도 오히려 평양의 여름을 탐낼 것이다.
<왕자호동 vs 순정의 호동왕자 (같은 인물, 다른 작품! 동시에 읽는 소설 : 호동왕자 열전)> 왕자호동 vs 순정의 호동왕자 : 같은 인물, 다른 작품! 동시에 읽는 소설 - 호동왕자 열전! * 같은 인물, 다른 작품(다른 느낌)을 한 권으로 함께 있는 E-BOOK 시리즈 입니다. * <윤백남> 작가의 "순정의 호동왕자" * <김동인> 작가의 "왕자호동" # 부록: - 정열의 낙랑공주 (윤백남 작품) 호동(好童) 고구려의 제3대 국왕 대무신왕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갈사왕의 손녀이자 대무신왕의 차비(次妃)이다. 낙랑 정벌에 공을 세웠으나 원비(元妃) 소생의 이복형제 해우(훗날 모본왕)와의 태자 다툼에서 패하여 자살하였다. 아내 낙랑공주와의 이야기가 창작물의 주요 소재가 되고 있다. 기원후 32년(대무신왕 15년) 음력 4월, 호동이 옥저로 출타했을 때 낙랑왕 최리(崔理)를 만나 그의 딸 낙랑공주와 결혼하였다. 이후 호동 혼자 고구려로 돌아와 낙랑공주에게 사람을 보내 낙랑 무기고 안의 북과 나팔을 부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면 예를 갖춰 맞이하겠다고 하였다. 그 북과 나팔은 적이 침입하면 저절로 소리를 내는 물건이었다. 낙랑공주는 북을 찢고 나팔을 쪼갰으며 이에 호동은 왕에게 권하여 낙랑을 습격하였다. 최리는 미처 대비하지 못하다가 고구려군이 성 밑에 와서야 그 침입과 딸의 배반을 알았다. 결국 자신의 딸을 죽이고 고구려에 항복하였다.
<사각전기 - 윤백남 단편소설> 우리 문학의 깊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작품. 오랜 시간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 독서하면서 생각하는 힘도 팍팍 길러주는 한국문학. 청소년 및 성인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한국문학 대표소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한국문학 필독서. -- 책 속으로 -- 봉표사 일행은 요동을 떠난지 십여일만에 북경에 이르게 되었다. 북경에서의 환영은 오히려 다른 변방에서 보다 융숭하였다. 명국 정부에서는 자기의 속지와 다름 없는 조선의 사신이건마는 대접은 일 국사신에게 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래서 봉표사는 외빈을 유숙케하는 영빈관에 묵게하고 하배들은 객주에서 묵게 하였다.
<후백제비화 - 윤백남 단편소설> 우리 문학의 깊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작품. 오랜 시간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 독서하면서 생각하는 힘도 팍팍 길러주는 한국문학. 청소년 및 성인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한국문학 대표소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한국문학 필독서. -- 책 속으로 -- 이 소년은 어린 시절에 기괴한 놀라운 일이 있었다. 이 소년의 아버지가 밭에서 농사를 짖고 있고 어머니가 젖먹이인 견훤을 붙안고 있다가 무슨 일이 생겨서 어머니는 어린애를 수풀에 내려놓고 일을 보려 갔다. 일을 끝내고 돌아와 보니 커다란 호랑이가 와서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일을 보고 이 사연을 제 지아비에게 말하매 지아비는 다 들은 뒤에 그다지 놀라는 기색도 없이 『누설하지 마오.』
<장마가 실어온 발복 - 윤백남 단편소설> 우리 문학의 깊이와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주요 작품. 오랜 시간 문학성을 인정받은 작품. 독서하면서 생각하는 힘도 팍팍 길러주는 한국문학. 청소년 및 성인 모두에게 권하고 싶은 한국문학 대표소설. 한국인이라면 꼭 읽어야 할 한국문학 필독서. -- 책 속으로 -- 『너 동궁에 가서 세손께서 읽으시는 사략 중의 수양제 사적이 쓰인책을 달래서 가져 오너라.』 하는 영을 내렸다. 세손은 그 영을 듣는 순간 정신이 아뜩하고 가슴은 두방맹이질을 하였다. 기군망상의 죄를 면할 도리가 없다. 세손은 정신이 들락 날락 한채 강잉하여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윽고 정감이 춘방으로서 사략을 들고 와서 위에 올렸다. 이 순간 세손은 금방 벽력이 머리 위에 떨어질 생각에 정신이 아뜩하여 머리를 숙이고 업디었다.
