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의 우화 컬렉션 : 동물 편 (총9권)> # 픽사, 디즈니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우리 옛 우화 소설 속에서 만난다 # 서울대학교 등 전국 주요 대학 필독서와 접하기 어려운 희귀 작품이 한가득! # 그동안 어려웠던 우리 옛 우화 소설을 더 쉽게 풀어내 읽는다 우화 소설은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고 당대의 사회제도, 이념, 풍습 등을 풍자해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가전체 소설, 의인 소설 등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것이라 보면 된다. 동물을 의인화한 민담이나 설화 등은 오래 전부터 전해 왔다. 기록 문학으로서는 신라의 설총이 지은 「화왕계」부터 1천여 년 동안 다양한 작품이 태어났다. 양반 사회의 가치관, 윤리, 권위 등이 무너지는 조선 후기에는 한글 작품까지 나오며 우화 소설이 가장 활발히 창작되었다. 그러다 일본에게 국권을 강제로 뺏기는 1910년 전후로 점점 쇠퇴한다. 힘든 현실 속에서 세태를 풍자하는 소설이 살아남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소설을 자유롭게 짓기에는 우화라는 틀이 너무 좁았다. 그러나 이후 100년을 넘겨 어느 때보다 창작이 중요해진 오늘날, 우리 옛 우화 소설은 그 발상과 소재 면에서 되짚어 봐야 할 소중한 자산이 되어 있다. 임제의 「수정지」 등 사람의 감정을 소재로 한다는 발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아웃」보다 400년 이상 앞섰다. 또 송세림의 「주장군전」처럼 사람의 성기를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삼은 점은 성도덕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다.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 연암집(燕巖集) 8권 : <박지원> 열하일기 작가 원문 읽기!>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 연암집(燕巖集) 8권 : <박지원> '열하일기' 작가 원문 읽기! <방경각외전(放璚閣外傳)> 연암집(燕巖集) 8권 -자서(自序)* 1편. 마장전(馬駔傳) 2편.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3편. 민옹전(閔翁傳) 4편. 광문자전(廣文者傳)* 5편. 서광문전후(書廣文傳後) 6편. 양반전(兩班傳)* 7편. 김신선전(金神仙傳) 8편. 우상전(虞裳傳) 9편. 역학대도전(易學大盜傳) : 원본 소실되어 전하지 않음(원문 누락) 10편. 봉산학자전(鳳山學者傳)* *(별표)은 한문과 한글번역본 제공(그외는 한문소설) 방경각외전은 조선의 실학자 박지원의 문집 《연암집》중 한 권인 단편소설집이다. 떠돌이 거지, 몰락한 무반, 농부 따위 이름 없는 하층민을 주요 대상으로 삼았다. 아홉 편 가운데 〈봉산학자전〉과 〈역학대도전〉 두 편은 박지원 스스로 없애 버려 〈양반전〉, 〈광문자전〉, 〈예덕선생전〉, 〈김신선전〉, 〈마장전〉, 〈민옹전〉, 〈우상전〉의 일곱 편만 남아 전하는데, 이 중 〈우상전〉은 〈봉산학자전〉과 〈역학대도전〉을 없애는 과정에서 함께 소실되어 미완의 상태로 남았다. 박지원이 20세 무렵에 쓴 글들로, 후에 나이가 들어서는 부끄러워하며 이 소설들을 모아 태워버리라고 자식들에게 명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널리 퍼져 있어서 자식들이 다 수거할 수 없었으며, 지금까지 전해지게 되었다. *출처 및 인용 : 박종채. 〈봉산학자전〉. 《연암집 제8권: 방경각외전》
<열하일기(熱河日記) : 상 01~12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열하일기(熱河日記) : 상 01~12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 <열하일기(熱河日記)> # 상권(01~12권) 1. 도강록(渡江錄) 2. 성경잡지(盛京雜識) 3. 일신수필(馹汛隨筆) 4. 관내정사(關內程史) 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7.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경개록(傾蓋錄) 9. 심세편(審勢編) 10. 망양록(忘羊錄) 11. 혹정필담(鵠汀筆談) 또는 곡정필담 12. 찰십륜포(札什倫布)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출처 및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열하일기 :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론자(北學論者)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중국 견문기, 수많은 사본이 전하는데 그 중 신빙성이 있는 것은 충남대학교 소장본으로 박지원장(朴趾源章)이 찍혀 있는 연암 수택본(燕巖手澤本)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박지원은 뛰어난 이론가로서 철두철미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으니 이 책에서도 이 점에 중점을 두어,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에서 정치·경제·문학·예술에 걸쳐서술하지 않는 것이 없으리 만큼 방대하게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과 비판,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천문학과 천주(天主)·서학(西學)·지옥(地獄) 등에 대한 저자의 참신한 이론이 실려 있기도 하다. 제10권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는 <허생전>이나 제4권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호질(虎叱)>에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멋있는 해학을 통하여서 경제에 어두움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당시의 부패한 선비들을 풍자하는 한편 경제의 실용적인 면, 외국무역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으며 또한 유교도덕 속의 위선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부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비실용적(非實用的)인 성리학(性理學)의 공론(空論)에 반기(反旗)를 들고 과학적 실용주의에 입각,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한 민족의 고전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 : 하 13~26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열하일기(熱河日記) : 하 13~26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 <열하일기(熱河日記)> # 하권(13~26권) : 단, 16권 "양매시화" 원문 누락되어 수록함. 13. 반선시말(班禪始末) 14. 황교문답(黃敎問答) 15. 피서록(避暑錄) 16. 양매시화(楊梅詩話) : 최근에 추가 발권되었으며, 누락된 원문 17. 동란섭필(銅蘭涉筆) 18. 옥갑야화(玉匣夜話) 19. 행재잡록(行在雜錄) 20. 금료소초(金蓼小抄) 21. 환희기(幻戲記) 22. 산장잡기(山莊雜記) 23. 구외이문(口外異聞) 24. 황도기략(黃圖紀略) 25. 알성퇴술(謁聖退述) 26. 앙엽기(盎葉記)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 1780년(정조 4) 저자가 청나라 건륭제(乾隆帝)의 칠순연(七旬宴)을 축하하기 위하여 사행하는 삼종형 박명원(朴明源)을 수행하여 청나라 고종의 피서지인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서, 청조치하의 북중국과 남만주일대를 견문하고 그 곳 문인·명사들과의 교유 및 문물제도를 접한 결과를 소상하게 기록한 연행일기이다. 각 권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도강록>은 압록강으로부터 랴오양(遼陽)에 이르는 15일간의 기록으로 성제(城制)와 벽돌 사용 등의 이용후생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잡지>는 십리하(十里河)에서 소흑산(小黑山)에 이르는 5일간에 겪은 일을 필담(筆談) 중심으로 엮고 있다. <일신수필>은 신광녕(新廣寧)으로부터 산하이관(山海關)에 이르는 병참지(兵站地)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다. <관내정사>는 산하이관에서 연경(燕京)에 이르는 기록이다. 