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안주인이라고 했나? 정정하지. 그녀는 허울뿐인 안주인이 될 거야.” “아, 알아들었습니다. 아직 어리시니 충분히 받아들이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지.” 컬렌이 느긋하게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의 입매가 살짝 비뚤어졌다. “이제 돌아갈 곳이 없으니까.” “…….”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위해 많은 돈을 지불했지, 안 그런가?” ‘중요한 건 공작가의 번영과 루이즈의 안전이야.’ 그 순간, 라나를 떠올리고 느꼈던 미약한 가슴의 아픔이 잠잠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을 흩뜨리는 모든 것에서 해방된 컬렌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라넬리아 번데일은 루이즈를 대신해서 죽어야 해.” ** 라넬리아는 숨을 헐떡이며 생각했다. ‘끝났다.’ 몸이 찢어질 듯 아프고 괴로웠지만, 오로지 그 생각뿐이었다. 드디어 모든 게 끝났다고. “이제 그만 저를 놔주세요, 공작님.” “라넬리아.” “공녀님은 이제 무사하잖아요. 저는 충분히 돈값을 치렀어요.” “…….” “그러니까, 제가 이혼하고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우리의 약속을 지켜 주세요.” 언제나 태양처럼 그를 비춰 주던 그녀가 사라졌다. 그래도 자신이 마련한 보금자리에서,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확인할 수 있는 한 컬렌은 견딜 수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사라졌다. 그 사실을 안 순간 그는 거의 미쳐 버렸다. 그때부터 컬렌의 세상에서는 해가 지지 않았다. 끔찍하게 긴 백야 속에서 결국 그는 무너져 버렸다.
무협지 배경 시대에 환생했다. 외로웠던 전생과 달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현생이 정말 좋다! 그렇게 새롭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달갑지 않은 불청객 한 명이 불쑥 일상을 파고든다. 상대는 재수 없고 무뚝뚝한 객식구, 영호량. ……뭐, 자세히 보니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서 어찌어찌 남매처럼 지내게 됐지만, 알고 보니 이 녀석은 전생에 읽었던 무협지의 악당 남조였다. 그것도 의붓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해 배다른 동생인 남주를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는 아주 질이 나쁜 놈! 평온한 내 일상과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려면 이 녀석을 멀리하는 게 당연한데…… 어째서 나쁜 놈처럼 보이지 않지? 나한테는 왜 이렇게 치대는 거고? 이 녀석을 살짝 고치면…… 괜찮지 않을까? * * * “누가 다가오는 게 싫다고 했지?” “!” 나는 숨을 딱 멈췄다. 몽환적인 기분이 싹 가시고 현실감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눈만 아래로 굴렸다. 감히 녀석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녀석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말은…… 포기하라는 거지?” “……그래.” 사탕 과자를 꿀꺽 삼킨 내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난 기다릴 건데.” “……뭐?” 내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이 얼굴을 돌려 나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포기만 답이 아니야. 부담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맘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내가 그럴 거고.” “…….” 당황한 내가 입을 떡 벌렸다.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였다. 두 뼘 남짓한 거리를 두고 움직임을 멈춘 녀석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하늘에 있던 별이 그곳에도 있었다. 멍하니 넋을 빼고 있는 나에게 녀석은 봄의 새순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와.”
라펠가르트 왕국의 아름다운 왕녀, 엘레노어. 성국의 피 또한 이은 그녀는 왕국의 왕위 후계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건 오라비였고, 그녀에게는 모욕적인 혼처가 내려진다. 왕의 충신으로서 작위를 받은 비천한 태생의 남자, 데클란. 하객들의 탄식이 가득 찬 예배당에서 혼례식 당일, 예배당 문을 연 그는 피 묻은 갑옷 차림이었다. 엇갈린 기억과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한 사람. 청보랏빛 눈과 마주한 데클란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아요.” 어떤 지옥이 기다린다고 해도, 엘레노아 당신이 없는 세상만큼 끔찍하진 않을 테니. “그러니 제발 가지 마세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데클란.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나에게 남은 기쁨과 행운, 행복이 있다면. 바라옵건대 신이여 모두 그에게 주소서. 더 이상 나에겐 필요가 없답니다. 이미 그에게 모두 받았으니까요. 제 길을 잃은 채 얽혀 들던 운명이 다시 요동치고. 타락한 성국의 거대한 음모가 손을 뻗기 시작하는데…….
라펠가르트 왕국의 아름다운 왕녀, 엘레노어. 성국의 피 또한 이은 그녀는 왕국의 왕위 후계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건 오라비였고, 그녀에게는 모욕적인 혼처가 내려진다. 왕의 충신으로서 작위를 받은 비천한 태생의 남자, 데클란. 하객들의 탄식이 가득 찬 예배당에서 혼례식 당일, 예배당 문을 연 그는 피 묻은 갑옷 차림이었다. 엇갈린 기억과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한 사람. 청보랏빛 눈과 마주한 데클란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아요.” 어떤 지옥이 기다린다고 해도, 엘레노아 당신이 없는 세상만큼 끔찍하진 않을 테니. “그러니 제발 가지 마세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데클란.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나에게 남은 기쁨과 행운, 행복이 있다면. 바라옵건대 신이여 모두 그에게 주소서. 더 이상 나에겐 필요가 없답니다. 이미 그에게 모두 받았으니까요. 제 길을 잃은 채 얽혀 들던 운명이 다시 요동치고. 타락한 성국의 거대한 음모가 손을 뻗기 시작하는데…….