<야담 소설 : 윤백남 편 (할머니가 전해주는 코리안나이트 : 야사)> 야담 소설 : 윤백남 편 (할머니가 전해주는 코리안나이트) 야담(野談)은 야사(野史)를 바탕으로 흥미 있게 꾸민 이야기로 문학 장르로는 수필에 포함된다. 18세기 조선 후기에서 일제 강점기 20세기 전반 한국 사회에 유행했던 대중문화다. 일제강점기 20세기 초 야담운동으로 강당, 무대에서 구연하게되고, 라디오가 전래되면서 대중 오락으로 인기를 끌다가 1930년대 중반 이후 현대 소설의 발달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야담은 전대의 야담과 저작, 향유방식 및 사회적 배경에 의한 큰 차이가 있으며, 당시에 야담이라 불렸던 행위, 전통을 시대적 필요에 맞추어 재해석, 재창조한 것이라 볼 수 있다. 1910년대 들어 신식 활자와 근대 인쇄술이 도입되면서 많은 문학작품이 활자본으로 간행되었다. 활자본 야담집은 1912년 ~ 1926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출간되었다. 1913년 개유문관에서 다양한 조선의 인물과 그들의 일화를 그린 최동주의 오백년기담(五百年奇譚)이 출판되었는데, 시대적 순서에 따라 총 180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었고, 일본어로 번역되기도 했다. 20세기의 야담은 1928년 김진구가 ‘야담운동’이라 이름을 붙였고, 1930년대 윤백남에 의해 상업주의적 통속화되었으며, 사람에 따라 이 시기의 야담에 대해 ‘민중의 오락’, ‘잘팔리는 문화상품’, ‘저열하고 통속적인 대중문화’ 등으로 다양한 정의를 한다.
<한국문학전집196: 안류정> 서강 와우산(臥牛山) 기슭에 있는 정자 안류정(安流亭)에 기류하고 있는 이종성(李宗城)은 오늘도 조반을 마친 후에 점심을 싸 가지고 강변으로 나갔다. 동저고리 바람에 삿갓을 쓰고 낚싯대를 메고 가는 그의 모양은 누가 보든지 한 개 늙은 어옹에 틀림이 없었다. 와우산을 서남쪽으로 흘러 내려 강물로 흘러 들어가는 곳에 조그마한 절벽과 몇개의 바위가 홀연히 솟아 있었다. 이종성은 그 한개의 바위 위에 가지고 온 점심 그릇을 곁에 놓고 낚싯줄을 늘였다. 위수에 곧은 낚시를 느리고 때를 기다린 태공 여상(呂尙)도 있거니와 이종성도 고기잡히기를 고대하는 눈치는 없었다.
<한국문학전집195: 경벌포의> 손생원(孫生員)은 난생 처음 어려운 길을 걷는 것이었다. 서울을 떠난지 이미 열흘이 지났건만 아직도 강원도(江原道)땅을 벗어 나지 못하였다. 뜨거운 염천이라 한 낮에 걷는 거리란 불과 몇 십리에 지나지 못하는데다가 나날이 기진역진 하여 가는 것이 현저히 나타나는 것이었다. 더구나 길이 험하고 자갈 많은 강원도 산 길은 그에게 여간 고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노수가 아직도 남아 있는 동안에는 장돌림말을 만나면 사정을 간곡히 이야기하고 술값으로 얼마를 주기로 하고 얻어 탄 일도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엽전 한푼 남아 있지 않게 된 후로는 그것도 할 수 없어서 오로지 과객질을 하여 가며 길을 걸었다.