특히 백이(伯夷)·숙제(叔齊)에 대한 이야기와 <호질 虎叱>이 실려 있는 것이 특색이다. <막북행정록>은 연경에서 열하에 이르는 5일간의 기록이다. <태학유관록>은 열하의 태학(太學)에서 머무르며 중국학자들과 지전설(地轉說)에 관하여 토론한 내용이 들어 있다. <구외이문>은 고북구(古北口) 밖에서 들은 60여 종의 이야기를 적은 것이다. <환연도중록>은 열하에서 연경으로 다시 돌아오는 6일간의 기록으로 교통제도에 대하여 서술하고 있다. <금료소초>는 의술(醫術)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옥갑야화>는 역관들의 신용문제를 이야기하면서 허생(許生)의 행적을 소개하고 있다. 뒷날에 이 이야기를 <허생전>이라 하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거론하였다. <황도기략>은 황성(皇城)의 문물·제도 약 38종을 기록한 것이다. <알성퇴술>은 순천부학(順天府學)에서 조선관(朝鮮館)에 이르는 동안의 견문을 기록하고 있다. <앙엽기>는 홍인사(弘仁寺)에서 이마두총(利瑪竇塚)에 이르는 주요명소 20군데를 기술한 것이다. <경개록>은 열하의 태학에서 6일간 있으면서 중국학자와 대화한 내용을 기록하였다. <황교문답>은 당시 세계정세를 논하면서 각 종족과 종교에 대하여 소견을 밝혀놓은 기록이다. <행재잡록>은 당시 청나라 고종의 행재소(行在所)에서 견문한 바를 적은 것이다. 그 중 청나라가 조선에 대하여 취한 정책을 부분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반선시말>은 청나라 고종이 반선(班禪)에게 취한 정책을 논한 글이다. <희본명목>은 다른 본에서는 <산장잡기> 끝부분에 있는 것으로 청나라 고종의 만수절(萬壽節)에 행하는 연극놀이의 대본과 종류를 기록한 것이다. <찰십륜포>는 열하에서 본 반선에 대한 기록이다. <망양록>과 <심세편>은 각각 중국학자와의 음악에 대한 토론내용과 조선의 오망(五妄), 중국의 삼난(三難)에 대한 것을 기록한 것이다. <곡정필담>은 주로 천문에 대한 기록이다. <동란섭필>은 가악(歌樂)에 대한 잡록이며, <산장잡기>는 열하산장에서의 견문을 적은 것이다. <환희기>와 <피서록>은 각각 중국 요술과 열하산장에서 주로 시문비평을 가한 것이 주요내용이다. ≪열하일기≫는 박제가(朴齊家)의 ≪북학의 北學議≫와 함께 “한 솜씨에서 나온 것 같다(如出一手).”고 한 평을 들었다. 주로 북학을 주장하는 내용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고, 당시에 정조로부터 이 책의 문체가 순정(醇正)하지 못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으나 많은 지식층에게 회자된 듯하다. <출처 및 인용: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열하일기 :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론자(北學論者)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중국 견문기, 수많은 사본이 전하는데 그 중 신빙성이 있는 것은 충남대학교 소장본으로 박지원장(朴趾源章)이 찍혀 있는 연암 수택본(燕巖手澤本)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박지원은 뛰어난 이론가로서 철두철미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으니 이 책에서도 이 점에 중점을 두어,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에서 정치·경제·문학·예술에 걸쳐서술하지 않는 것이 없으리 만큼 방대하게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과 비판,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천문학과 천주(天主)·서학(西學)·지옥(地獄) 등에 대한 저자의 참신한 이론이 실려 있기도 하다. 제10권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는 <허생전>이나 제4권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호질(虎叱)>에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멋있는 해학을 통하여서 경제에 어두움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당시의 부패한 선비들을 풍자하는 한편 경제의 실용적인 면, 외국무역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으며 또한 유교도덕 속의 위선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부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비실용적(非實用的)인 성리학(性理學)의 공론(空論)에 반기(反旗)를 들고 과학적 실용주의에 입각,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한 민족의 고전이다.
<열하일기 : 황교문답 14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열하일기 : 황교문답 14권 (연암 박지원 - '중국 견문록' 원문 읽기)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조선 정조 때에 박지원(朴趾源)이 청나라를 다녀온 연행일기(燕行日記)! <황교문답(黃敎問答)> : 황교와 서학자(西學者)의 지옥(地獄)에 관한 논평이다. 끝에는 세계의 이민종(異民種)을 열거하는 가운데 특히 몽골과 아라사 종족의 강맹(强猛)함에 주의를 환기시킨다. * <열하일기 : 熱河日記> 조선 정조 때의 북학론자(北學論者)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은 중국 견문기, 수많은 사본이 전하는데 그 중 신빙성이 있는 것은 충남대학교 소장본으로 박지원장(朴趾源章)이 찍혀 있는 연암 수택본(燕巖手澤本)이다. 26권 10책으로 되어 있다. 박지원은 뛰어난 이론가로서 철두철미 실사구시(實事求是),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주장하였으니 이 책에서도 이 점에 중점을 두어, 중국의 역사·지리·풍속에서 정치·경제·문학·예술에 걸쳐서술하지 않는 것이 없으리 만큼 방대하게 서술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책에는 중국의 학자들과 더불어 주고 받은 두 나라의 문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논평과 비판, 월세계(月世界)·지전(地轉) 등의 천문학과 천주(天主)·서학(西學)·지옥(地獄) 등에 대한 저자의 참신한 이론이 실려 있기도 하다. 제10권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려 있는 <허생전>이나 제4권 관내정사(關內程史)에 실려 있는 <호질(虎叱)>에서는 날카로운 풍자와 멋있는 해학을 통하여서 경제에 어두움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고 무위도식하는 당시의 부패한 선비들을 풍자하는 한편 경제의 실용적인 면, 외국무역의 필요성 등을 역설했으며 또한 유교도덕 속의 위선적인 인간들이 얼마나 부패되어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비실용적(非實用的)인 성리학(性理學)의 공론(空論)에 반기(反旗)를 들고 과학적 실용주의에 입각, 민족의 자주의식을 고취한 민족의 고전이다. * <열하일기(熱河日記)> -목록 26권- 1. 도강록(渡江錄) 2. 성경잡지(盛京雜識) 3. 일신수필(馹汛隨筆) 4. 관내정사(關內程史) 5.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6. 태학유관록(太學留館錄) 7. 환연도중록(還燕道中錄) 8. 경개록(傾蓋錄) 9. 심세편(審勢編) 10. 망양록(忘羊錄) 11. 혹정필담(鵠汀筆談) 12. 찰십륜포(札什倫布) 13. 반선시말(班禪始末) 14. 황교문답(黃敎問答) 15. 피서록(避暑錄) 16. 양매시화(楊梅詩話) : 최근에 추가 발권되었으며, 누락된 원문 17. 동란섭필(銅蘭涉筆) 18. 옥갑야화(玉匣夜話) 19. 행재잡록(行在雜錄) 20. 금료소초(金蓼小抄) 21. 환희기(幻戲記) 22. 산장잡기(山莊雜記) 23. 구외이문(口外異聞) 24. 황도기략(黃圖紀略) 25. 알성퇴술(謁聖退述) 26. 앙엽기(盎葉記)
<예덕선생전 외> 선귤자(蟬橘子 : 李德懋 이덕무의 별호)에게 예덕선생이라는 벗이 있었다. 그가 바로 종본탑(宗本塔) 동편에 살면서 분뇨를 쳐 나르는 역부의 우두머리 엄행수(嚴行首)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子牧)은 그의 스승이 사대부와 교유하지 않고 비천한 엄행수를 벗하는 것에 대하여 노골적으로 불만의 뜻을 표시한다. 그러자 선귤자는 이해(利害)로 사귀는 시교(市交)와 아첨으로 사귀는 면교(面交)가 오래 갈 수 없는 것이며, 마음으로 사귀고 덕을 벗하는 도의의 사귐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대체로 엄행수의 사는 모양은 어리석은 듯이 보이고, 하는 일은 비천한 것이지만 그는 남이 알아주기를 구함이 없다. 남에게서 욕먹는 일이 없으며, 볼 만한 글이 있어도 보지 않고 종고(鐘鼓 : 종과 북)의 음악에도 귀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처럼 타고난 분수대로 즐겁게 살아가는 그야말로 더러움 속에 덕행을 파묻고 세상을 떠나 숨은 사람이다. 그의 하는 일은 불결하지만 그 방법은 지극히 향기로우며, 그가 처한 곳은 더러우나 의를 지킴은 꿋꿋하니 엄행수를 보고 부끄러워하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되랴. 이에 감히 그를 예덕선생이라 부른다는 것이다.
