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두겠습니다. 회사도, 전무님과의 관계도요.” 처음에는 실수였던 상사와의 하룻밤. 지한과의 관계는 빚에 허덕이는 수민의 유일한 도피처였다. 그의 약혼 소식을 듣고 제 마음을 깨닫기 전까지는. “전무님을 좋아해서……, 일도 관계도 더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세요, 그럼.” 사직서에도, 제 고백에도 동요 하나 없던 그였기에 이대로 떠난다 해도 그냥 보내 줄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데. “고작 2억이 없어서, 스스로를 팔려고 했던 겁니까.” 위험으로부터 그녀를 도와준 지한은 뜻밖의 제안을 해 온다. “팔 거면 나한테 팔죠.” 차갑게 흥분한 그의 눈이 족쇄처럼 수민을 옭아 맸다. “조건은 단 하나, 나를 떠나지 않는 것.” 그렇게, 제 심장을 쥐는 올가미에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여전하구나, 너는.” 이직한 회사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한때 남매처럼 지냈지만 이제는 완전히 남이 되어 버린 그, 서정후를. “이따가 끝나고 둘이서 한잔할까.” “……내가 왜.” 이십 대였던 그때처럼 다소 가볍고. “왜라니. 섭섭하게.” 조금은 삐딱하고. “다 컸는데 오빠랑 술 한잔 정도는 괜찮잖아.” 그리고……. “안 그래? 설아.” 거리낌이 없었다. *** 그때의 기억도 어리석었던 감정도 시간이 흘러 흐려졌다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나는 여전히. 그리고. “한 번도 설이 널 잊은 적이 없다면, 믿을래?” 그도 여전히. 나를 만나고 비로소 겨울이 끝났다는 사람. 다가오는 봄이 마냥 두렵기만 한, 나. 우리에게, 뒤늦은 봄이 올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