<한국문학전집193: 후백제비화> 때는 경문왕 말년. 곳은 상주 가은현(尙州 加恩縣)의 어느 한적한 촌락이다. 그 촌락을 뒤로 장식하고 있는 작다란 언덕에 드문 드문 소나무가 서 있고 그 소나무 틈틈이로는 이끼 낀 바위가 비죽이 보이고 있다. 그 어떤 바위에 한 농군(農軍)이 앉아 있다. 그리고 그 농군의 곁에는 그의 아들인 듯한 열아믄살쯤 난 소년이 앉아 있다. 『그래서요.』 지금껏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중도에 끊었던지 소년은 자기의 아버지를 향하여 이야기의 뒤를 채근한다. 이 채근을 받은 아버지는 잠시 머리를 숙이고 앉아 있다가 다시 말을 꺼내인다. 『그래서 말이로다.』
<한국문학전집191: 투환금은> 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에 간신의 이름을 받고 죽은 한치형(韓致亨)의 문인으로 있던 조성산(趙誠山)은 처자의 권에 못 이겨 길을 떠났다. 오백여리 먼 길을 노자 겨우 열아문 냥을 지니고 길을 떠난 조성산은 과객질을 하며 가기로 방침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의 가슴을 무지근하게 한 것은 처자가 굶주리는 참경을 차마 볼 수 없어 행여나 하고 길을 떠나기는 하였지마는 관서 백한감사(關西伯韓監司)의 심지를 잘 아는지라 과연 얼마의 전곡을 얻어 올 수 있을가, 그것에 대한 자신이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한국문학전집190: 사각전기> 봉표사(奉表使)의 일행은 오늘도 조선 나라 이(里)수로 해서는 오십리 길 밖에는 더 가지 못하였다. 날이 워낙 폭양인데다가 바람이 모래를 날리어 일행은 눈을 뜨지 못하였다. 그 뿐이 아니라 하늘과 땅이 맞닿은 듯한 평원 광야에 유록이란 간혹 있을 뿐 눈에 보인다는 것은 오직 누르고 붉은 흙빛과 모래 뿐이었고 가도 가도 끝이 없는 단조한 길에 일행은 멀미가 났다. 호지에 무화초(胡地無花草)하니 춘래 불사춘(春來不似春)이란 글귀는 독히 왕소군의 슬픔 뿐이 아니었다. 봉표사의 말고삐를 잡는 김의동(金義童)이도 구슬같은 땀을 흘리며 은근히 후회를 마지 않았다. 『그냥 신대감(愼大監) 댁에 고생이 돼두 있을 것을, 제에기 이놈의 고생이 무슨 놈의 고생이야. 대국 들어가면 참 별유천지 비인간이라더니, 별유천지가 아닌 건 아니라두 사람 죽일 별유천지로구나.』
<한국문학전집189: 초췌연화편> 고려 충선왕(忠宣王)은 이날 밤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번민에 싸이셨다. 넓은 침전 화려한 침구 잠자리가 편찮음도 아니다. 짧은 여름의 밤이니 물론 지루하실 리도 없었다. 바로 곁에는 오늘 한 밤 특히 왕을 모시게 된 명예의 미희가 아름다운 쌍겹눈을 반쯤 내려 감고 왕의 입에서 어떤 분부가 내리기만 고대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벌써 몇달을 두고 두고 이렇듯 깊은 시름에 잠겨 있는 왕에게는 즐거운 침실도 아름다운 시비도 모두 귀찮은 존재일 뿐이다. 그러면 왕은 지금 무엇을 생각하시는 것일가? 원 나라에 남겨 두고 오신 정인! 왕이 석달 전 귀국하시기까지 원 나라에 계시는 오랜 동안에 그렇듯 서로 아끼고 사모하던 그 여인을 못 잊어 하심이었다.