<호질> 이 작품은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의 '관내정사(關內程史)' 속에 수록되어 있다. 이 작품의 등장 인물인 북곽 선생은 도학(道學)이 높고 인격이 고매(高邁)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었으며, 동리자는 수절 과부로 절행(節行)이 뛰어나 천자가 칭찬하고 제후가 그 현숙함을 사모하는 인물이었다. 이 작품은 위선적 인물을 대표하는 북곽과 동리자를 내세워 당시의 양반 계급, 즉 다수 선비들의 부패한 도덕 관념을 풍자하여 비판한 작품으로, 도덕과 인격이 높다고 소문난 북곽(양반 계급)은 결국 '여우'같은 인물이요, 온 몸에 똥을 칠한 더러운 인간이며, 끝까지 위선과 허세를 부리는 이중적인 인간임을 고발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 정절로써 천자와 제후들에게까지 우러름을 받는 동리자에겐 성이 다른 아이들이 다섯이나 있었으니, 그녀는 실은 음부(淫婦)였고, 과부의 다섯 아들이 모두 성이 다르다고 비꼰 것은 겉모습, 혹은 세상의 평판만으로 사람을 평가할 수 없음을 통렬히 풍자한 것이다 . 또 북곽 선생은 이런 동리자와 밤에 밀회를 가졌으니, 그 역시 위선적인 인물이었다. 그래서 북곽 선생은 아이들에게 여우로 몰려 곤욕을 당하고, 다시 똥구덩이에 빠졌다가 호랑이에게 질책을 당하고, 마지막으로 새벽에 만난 농부 앞에서 또 위선적인 행동을 한다. 이처럼 이 작품은 도덕이 높다고 소문난 북곽 선생이 결국은 여우 같은 인간이요, 온 몸에 똥을 칠한 더러운 인간이요, 끝까지 위선을 버리지 못한 파렴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고발, 풍자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유학자의 위선과 아첨, 인간의 탐욕스러움을 호랑이라는 동물의 입을 빌려 질책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호질 양반전> 시대의 한복판에 위치한 사람은 그 시대를 읽어내기 힘들다. 그러나 연암은 존명배청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당대 지식인들과는 달리, 청의 발달된 문물 속에서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의 빛을 찾아냈다. 뒤늦게 관직에 나아가서도 자신의 입신양명에 연연하지 않았으며, 당대 보수적인 사대부들과 맞서 현실적이고 진보적인 사상을 견지하며 문학인으로서, 사상가로서의 역량을 아낌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나 연암의 진보적인 문학과 사상은 당대에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다. 그의 문학과 사상은 후에 손자인 박규수에게 전승되었으나 빛을 보지 못하고, 20세기 초에 들어서야 비로소 그의 업적은 적극적인 평가를 받게 되었다. 연암은 고문古文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격식이나 규범에 얽매이지 않았고, 소설식 문체와 조선 고유의 속어, 속담, 지명 등을 구사하여 개성이 뚜렷한 작품을 남겼다.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창조함)을 골자로 한 그의 문학론은 당대에 맹목적으로 고문을 모방하려 했던 사대부들의 의고주의擬古主義를 비판하며 독자성을 확보하였다. 소설은 어떠한 현상이나 사실을 고백하는데 머물러서는 안 되며 자기반성을 담고 있어야 한다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타락한 양반층을 비판하고 조선사회를 풍자한 것은 부조리한 당대 현실에 대한 연암의 일침이었으며 동시에 조선인으로서, 사대부로서 살아갔던 연암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고백이자 스스로에 대한 반성이었을 것이다. 연암의 소설은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고문古文이 되었지만, 글이라는 힘을 빌려 전하고자 했던 그의 사상은 근대화에 영향을 끼쳤음은 물론이고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와 현재의 소통이며 동시에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하는 지침이 되어주는 것은 비단 역사뿐만이 아니다. 작가는 현재를 살아가면서도 미래를 감지할 수 있는 예지적인 촉수를 지닌 존재여야 한다. 연암과 같이, 문자의 힘을 빌려 당대의 현실을 바탕으로 미래에 대한 청사진을 제시하며 더불어 그것이 재미든, 교훈이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무언가를 글 속에 담아낼 수 있는 작가라면, 그의 작품은 시대를 뛰어넘은 가치를 지닌 고전古典이며, 그의 혜안은 문학을 살아 있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궁극적인 목표는 현실정치로 나아가 자신의 힘으로 태평성대를 이루는 것이었다. 일찍이 과거에 응시해서 벼슬길로 나아갈 수 있는 재능을 지녔지만, 굳이 어려운 길로 돌아갔던 연암이 기존의 인습을 타파하고 당대 지식인들의 사상과 인식을 전환하고자 고뇌했던 과정에서 겪었을 시련과 번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 이상의 큰 고통이었을 것이다. 제도라는 틀에서 벗어나 기존의 안전선을 비껴가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외로운 존재일 수밖에 없다. 선구자적 근대의식과 개혁정신을 지닌 연암이 가야했던 길은 오늘날 우리의 눈으로 보기엔 지극히 양심적인 유학자의 길이며, 찬사를 보내고 싶을 만큼의 가치있는 일이었지만 그 이면엔 한 사람의 존재로서 감내해야만 했던 외로움이 있었다는 것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민옹전>에서도 언급된 연암의 우울증은 현실과 이상의 괴리에서 비롯된 것이며 동시에 남들이 ‘가지않은 길’을 걸어야 했던 외로움에서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현실도 연암의 붓끝에선 씁쓸한 웃음이 된다. 조선사회의 유교라는 화석화된 이념 속에 가려진 가공되지 않은 현실을 날카롭게 포착해 내고, 육안이 아닌 심안으로 현실을 바라보며, 한낱 몽상가적 이상이 아닌 가능성 있는 미래를 설계한 연암이었기에 그의 문학과 사상은 세월의 경계를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감수성을 전율시키기에 모자람이 없다. 시대를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가 연암을 마주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는 것이다.
<양반전 외 : 고전소설 · 산문 - 한국문학산책 36> 한국문학산책 36-고전소설·산문 양반전 외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풍자를 담은 조선 시대 대표 한문 소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실학자이자 대문호인 연암 박지원은 해학과 풍자를 통해 고루한 양반과 무능한 위정자들을 비판했다. <양반전>은 양반 매매를 두고 벌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양반들의 경제적 무능력과 허례허식, 일반 백성에 대한 횡포 등을 풍자한다. 또한 양반 신분을 사고파는 모습을 통해 조선 후기 신분 제도의 동요를 보여 준다. ■ 줄거리 양반전 강원도 정선에 사는 한 양반은 성품이 어질고 글 읽기를 좋아했으나 경제적으로 빈궁하여 관청에서 곡식을 많이 꾸어 먹었다. 곡식을 꾼 것 때문에 감옥에 갇힐 위기에 처했으나 아무 방도가 없던 차에, 같은 마을에 살던 신분이 낮은 부자가 빚을 갚아 주는 대신 양반 신분을 산다. 군수가 그 이야기를 듣고 정식으로 양반 매매 문서를 만들어 주는데 그 내용은 양반의 허례허식이나, 양반의 횡포에 관한 것이다. 문서의 내용을 들은 부자는 도둑놈 같은 양반은 되지 않겠다며 달아나 버린다. 호질 배가 고픈 호랑이가 귀신들에게 잡아먹을 만한 것을 묻는다. 귀신들이 여러 사람을 언급하지만 호랑이는 그들이 더러운 이유를 대며 거절한다. 그러던 중 호랑이는 사람들에게 선비로 존경받지만 실제로는 남몰래 과부와 만나다가 그 아들들에게 들켜 도망치던 북곽 선생과 마주친다. 호랑이는 한참 북곽 선생을 꾸짖고 사라지는데, 호랑이가 사라진 줄도 모르고 빌던 북곽 선생은 이른 아침에 농부를 만나자 다시 덕망 있는 선비인 척한다. 예덕선생전 자목은 스승 선귤자가 똥거름을 치우는 엄 행수와 친교를 맺는 일을 부끄럽게 여겨 스승에게 항의한다. 선귤자는 엄 행수의 여러 가지 일화를 들려주며 자목에게 바람직한 인간상을 깨우쳐 준다. 선귤자는 엄 행수가 남이 자신을 알아주는 것을 바라지도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일을 하며 분수를 지키는 성실하고 검소한 사람이라며,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해 더러운 일을 하지만 덕이 있다는 의미로 예덕 선생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허생전 남산골에서 공부하던 허생은 아내가 가난한 삶을 한탄하자 이기지 못해 공부를 중단하고 장안의 갑부인 변 씨를 찾아가 일만 냥을 빌린다. 일만 냥으로 큰돈을 번 뒤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도적들을 섬으로 데려가 공동체를 만든다. 허생은 남은 돈 십만 냥을 변씨에게 주고 자신은 다시 가난한 선비로 돌아간다. 변 씨는 허생과 친교를 맺고, 정승 이완을 허생에게 소개한다. 허생은 이완이 개혁을 말하면서 의지가 약한 것을 비판하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낭송 열하일기> 동양고전의 낭송을 통해 양생과 수행을 함께 이루는, ‘몸과 고전의 만남’ “낭송Q시리즈” 동청룡(봄의 기운)편의 다섯 번째 책. 조선 최고의 문장가 연암 박지원이 저술한 세계 최고의 여행기라는 이유만으로 『열하일기』를 낭송해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이 1780년 건륭황제의 70세 생일 축하 사절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뒤, 그 여행담을 기록한 책이다. 건륭황제는 수도 연경이 아닌 피서지였던 열하에서 축하사절단을 맞이했기 때문에 연암은 그 시대에는 드물게 열하에 다녀올 수 있었을 뿐 아니라 건륭황제는 물론 4대 라마인 반선 라마를 접견하는 행운까지 누리게 된다. 그 결과 조선사신단 중 누구도, 조선지식인 중 누구도 남길 수 없었던 열하에 대한 유일한 기행문이 탄생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열하일기』다. 『열하일기』는 여행기인가 하면 철학서 같고, 패관잡기의 소설체인가 하면 진지한 논설체를 구사하기도 하고, 시트콤처럼 웃기다가도 심각하게 세상의 이치를 논하는, 종횡무진 그 자체다. 『낭송 열하일기』는 『열하일기』의 여정의 흐름을 고려하되, 여정의 순서보다는 낭송에 적합한 글들 중 우리의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촌철살인의 이야기들, 삶의 이치가 담긴 글들이 독립적으로 전달되는 데에 중점을 두고 글들을 재배치하였다. 요동벌판을 두고 “훌륭한 울음터”라 감탄했던 연암의 표현을 빌리자면 『낭송 열하일기』는 ‘훌륭한 낭송터’다. 연암의 숨소리, 청나라 문명과 사람들의 숨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는 그 훌륭한 낭송터에서 입을 열 때 비로소 함께 열리게 될 것이다.