무협지 배경 시대에 환생했다. 외로웠던 전생과 달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현생이 정말 좋다! 그렇게 새롭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달갑지 않은 불청객 한 명이 불쑥 일상을 파고든다. 상대는 재수 없고 무뚝뚝한 객식구, 영호량. ……뭐, 자세히 보니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서 어찌어찌 남매처럼 지내게 됐지만, 알고 보니 이 녀석은 전생에 읽었던 무협지의 악당 남조였다. 그것도 의붓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해 배다른 동생인 남주를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는 아주 질이 나쁜 놈! 평온한 내 일상과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려면 이 녀석을 멀리하는 게 당연한데…… 어째서 나쁜 놈처럼 보이지 않지? 나한테는 왜 이렇게 치대는 거고? 이 녀석을 살짝 고치면…… 괜찮지 않을까? * * * “누가 다가오는 게 싫다고 했지?” “!” 나는 숨을 딱 멈췄다. 몽환적인 기분이 싹 가시고 현실감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눈만 아래로 굴렸다. 감히 녀석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녀석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말은…… 포기하라는 거지?” “……그래.” 사탕 과자를 꿀꺽 삼킨 내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난 기다릴 건데.” “……뭐?” 내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이 얼굴을 돌려 나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포기만 답이 아니야. 부담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맘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내가 그럴 거고.” “…….” 당황한 내가 입을 떡 벌렸다.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였다. 두 뼘 남짓한 거리를 두고 움직임을 멈춘 녀석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하늘에 있던 별이 그곳에도 있었다. 멍하니 넋을 빼고 있는 나에게 녀석은 봄의 새순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와.”
무협지 배경 시대에 환생했다. 외로웠던 전생과 달리,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현생이 정말 좋다! 그렇게 새롭게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달갑지 않은 불청객 한 명이 불쑥 일상을 파고든다. 상대는 재수 없고 무뚝뚝한 객식구, 영호량. ……뭐, 자세히 보니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니라서 어찌어찌 남매처럼 지내게 됐지만, 알고 보니 이 녀석은 전생에 읽었던 무협지의 악당 남조였다. 그것도 의붓어머니를 독점하기 위해 배다른 동생인 남주를 죽이려다 오히려 자신이 죽게 되는 아주 질이 나쁜 놈! 평온한 내 일상과 소중한 가족들을 지키려면 이 녀석을 멀리하는 게 당연한데…… 어째서 나쁜 놈처럼 보이지 않지? 나한테는 왜 이렇게 치대는 거고? 이 녀석을 살짝 고치면…… 괜찮지 않을까? * * * “누가 다가오는 게 싫다고 했지?” “!” 나는 숨을 딱 멈췄다. 몽환적인 기분이 싹 가시고 현실감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나는 꼼짝도 못 한 채 눈만 아래로 굴렸다. 감히 녀석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녀석이 담담히 말을 이었다. “그 말은…… 포기하라는 거지?” “……그래.” 사탕 과자를 꿀꺽 삼킨 내가 가까스로 대답했다. 그러자 녀석이 태연하게 말했다. “난 기다릴 건데.” “……뭐?” 내가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녀석이 얼굴을 돌려 나를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포기만 답이 아니야. 부담 주지 않으면서 상대의 맘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지. 내가 그럴 거고.” “…….” 당황한 내가 입을 떡 벌렸다. 녀석은 입을 다물고 자신의 얼굴을 내 쪽으로 천천히 기울였다. 두 뼘 남짓한 거리를 두고 움직임을 멈춘 녀석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녀석의 눈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어찌 된 일인지 하늘에 있던 별이 그곳에도 있었다. 멍하니 넋을 빼고 있는 나에게 녀석은 봄의 새순처럼 싱그럽게 웃었다. “그러니까, 천천히 와.”
라펠가르트 왕국의 아름다운 왕녀, 엘레노어. 성국의 피 또한 이은 그녀는 왕국의 왕위 후계자 중 하나였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건 오라비였고, 그녀에게는 모욕적인 혼처가 내려진다. 왕의 충신으로서 작위를 받은 비천한 태생의 남자, 데클란. 하객들의 탄식이 가득 찬 예배당에서 혼례식 당일, 예배당 문을 연 그는 피 묻은 갑옷 차림이었다. 엇갈린 기억과 가슴속에 묻어야만 했던 한 사람. 청보랏빛 눈과 마주한 데클란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절대 놓치지 않아요.” 어떤 지옥이 기다린다고 해도, 엘레노아 당신이 없는 세상만큼 끔찍하진 않을 테니. “그러니 제발 가지 마세요. 저를 버리지 마세요.” “데클란. 좋은 기억만 가지고 떠날 수 있게 해 주세요.” 나에게 남은 기쁨과 행운, 행복이 있다면. 바라옵건대 신이여 모두 그에게 주소서. 더 이상 나에겐 필요가 없답니다. 이미 그에게 모두 받았으니까요. 제 길을 잃은 채 얽혀 들던 운명이 다시 요동치고. 타락한 성국의 거대한 음모가 손을 뻗기 시작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