<한국문학전집188: 이식과 도승> 놀라운 실정과 횡포로 민심(民心)을 잃고 있던 광해조(光海朝)에 있어서는 어른 아이 할것없이 기가 죽고 풀이 삭아 이르는 곳마다 침체한 기운이 음산하게 떠도는데 저평(砥平)읍 백아곡(白鵶谷)에 있는 이식(李植)의 집 넓은 바깥 마당에는 여덟살로부터 열아믄 살 쯤 되어 보이는 울망졸망한 아이들의 한떼가 싸움장난에 열중하고 있다. 돌을 모아다 성을 쌓고 홍백군으로 갈리인 두패가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나무 막대기로 된 칼들을 휘두르며 와 ─ 몰려 갔다가 또다시 우 ─ 몰려오고 어린 목이 찢어져라고 고함들을 지르며 놀이하는 모양은 비록 어린 아이들의 장난이지만 입에 침을 삼키게 해주었다.
<한국문학전집187: 순정의 호동왕자> 고구려 대무신왕 十五[십오]년. 가을 해가 서편 벌판으로 뉘엿 뉘엿 넘어가려 한다. 바야흐로 하늘을 찌를 듯한 고구려의 세력이 한토(漢土)의 낙랑(樂浪)까지도 집어 삼켜서 어제까지도 낙랑의 서울이던 땅이 오늘의 고구려의 一[일] 읍으로 되었다. 그로써 읍의 교외 멀리 패수를 굽어 보는 아담한 재릉에 한 개 새로운 무덤이 서 있었다. 고귀한 사람의 무덤인 듯, 그 앞에 아로새긴 돌이며 무덤의 높이가 보통 평민의 무덤은 아니였다. 그리고 이 근처의 무덤이 모두 한풍(漢風)을 띄운데 반하여 이 무덤만은 고구려풍이다.
<한국문학전집183: 홍윤성과 절부> 문(文)에는 신숙주(申叔舟). 무(武)에는 홍윤성(洪允成). 이렇듯 그 영명을 당시에 번뜩이던 세조조(世祖朝)의 명신 수옹(守翁) 홍 윤성이 과거에 응시코자 도보(徒步)로 그 고향 회인(懷仁 )을 떠난 것은 경 태삼년(景泰三年) 임신(壬申) 호서(湖西)일대에도 봄소식 무르익는 삼월 하 순이었다. 이십년 가까운 세월을 가난한 그 숙부집에 붙쳐 있으며 밭갈기 논매기 심 지어는 그 숫한 식구가 때야 할 나무까지 해 대느라고 밤낮을 주접속에 묻 혀 지나던 그였으나 그동안에도 잠시 마음을 떠나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번 벼슬자리를 얻어 사람 구실을 해보자.』 하는 간절한 뜻이었다.
<한국문학전집182: 보은단 유래> 선조(宣祖) 十八[십팔]년 임오(壬午) 가을 어느날 아침이었다. 왕께서는 일찍부터 근정전에 납시어 모든 신하들의 예궐을 기다리고 계시 었다. 왕께서 이렇게 일찍부터 ─ 신하가 예궐하기 전에 근정전에 납셔 조회를 기다리시는 전례가 없었다. 왕은 우수의 빛을 용안에 가득히 실으시고 용상 앞을 거니신다. 벌써 반 시간 동안이나 이처럼 묵묵히 거니시며 이따금 넓은 뜰을 내어다 보신다. 오늘에 한해서 특히 늦은 것은 아니지마는 왕은 신하들의 태만이 괘씸하시 다는 듯이 불쾌한 눈으로 멀리 대문 쪽을 바라보신다.
<윤백남 - 몽금> - 읽기 쉽고 재미있는 한국 근대문학 컬렉션 - 한국 근대문학의 정수를 모아 읽기 쉽게 번역, 편집했습니다. - 옛말은 쉬운 현대말로 풀어썼으며, 아리송한 단어엔 이해를 돕고자 한자를 병기했습니다. 꼭 읽어야 되는 한국문학전집 중 칠백일흔네번째 이야기 '윤백남'의 [몽금] 학교공부와 수능준비를 위한 중고등학생, 대학생, 일반인 할것없이 남녀노소 모두의 필독도서입니다. 좋은 문학을 읽는 것은 직,간접적으로 훌륭한 경험을 해 주게 합니다. 어디에서도 가르쳐주지 않은 삶의 철학과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책은 전부가 아니라 시작입니다! 한국문학집은 계속 발간됩니다.