<연암 박지원 선집> 박지원은 사회풍자적 문학 작품의 창작에 심혈을 기울였는데, 대표작으로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반드시 실리는 허생전(許生傳)을 비롯해, 양반전(兩班傳), 호질(虎叱), 광문자전(廣文者傳), 예덕선생전(穢德先生傳), 김신선전(金神仙傳) 등이 있습니다. 본래 한문본인데다가, 여러 번역본들 속에도 현대사회에 쓰이지 않는 일부 낱말들이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에서는 그런 이해하기 어려운 낱말들 중 일부를 현대어로 수정하였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흐름은 유지되어 있으므로 원본의 가치를 충분히 찾으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열하일기 1> 500여 컷의 생생한 사진과 그림으로 만나는 e-book <열하일기>의 감동 조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을 고른다면 단연 손에 꼽을 정도로, 열하일기는 조선 최고의 문학 작품이다. 조선의 대문호라 불리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명성도 이 책으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이다.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체험하였다. 1780년(연암 44세) 10월 말, 연암 박지원은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했다. 이 초고는 책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그 일부가 주변의 지인들에 의해 전사(傳寫)되었고, 급기야 한양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연암체’(燕巖體)라는 새로운 글쓰기 문체가 생겨날 정도로, 열하일기는 당시 독서계와 문인 지식층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한문으로 된 우리 고전 중에서 열하일기만큼 많이 번역되어 출판된 책은 없을 것이다. 조선 시대의 한글 필사본을 제외한다고 해도(公刊이 아니므로 우선 제외), 일본인 아오야기 고타로가 1915년에 번역본을 인쇄하여 출간한 이래로 오늘날까지 10여 종 이상의 번역본이 나왔고, 소설식으로 요약하거나 리라이팅한 것 또는 아동용 만화로 엮은 것 등을 합하면 그 종류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돌베개가 <새 번역 완역 결정판>이라는 타이틀을 내걸고 열하일기를 새롭게 출간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열하일기>를 읽는다! ― 오역과 오류의 악순환을 완벽하게 바로잡은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조선 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작품을 고른다면 단연 손에 꼽을 정도로, 열하일기는 조선 최고의 문학 작품이다. 조선의 대문호라 불리는 연암 박지원(1737∼1805)의 명성도 열하일기로 인해 더욱 높아졌다. 주지하다시피 열하일기는 연암 박지원의 중국 기행문이다. 그는 1780년 청나라 건륭 황제의 70회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끼어 중국을 다녀왔다. 공적인 소임이 없어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던 연암은 북경 여행과 함께 전인미답의 열하 지방을 체험하였다. 1780년(연암 44세) 10월 말, 연암 박지원은 중국 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즉시 열하일기 집필에 전념했다. 이 초고는 책으로 완성되기도 전에 그 일부가 주변의 지인들에 의해 전사(傳寫)되었고, 급기야 한양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연암체’(燕巖體)라는 새로운 글쓰기 문체가 생겨날 정도로, 열하일기는 당시 독서계와 문인 지식층에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열하일기는 당시 문단에서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새로운 글쓰기 시도에 환호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청나라 연호를 썼다 하여 노호지고(虜號之稿)라고 비방하였다. 문체반정(文體反正)을 추진하던 국왕 정조(正祖)까지 이 작품을 주목하고 문제시했던 것은 유명한 일화에 속한다. 시대착오적인 반청(反淸) 사상을 풍자하고 조선을 낙후시킨 양반 사대부의 책임을 추궁하는 등 현실 비판적인 내용과 신랄한 표현이 담긴 이 책은 연암 당대는 물론이고 조선조 내내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그 때문에 연암 당대는 물론이고 손자 박규수가 우의정으로 있던 조선 말기에도, 그리고 서적의 출판과 보급이 비교적 활황을 보였던 근대 초기에 이르기까지도 공간(公刊)되지 못하고 오직 필사로만 유통되었다. 열하일기는 근대 이후에야 비로소 인쇄본의 형태로 독자들에게 보급되었다. 기왕에 부녀자를 대상으로 한 한글본 열하일기가 조선 후기에 나오긴 했지만(『열하긔』, 1791년 전후로 추정; 『연암열하일긔』, 1799년 혹은 1899년으로 추정) 필사본의 형태이고, 인쇄의 방식으로 공간된 것은 1915년에 일본인 아오야기 고타로(靑柳綱太郞)가 경성(京城)에서 조선연구회 고서진서간행(古書珍書刊行)의 제 20, 21집으로 간행한 『燕巖外集』 상, 하 두 책이 처음이다. 그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십 종의 번역본이 나왔다. 열하일기 번역본의 역사 열하일기는 무수한 번역본이 있으며, 선본이 되는 책은 10여 종을 꼽을 수 있다. 그중에서 특히 주목을 요하는 번역본 네 종을 꼽아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김성칠(金聖七) 선생이 번역하여 정음사에서 출간한 문고본 5책이다. 1948년 3월부터 1권이 간행되기 시작하여 1950년 2월에 5권이 나온 이 책은, 한국전쟁과 역자의 갑작스런 별세로 인해 완역되지 못했다. ‘도강록’에서 ‘태학유관록’까지 열하일기 전체 분량의 3분의 1를 번역했는데, 꼼꼼한 주석과 유려한 번역 문체로 가독성 높은 역작을 만들었다. 특히 『청사고』(靑史稿) 등과 같은 중국의 역사서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고증하여 주석을 달기도 하였다. 약간의 오역과 분명치 않은 전고 사용, 인명에 대한 오류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번역서는 열하일기에 대한 최초의 전문 번역으로 손꼽을 만하다. 또한 이 책의 출간 이후 수많은 열하일기의 번역서가 이 책을 표절했는데, 이 점에서 국역 열하일기의 원조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둘째, 북한의 국립출판사에서 출판된 리상호 선생 번역 『열하일기』 3책을 들 수 있다. 1955년 상권, 1956년 중권, 그리고 1957년 하권이 발간된 이 책은 최초의 열하일기 완역본이다. 열하일기가 완성된 지 175년, 연암이 서거한 뒤 150년이 지나서 열하일기가 우리말로 최초로 완역된 것이다. 이 책은 50년대 중반 북한의 학문적 수준을 여실히 보여주는 번역의 걸작이다. 한문투의 번역이 아니라 가급적 우리 토박이말을 사용하여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번역한 것이 그 특징이다. 이 책은 80년대 이후 북한에서 겨레고전문학선집에 뽑혀 재출간되면서 기왕의 오류를 몇 가지 정정했으나 대부분은 그대로 두었고, 이를 남한의 보리출판사에서 2004년에 3책으로 그대로 간행하였다. 셋째, 연민 이가원 선생이 번역한 『국역 열하일기』를 꼽을 수 있다. 1966년 민족문화추진회에서 1, 2권으로 초판이 발행되었고, 1973년에 대양서적(大洋書籍)에서 세 권으로 출판되었으며, 이후 1977년과 1984년에 약간의 수정을 가한 중판이 민족문화추진회에서 간행되었다. 90년대를 전후하여 북한의 『열하일기』가 영인되어 학자들에게 배포되기 이전에는 이 연민 선생의 번역본이야말로 전문 학자는 물론, 일반 대중에게 가장 많이 읽히고 보급되었던 열하일기 번역본이었다. 북한 사정에 어두울 수밖에 없던 7, 80년대 우리 학계에서는 이 번역서가 최초의 번역서로 인식되기도 하였다. 연민 선생의 번역본은 풍부한 이본 비교를 거친 최초의 완역서이며, 열하일기의 목차를 새롭게 정리했으며, 교합본 원본텍스트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번역사적 의의를 가지는 책이다. 특히 여러 필사본의 이본 대비를 토대로 번역은 번역대로 충실하게 하고, 동시에 여러 이본을 대비하여 원문을 수록했기 때문에 그 원문은 열하일기 교합본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연민교합본’이란 말은 이때 생겨난 말이다. 이런 호평과 번역사적 의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민 선생의 번역서는 치명적인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음도 사실이다. 넷째, 윤재영(尹在瑛) 선생이 번역하여 1982년에서 1984년까지 박영사의 박영문고본으로 간행된 5책의 열하일기 완역본을 꼽을 수 있다. 문고본이라는 성격 때문인지 그동안 학술적으로 크게 주목을 받지 못했다. 기존에 간행된 열하일기의 번역본을 참고하지 않고 번역자 자신이 독자적으로 번역한 것으로 판단되는 이 문고본은 지금까지 출판된 어떤 열하일기보다 정확하게 번역된 것으로 판단된다. 물론 이 책 역시 전혀 오역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의 오역을 되풀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완역해냈다는 것은 학술사적으로 중요한 성과이다. 이상의 번역서들은 한국 고전문학의 중요한 성과물이다. 첫째, 김성칠본은 오류가 적은 번역본이지만, 일기 전체의 3분의 1 정도의 분량만 번역이 되었다. 둘째, 리상호본은 열하일기 번역사의 기념비적 책이다. 많은 오역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완역을 했고, 한글 문체가 유려하다는 점이 장점이다. 이후 남한에서 번역된 열하일기는 대부분 이 책을 참고하거나 그대로 베꼈다. 셋째, 이가원본은 필사본 간의 교감을 거친 완역본이라는 명성이 있지만, 북한의 리상호본을 그대로 전재한 곳이 대단히 많다. 넷째, 윤재영본은 독자적 번역을 하면서도 기존의 오역을 비교적 많이 바로 잡았다. 학술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번역이지만,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전고나 오역이 있다. 열하일기 번역본의 역사는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베끼기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베끼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 그다지 난해한 문장이 아니어서 쉽게 번역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왕의 번역을 그대로 베끼는 경우가 있고, 자신의 능력으로 도저히 번역할 수 없기 때문에 기왕의 번역을 베끼는 경우가 있다. 두 경우 모두 표절의 혐의를 벗을 수는 없다. 쉽게 번역할 수 있는 문장을 베낀 경우는 단어 하나, 조사 하나를 공교롭게 바꾸는 경우가 많아 비교해도 명확하게 베꼈다라고 판단 내리기 어렵지만, 번역하기 까다로운 문장의 베끼기는 좀 사정이 다르다. 먼저 출판된 번역이 오역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번역도 그 오역과 꼭 같다는 것은 여간해서는 있을 수 없는 경우이다. 정확한 번역은 우연히 서로 같을 수 있지만, 오역이 서로 같아진다는 것은 그대로 베끼지 않는다면 거의 불가능할 터이다. 이러한 경우는 기왕의 열하일기 번역본에 무수한 사례가 있지만, 여기서는 두 가지 사례만 들어보겠다. 마지막에 고미숙본을 함께 비교하는 이유는 가장 근래에 나왔고, 또한 많은 주목을 받은 판본이기 때문이다. 다음은 ‘황도기략’ 편의 「황금대기」의 일부이다. 원위(元魏: 남북조 시대의 북위) 때, 장군 이주조(爾朱兆)가 난을 일으키자 성양왕(城陽王) 원휘(元徽)가 금 백 근을 싸 가지고 낙양령(洛陽令)으로 있는 구조인(寇祖仁)을 찾아가 몸을 의탁하려고 했다. 구조인 집안에서 배출한 자사(刺史) 세 명 모두가 사실은 자신이 발탁해 주었으므로 거절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조인은 집안 식구들에게 ‘오늘 부귀가 절로 굴러들어 왔네’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원휘에게 “잡으러 온 장수가 곧 들이닥친다”고 겁을 주어 다른 곳으로 도망가라고 해 놓고는 길에서 장맞이하고 있다가 죽여 버렸다. 그리고 그 머리를 이주조에게 보냈다. _ 돌베개본 위 인용문은 김혈조 선생이 번역한 것이다. 인용문 중 밑줄 친 부분에서 판본끼리의 차이가 있다. 그 부분을 고찰해 보면, 리상호본 :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휘’때문에 걱정이라 하였다. 그러나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이를 때에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후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린 후 그 머리를 조(兆)에게 보냈다. 이가원본 : 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에 와서 우리 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마는 저 휘 때문에 걱정이야.” 하고는, 휘를 잡으러 오는 장수가 장차 이를 것을 알고, 휘를 다른 장소로 도망하라고 꾀인 뒤, 길에서 그를 맞아서 죽여 버리고는 그 머리를 조(兆)에게로 보냈다. 고미숙본 : 구조인은 집안 사람들에게 “우리집의 부귀는 지극하다 할 수 있지만 저 휘 때문에 정말 걱정이야” 하였다. 그래서 이주조가 잡으로 온다고 꾸며 휘를 도망치게 하고는, 길에서 그를 죽여 버렸다. 이 번역은 문맥이 서로 통하지 않는 명백한 오역이다. 제물을 들고 원휘가 제 발로 구조인의 집에 찾아 들어오자 집안 사람들에게 ‘돈이 저절로 집에 굴러들어 왔네’ 한 것이다. 해당 원문은 ‘今日富貴 至矣 乃怖徽云’이다. 이 부분에 대한 번역은 다른 번역본에서도 거의 대동소이하다. 정기태 선생의 민족문화문고본에서는 “현재 우리집의 부귀가 지극하다. 또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라고 번역했으며, 윤재영 선생은 “우리집의 부귀는 더할 수 없이 높아졌다. 이제 왕 휘는 필요치 않은 사람이다”라고 번역했다. 어떤 본을 그대로 베꼈다고 단정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오역의 내용이 서로 비슷하다는 점에서 서로 참고했을 가능성은 높아 보인다. 또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관내정사’ 7월 27일 이야기다. 진자점(榛子店)의 기생집에서 유사사라는 이름의 기생에게 노래를 더 불러달라고 청하자, 그 기생이 눈을 흘기며 청한 사람에게 톡 쏘아 붙이는 대목이다. 여러 번역본에서 그 부분만을 인용해서 비교해 보겠다. _ 돌베개본 아오야기 고타로 본: 사사가 눈을 흘기며 말하기를, 나물 팝니까? 더 달라고 하게. 김성칠본: 유사사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면서 ‘굳이 많이 해야 멋인가요.’ 