<낙조의 노래> 『낙조(落照)의 노래』는 1953년 발간한 저자의 대표작으로 그해 조선일보에 연재한 대표 통속역사 장편 소설 작품이다. 이외에 1930년 처음 동아일보에 발표했던 무협 소설 ‘대도전(1930)’ ‘해조곡’ ‘회천기’ ‘천추의 한’ 등 여러 역사소설을 집필하였다. 이 작품은 이전 일련의 것으로 이어지는 역사적 사건 이른바 인조반정, 정묘호란, 이괄의 난 등 내세워 요란한 정치사의 획책 사건으로 전개되는 인조 때 전모를 묘사하였다. 저자는 당대 문화 예술계, 연극계 분야를 두루 섭렵한 대표 인물로 우리나라 최초 극영화를 상연하고 연출 공헌하였다.
<투환금은> 연산갑자사화(燕山甲子士禍)에 간신의 이름을 받고 죽은 한치형(韓致亨)의 문인으로 있던 조성산(趙誠山)은 처자의 권에 못 이겨 길을 떠났다. 오백여리 먼 길을 노자 겨우 열아문 냥을 지니고 길을 떠난 조성산은 과객질을 하며 가기로 방침을 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보다도 더 그의 가슴을 무지근하게 한 것은 처자가 굶주리는 참경을 차마 볼 수 없어 행여나 하고 길을 떠나기는 하였지마는 관서 백한감사(關西伯韓監司)의 심지를 잘 아는지라 과연 얼마의 전곡을 얻어 올 수 있을가, 그것에 대한 자신이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세상에 그런 인사가 어디 있겠소 아무리 인색하고 무정하다 할지라도 배은망덕도 분수가 있지, 설마하니 오백여리를 걸어간 노인을 그냥 돌려 보낼 리야 있소, 벼락을 맞을 일이지.』 하고 이웃 사람들도 처자와 함께 권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지나간 일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렇게 생각할 것이었다. 한치형은 단독자 하나 뿐으로 슬하에 자식이 귀하더니 급기 사화를 당하여 죽을 때에는 그 외아들조차 아직 강보에 싸여 있는 고단한 신세이었다. 게다가 더욱 비참한 것은 간신으로 몰리어 죽는 신세이라 재산은 몰수를 당하고 삼족이 다 함께 죽을 운명에 있었으니 방가위 멸문의 재앙을 당하는 터이라, 그 집의 은덕을 직접 간접으로 입은 문인들도 사방으로 헤어지고 일가 친척도 화에 걸릴가 두려워하여 누구 하나 돌보려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한 정경을 본 조성산은 세상 인심이 야박한 것을 한탄하고 격분하였다. 그래서 밤중에 남 몰래 강보에 싸인 한씨의 고아를 업어다가 자기집에 감추고 유모까지 얻어서 길렀다. 다소라도 은의를 입은 한씨에게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혈통을 이어 주려는 것이었다. 만일에 한씨의 고아를 숨겨 기르는 사실이 탈로되면 조성산은 한씨와 동죄로 몰릴 것은 정한 이치이었다. ...책 속에서... <작가 소개> 투환금은(偸煥金銀) 판권
<윤백남> 윤백남은 연극운동으로 식민지 조선에 ‘문화’를 건설하고자 한 다기多技한 재능을 가진 예술인으로 최초의 ‘조선영화’를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대중소설과 야담공연, 라디오 방송 등 그의 문화 활동의 궤적은 초창기 조선 대중문화의 축도縮圖와도 같다. 문예 전반에 걸친 다양한 활동 탓에 한국 현대문학 연구에서 윤백남은 1910년대 연극운동가, 1920년대 극작가 및 감독, 1930년대 역사소설, 대중소설 작가로 분절되어 다루어졌고 그의 다채로운 이력과 작품은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않았다. 백남의 발견은 그 편편히 흩어져 있는 식민지 조선의 문예운동 전반을 다시 구성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발견 뒤에 이 땅 대중문화의 뿌리를 찾는 작업이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야담은 시대를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책으로 1930년대의 야담을 통해 시대의 또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