리상호본: 유사사는 눈을 주면서 ‘술상을 들일까요’ 한다. 이것은 돈을 좀 벌겠다는 말이다. 이가원본: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채소 사는지요, 투정하게(더 달라게).’ 이마무라 요시오 본(今村與志雄; 1978년刊):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말하기를 ‘요리를 주문할까요’ 윤재영본: 유사사가 눈을 흘기는 시늉을 하고 ‘변변치 못한 노래를 자꾸해서 뭘 합니까?’ 고미숙본: 유사사가 눈을 흘기며 ‘술상을 청할까요?’매상을 올리려는 속셈이다. 원문 “絲絲流眼曰 賣菜乎 求益也”에 대한 번역인데, 이가원 선생의 번역이 가장 정확하다고 여겨진다. 위의 각 번역을 비교해 보면 리상호본과 고미숙본이 가장 비슷한 내용이다. 리상호와 고미숙 두 분의 번역은 오역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오역임에도 불구하고 우연하게도 전체적인 의미는 비슷하다. 결국 고미숙본은 리상호본에 윤색을 가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이러한 예는 일일이 거론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난해한 문장의 오역일수록 더욱 베낌의 현상이 두드러지는데, 특히 인명과 전고 부분에 집중된다. 열하일기는 번역 원고만 해도 6천 매가 넘는 방대한 분량이다. 조선의 대문호인 연암 박지원의 글인데다 심오한 철학 이야기, 음악 이야기, 과학 이야기 등 어려운 내용의 글들이 상당수 있고 또한 당시 백화(白話)인 청나라 말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하는 등 고전문학을 전공한 학자들에게도 결코 녹록치 않은 고전이다. 번역의 과정에서 생기는 오류와 오역은 병가지상사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오역과 오류를 이후 작업을 통해 어떻게 바꾸고 발전시키느냐이다. 앞선 선본들은 학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을 뿐만 아니라 후대 학자들에게도 모범이 되는 귀중한 판본이다. 오늘날과 같이 각종 참고서 및 공구서, 혹은 컴퓨터를 활용하여 전고를 마음대로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그런 번역물이 나온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리고 이들 선본의 오류는 후대의 번역자들이 마땅히 교감과 재번역의 과정을 통해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번역본은 아쉽게도 그러한 발전 과정 없이 그대로 베끼기에만 힘을 기울였다. 오역과 오류의 유형별 사례 기존 번역서는 부지기수의 오역이 있으며, 그것이 오역인지도 모르면서 베껴온 경우가 많았다. 오역의 사례를 유형별로 지적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원전의 문장이 어렵기 때문에 오역하거나 얼버무린 경우 ‘산장잡기’ 「매화포기」의 앞부분에는 불꽃놀이의 불꽃 모양을 매화꽃에 비유하여 묘사한 대목이 있다. 이 부분은 송나라 사람 송백인(宋伯仁)이 편찬한 『매화희신보』의 글을 연암이 그대로 인용한 것인데, 이를 옳게 번역한 본이 없다. 리상호본은 솔직하게 ‘두 줄은 뜻이 상세하지 않다’고 밝히고 이 부분을 아예 공란으로 두었으며, 그 외의 번역본은 대충 얼버무리고 있으나 무슨 말인지 전혀 의미 파악이 안 된다. _ 돌베개본 2) 연암의 문체적 특징을 모름으로써 저지른 오역, 혹은 상식에 어긋나는 오역 ‘속재필담’의 한 부분에서 연암만의 문체적 특징을 찾을 수 있다. 아들 여덟을 둔 중국인 비치에게 연암이 그 아들이 모두 한 어미가 낳은 것이냐고 묻자, 비치는 웃기만 하고 그의 동료인 배관이 옆에서 “작은 마누라 둘이 좌우를 모시지요. 나는 저 사람의 아들 팔형제가 부러운 것보다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그만이겠소”라고 말하여, 온 집안이 떠나갈 듯 웃었다(리상호본)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서 직접인용문의 해당 원문은 “吾不羨他八龍 慕渠一姦”이다. ‘慕渠一姦’(모거일간)은 직역하면 ‘한번 간통하는 것이 그립다’라는 말인데, 이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 그리하여 역자들은 이를 순화하여 작은 마누라를 빌린다는 뜻으로 억지 해석을 했는데, 이 역시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소리이다. 이야기 끝에 집이 떠나갈 듯 웃었다고 했는데, 마누라를 빌려달라고 한다면 주먹다짐을 할 일이지, 결코 웃을 일이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의 모든 번역은 ‘간통’ 아니면, ‘마누라 빌리기’로 번역했다. 리상호 선생이 이렇게 번역을 한 뒤로, 남한의 번역본은 대부분 이를 그대로 따랐다. 고미숙본은 “나는 저이의 여덟 아들은 부럽지 않고 그저 작은 마누라나 하룻밤 빌렸으면 참 좋겠어요”라고 하여 리상호본에다 약간의 부사어를 첨가했으나 오역을 베낀 것이라는 사실을 숨길 수 없다. 이 문장은 상식적으로 번역해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원문을 파자식으로 번역해야 한다. 연암이 파자식의 희작으로 원문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은 연암체의 한 특징이라고 생각된다. 이 연암체를 고려하지 않으면 전혀 번역을 할 수 없는 엉뚱한 문장으로 오해하게 된다. 여기 본문의 ‘姦’(간)은 한자의 본래 뜻 보다는 여자 셋이라는 파자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나는 여덟 아들이 부러운 게 아니라, 한 남자가 세 여자를 거느렸다는 게 더 탐납니다”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_ 돌베개본 3) 전고, 고사성어를 몰라 생긴 오역 ‘망양록’에는 곤륜비슬(崑崙琵瑟)이라는 고사성어를 사용한 문장이 있다. 이는 단선본(段善本)이라는 선사(禪師)와 강곤륜(姜崑崙)이라는 악사 사이에 있던 고사로, 웬만한 고사성어 책에 나와 있는 것이다. 기존의 번역본은 이 두 사람의 이름을 몰라 아주 엉뚱한 번역을 했는데, 이후의 번역본은 모두 이를 그대로 답습했다. “선사인 단선본이 강곤륜에게 십 년 동안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라고 번역해야 할 것을 “단사(段師)가 강(康)을 곤륜(崑崙)으로 보내어 십 년을 두고 악기를 만지지 못하게 하여”라는 식으로 오역하였다. _ 돌베개본, 2권 352쪽 참조 또 ‘피서록’에 보면 유득공의 한시를 인용한 구절에 남시(南施)라는 표현이 있다. 이는 남시북송(南施北宋)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말로, 당대의 대표적 시인을 뜻하는 말이다. 청나라 시절 남쪽에는 시윤장(施閏章), 북쪽에는 송완(宋琬)이라는 시인이 이름을 떨쳤으므로 남시북송이라는 말이 생겼고, 당대에 남북을 대표하는 유명 시인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런데 기존의 번역은 ‘남시’를 전혀 엉뚱한 의미로 번역했는데, 심지어는 ‘남쪽의 서시(西施)라는 여인’이라고 엉뚱하게 오역하기도 했다. _ 돌베개본 4) 지명, 인명 등 교유명사를 몰라서 생긴 오역 일반 단어나 표현을 인명, 지명의 고유명사로 번역한 경우도 있고, 반대로 인명이나 지명의 고유명사를 일반 문장으로 번역하는 오역이 있다. 그리고 인명으로 짐작은 하면서도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몰라서 얼버무린 경우도 있는데, 이 역시 오역이다. 이런 오류는 부지기수이다.‘황교문답’에 서역(티베트) 지방에 다녀왔던 명나라 사람의 이름을 이야기한 곳이 있다. 제대로 번역하면 이렇다. “앞 시대인 명나라 때부터, 양삼보(楊三寶)와 승려 지광(智光), 우리 고향의 하객(霞客)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국가를 여행하였습니다.” 이 부분을 번역한 각 판본을 비교해 보면, 리상호본: 명나라 시대의 양삼보와 중 지광 오향(吾鄕) 하객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나라들을 두루 다녔습니다. 이가원본: 명의 양삼보와 중 지광ㆍ오향ㆍ하객 등 여러 사람들은 서역의 여러 불교국을 두루 다닌 일이 있었는데 윤재영본: 전조(前朝) 명나라 때 양삼보와 중 지광 오향 하객 등 여러 사람이 서역의 여러 불교 나라들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고미숙본: 명나라 시절, 양삼보와 여러 고승들이 서역의 불교국을 두루 편력한 일이 있었지요. 여기 오향(吾鄕)은 글자 그대로 우리의 고향이라는 뜻이다. 하객(霞客)은 이 문장의 화자(話者)인 학지정과 같은 고향 출신인 서홍조의 호인데, 『서하객유기』라는 유명한 기행문을 남긴 인물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모른 기존의 번역자는 오향을 사람 이름으로 오역하였으며, 이후 모든 번역본은 리상호본을 그대로 베끼거나 얼버무려서 오역을 답습하였으며, 양삼보 지광 하객이 어떤 인물인지에 대한 주석도 전혀 달지 않았다. _ 돌베개본 ‘망양록’ 편에 “수나라 개황(開皇) 초에 새로운 음악이 만들어졌을 때, 악공 만보상(萬寶常)은 그 음악이 음란하고 거칠며 슬퍼서 오래지 않아 천하가 끝장날 것이라고 논평했답니다”(隋開皇初 新樂旣成 萬寶常 以爲淫견而哀 天下 不久盡矣)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 만보상(萬寶常)은 수나라 시대의 음악가 이름이다. 이에 대해서 최초의 완역본이라 할 수 있는 아오야기 고타로는 ‘만보’라는 것을 새로운 곡의 이름으로 보았다. 리상호 선생은 “개황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란 음악이 나오자”라고 번역하여 만보라는 음악의 이름으로 파악했고, 이가원 선생 역시 “개황 초년에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라고 번역하여 역시 새로운 곡의 이름으로 이해했다. 윤재영 선생 역시 “개황 초에 만보(萬寶)라는 새 악곡이 이루어지자”라고 하여 악곡의 명칭으로 번역하였다. 임정기 선생 역시 “새로운 음악으로 만보(萬寶)라는 것이 나오자”라고 하여 음악의 이름으로 파악하였다. _ 돌베개본 5) 역사 사실을 몰라서 오역하거나, 아주 엉뚱한 해석을 하는 경우 역사의 구체적 사실을 몰라서 얼버무리거나 오역을 한 경우도 있지만, 있을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도 있다. 예컨대 송나라 임금이 거란에 포로로 잡혀 북경에 온 상식 수준의 역사적 사실을 모르고, 임금 내외가 유람하려고 북경에 온 것으로 번역한 경우가 그러한 예이다. 리상호본: 송나라 휘종이 북방으로 갈 때에 정 황후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고미숙본: 송 휘종이 북으로 순행할 적에 정황후와 함께 연수사에서 묵었다. 위 문장은‘황도기략’「유리창」의 첫 단락이다. 제대로 번역하면, “유리창은 정양문 밖의 남쪽 성 아래에서 가로로 선무문 밖에까지 뻗어 있다. 이곳은 연수사(延壽寺)의 옛터이다. 송나라 휘종이 금나라에 포로로 잡혀서 북쪽으로 수레를 타고 갈 때 정 황후(鄭皇后)와 함께 여기 연수사에서 묵었다고 한다”라고 되어야 한다. _ 돌베개본 이외에 송나라의 수도를 북경이라고 말한 것 등은 사소한 실수인 것 같지만, 사실은 중국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남의 번역을 베낀 데서 나온 결과이다.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 이 책의 역자 김혈조 선생은 연암 산문문학 연구에 일생을 매진한 전문 학자이다. 자신의 연구과제가 늘 연암 박지원의 산문문학이었기에, 책을 내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더라도 늘 열하일기는 그에게 있어 연구의 대상이었고, 고심처이기도 했다. 2007년 이전에 이미 열하일기는 대략 번역해 두었으나, 완역을 위해 옛 원고를 다듬고 번역하지 못한 부분을 번역하는 등 2007년 8월부터 2008년 7월까지 약 1년간 본격적으로 이 작업에 매진했다. 이 기간 동안 역자는 연구년 교수로서 중국 산동대학에 체류했는데, 꼬박 1년을 열하일기 번역에만 매달렸다. 그동안 풀지 못하고 여러 학자들이 미상(未詳)으로 남겨둔 부분을 모두 풀어냈다고 자부할 만큼 이 책은 번역의 성과에 있어서 그간의 판본을 뛰어넘는다. 고전에 익숙지 않은 세대까지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관련 주석을 실었다. 또한 연암이 다녔던 장소를 직접 답사하며 글의 진위를 확인하고, 아울러 사진 촬영을 하여 이 책의 현장감을 높이는 주요 도판으로 넣음으로써, 이에 감히 ‘결정판’이라 불릴 만한 열하일기를 출간하게 되었다. ‘새 번역 완역 결정판’ 열하일기의 특징과 장점을 열거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오역 없는 번역, 정확한 번역을 기했다. 반복되어 온 오역과 오류를 모두 바로잡았다. 또한 기존 번역서에서 미상(未詳)으로 표시하고 번역문 없이 넘어갔던 부분들은, 연암 스스로 공란으로 비워둔 경우가 아니라면, 모두 그 전고를 찾아 번역하였고, 청나라 때의 남겨진 자료를 찾아 대조하여 오역으로 남은 인명 지명 등을 바로잡았다. 둘째, 열하일기 원문 텍스트의 오류를 바로잡아서 번역했다. 열하일기는 연암이 탈고한 당시에 바로 간행되지 못하고 근대까지도 필사본으로 전해지다 보니 수많은 필사 이본들이 생겨났고, 오탈자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이 역시 올바른 번역을 방해하는 요인이다. 때문에 역자는 다음의 과정을 거쳐 열하일기 원문 텍스트를 바로잡았다. 1) 박영철본을 텍스트로 하되, 필사본 간의 대조 작업을 거쳐서 번역했다. 2) 연암이 인용한 중국 측 원전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대조하여 바로잡았다. 3) 텍스트 자체의 오자 탈자를 바로잡아서 번역하고, 이를 표시했다. 4) 인명, 지명 등과 같은 고유명사의 오류를 바로잡았다. 5) 역사 사실, 유물, 유적 등에 대한 원전의 오류는 고증하여 밝혔다. 셋째, 그동안 밝히지 못한 고사성어, 전고 등을 모두 찾아서 해설했다. 그동안의 오역 중 상당 부분은 어려운 전고나 고사성어를 알지 못해서 나온 것인데, 이번 열하일기에서는 모든 전고와 고사성어를 밝혀서 번역하였다. 넷째,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적재적소에 관련 도판을 넣었다. 이 책의 출간을 위해 역자는 직접 연행의 전 코스를 답사하며 관련된 곳들을 촬영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도판만 해도 500컷이 넘고, 실제로 촬영해 온 분량은 그 이상이다. 또한 글의 이해를 돕거나 원전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지도와 도표를 제시했는데, 특히 연암이 다닌 북경성 내부의 경우는 관련 지도를 나란히 놓아서 연암이 설명하는 장소는 물론 연암이 잘못 설명한 곳까지도 바로 확인할 수 있도록 하였다. 다섯째, 한글세대와 전공자 모두에게 필요한 책이 되도록 번역하였다. 일반 독자를 위해 어려운 용어나 전고를 쉬운 말로 풀이하여 번역했으며, 가능한 주석을 많이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또한 인명이나 지명, 책 이름 등 고유명사의 경우 상세한 주석을 달아서 이해를 도왔다. 전공자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이해하기 어려운 원전 문맥의 경우에는 이해를 돕기 위해 상세한 주석을 달았으며, 관련된 연호는 연도를 병기했다. 또한 출전을 상세히 밝히고, 한자를 병기했다.
<호질 산군전 (천년의 우화 컬렉션 1)> - 픽사, 디즈니를 뛰어넘는 상상력을 우리 옛 우화 소설 속에서 만난다 - 서울대학교 등 전국 주요 대학 필독서와 접하기 어려운 희귀 작품이 한가득! - 그동안 어려웠던 우리 옛 우화 소설을 더 쉽게 풀어내 읽는다 우화 소설은 동식물이나 기타 사물에 인격을 부여하고 당대의 사회제도, 이념, 풍습 등을 풍자해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 가전체 소설, 의인 소설 등도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같은 것이라 보면 된다. 동물을 의인화한 민담이나 설화 등은 오래 전부터 전해 왔다. 기록 문학으로서는 신라의 설총이 지은 「화왕계」부터 1천여 년 동안 다양한 작품이 태어났다. 양반 사회의 가치관, 윤리, 권위 등이 무너지는 조선 후기에는 한글 작품까지 나오며 우화 소설이 가장 활발히 창작되었다. 그러다 일본에게 국권을 강제로 뺏기는 1910년 전후로 점점 쇠퇴한다. 힘든 현실 속에서 세태를 풍자하는 소설이 살아남기에는 어려웠기 때문이다. 또 소설을 자유롭게 짓기에는 우화라는 틀이 너무 좁았다. 그러나 이후 100년을 넘겨 어느 때보다 창작이 중요해진 오늘날, 우리 옛 우화 소설은 그 발상과 소재 면에서 되짚어 봐야 할 소중한 자산이 되어 있다. 임제의 「수정지」 등 사람의 감정을 소재로 한다는 발상은 픽사 스튜디오의 애니메이션 영화 「인사이드아웃」보다 400년 이상 앞섰다. 또 송세림의 「주장군전」처럼 사람의 성기를 의인화해 주인공으로 삼은 점은 성도덕이 엄격했던 조선 사회에서 그야말로 파격 그 자체다. ‘천년의 우화 컬렉션’은 우리 옛 우화 소설의 창작 세계를 가늠하고 살핀다는 취지로 기획되었다. 이를 위해 기존 책들보다 훨씬 쉬운 우리말로 풀어냈고, 접하기 어려운 희귀 작품도 많이 발굴해 포함시켰다. 이 기획으로 우리 옛 우화 소설이 새롭게 인식되고 평가받기 바란다. 더불어 현재의 수많은 창작자들에게도 새로운 자극이 되기를 바란다.
<연암 산문집> 연암 박지원은 고금의 학자들이 인정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글쟁이이자 실학의 큰 나무다. 창강 김택영은 그의 문장에 대해 천년의 역사 가운데 일찍이 존재한 적이 없던 바라고 극찬했으며 퇴계와 율곡의 도학(道學), 충무공 이순신의 용병술과 더불어 조선의 세 가지 우뚝한 일이라고 주장했다. 현대의 많은 학자들도 연암을 우리나라 최고의 문장가이자 세계의 어느 문인과 견주어도 손색이 없는 인물로 평가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연암집≫에는 이와 같은 박지원의 문학과 사상, 삶에 대한 모든 글들이 담겨 있다. 그가 <초정집서>에서 언급한 ‘법고창신’과 <영처고서>에서 말한 ‘조선풍’은 조선 후기 문학과 사상의 정수를 보여 주는 정신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산문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에 대한 통찰력으로 가득하다. 특히 ≪연암집≫ 별집에 실린 ≪열하일기≫는 최고의 기행문학이자 사상서다. ≪열하일기≫에는 박지원의 두 가지 핵심 사상, 곧 백성들의 삶을 이롭게 하자는 이용후생의 사상과 청나라의 우수한 문물을 적극적으로 배워 가난한 조선의 현실을 바꾸는 데 도움을 주자는 북학(北學) 사상이 담겨 있다. 그 가운데 <허생전>은 북벌론의 허구성, 해외 진출 사상, 양반 사대부의 무능 비판, 상공업의 중요성, 이상 사회 건설 등의 주제 의식을 담고 있어 박지원의 생각을 가장 잘 보여 주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박지원은 ≪연암집≫에서 이른바 연암체라 불리는 고유한 문체를 사용해, 기존의 판에 박힌 글투를 과감하게 탈피했다. 전통적으로 지켜야 했던 바르고 고운 문체 대신 비속어를 적극적으로 끌어 쓰는 등 그만의 독특한 문체를 썼으며, 해학과 풍자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당시에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본 번역서는 기존의 번역서들을 두루 참고하면서도 차별화되는 지점을 찾기 위해 고민했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원칙을 정했다. 첫째, 수많은 산문 가운데 연암의 진면목을 총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제 분류 및 선정에 심혈을 기울였다. 연암은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였으며, 세상을 바꾸려는 개혁가이자 평범한 한 인간이었다. 이러한 면모들을 골고루 균형 있게 담아내고자 했다. 독자들이 이 번역서를 읽고 위대한 문장가이자 사상가로서의 연암뿐만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연암도 발견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작품을 선별했다. 둘째, 번역은 원문에 최대한 충실하되 가장 현대적인 언어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다. 옛날과 지금은 사정이 많이 달라졌으므로 원문을 그대로 해석하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내용들이 많다. 그럼에도 우선은 원문 그대로를 충실히 번역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풀어 쓸 경우 자칫 연암의 간결한 문장과 맛깔스런 은유를 놓칠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따라서 풀어서 번역하면 그 의미가 더 쉽게 이해되는 경우라 할지라도 원문 고유의 색깔을 버리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사람의 자호(字號)만 밝힌 경우는 이름까지 적었으며 지명은 가능한 한 오늘날 명칭으로 바꾸었다. 그때는 호(號)만 써도 독자가 그 이름을 알 수 있었기에 따로 이름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지금 연암이 살아 있다면 어떻게 표현했을까를 생각하며 번역을 진행했다. 셋째, 번역자의 주관적인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객관적인 언어로 쓰기 위해 노력했다. 예컨대 <일야구도하기>에서 ‘今吾夜中一夜九渡’의 일야구도(一夜九渡) 번역에 대해 많은 분들이 ‘아홉 번이나 건넜다’라고 번역했으나 옮긴이는 ‘아홉 번 건넜다’라고 번역했다. ‘이나’라는 표현은 번역자의 주관이 개입된 것인데, 이 경우 글의 의미를 명료하게 해 주는 장점은 있으나, 연암의 세계관이 매우 냉철하고 객관적이라는 점을 고려해서 가능한 한 감정이 드러나지 않도록 번역했다. 다른 글들도 이와 동일한 기준에서 번역에 임했다. 넷째, 각주는 최대한 줄였다.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글에서 각주까지 읽어야 이해가 되는 번역은 좋은 번역이라고 할 수 없다. 본문만으로도 의미가 쉽게 전달되도록 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는 원문에 나와 있지 않은 최소한의 정보를 첨가한 경우도 간혹 있다. 특히 긴 고사를 짧은 몇 마디 문장으로 표현한 원문의 경우, 각주로 달아 주기보다는 본문에서 최대한 요령 있게 압축해서 번역하고자 했다. 한편, 작품마다 해제를 달아 독자들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연암의 작품들은 감춤의 미학을 지향한다. 생각을 직접 전달하지 않고 비유와 알레고리 등을 통해 전달하기 때문에 그 의도한 바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작품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배경 정보들을 다루어 줌으로써 독자들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도록 배려했다. 그렇지만 연암은 작품 한 편 한 편마다 새로운 각도에서 접근이 가능하므로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느냐는 순전히 독자의 몫이다. ≪열하일기≫에서도 꼭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산문은 선별해 수록했다. 소설 가운데 연암의 면모를 잘 드러낸다고 판단되는 몇 작품을 수록했다. 오늘날 소설로 취급되는 연암 작품들은 사(史), 혹은 전(傳)의 맥락에서 쓰인 것임을 염두에 두었으면 한다. 이 책을 읽고 박지원의 새로운 문학 정신과 세계관, 한 인간으로서의 삶과 지식인으로서의 혜안을 함께 맛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작품을 번역하면서 박지원의 문장력과 생각의 힘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글은 오늘날 그대로 옮겨 놓아도 전혀 진부하지 않고 신선하다. 절제된 언어, 감칠맛 나는 비유, 상식을 뒤집는 싱싱한 생각, 세계에 대한 냉철한 시선 등 좋은 글이 갖추어야 할 요소를 전부 갖추고 있다. 맛난 음식을 맛볼 때와도 같은 즐거움을 독자들도 함께 경험하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