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 님은 정말 벌을 받으셔야 해요.”사내는 진심인 듯했다. 겁먹은 저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한 번도 경험 없는 총각을 이렇게 만들어버리곤 일 년을 도망치셨잖습니까. 그런데 또 어딜 내빼시려고.”“……도망이라뇨?”연은 제게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몰랐다.그르릉. 그의 목구멍에서 짐승이 흘릴 법한 소리가 흘러나왔다.양잿물이라도 들이부은 양, 진득한 것이 끓는 소리.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소리기도 했다.“이제 제대로 받아들이실 준비가 되신 것 같습니다.”온 방이 짐승 냄새로 진동하고 있었다. “착하게 제 짝이 되시는 겁니다.”아주 오랫동안 기다린 만큼, 그는 모든 일을 아주 착실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제대로 할 생각이었다.서툴고 어린 제 여자를 살살 달래 뼛속까지 샅샅이 발라 먹을, 이 밤의 시작을.(*본 작품은 15세이용가로 개정되었습니다.)
짐승의 피가 지배하는 제국, 판테아. 혈통의 순수함이 곧 권력을 보장하고, 약자는 그 발끝에 짓밟힌다. 권력의 정점에 선 붉은 사자 수인, 하데온 라크 공작 앞에 작고 가녀린 인간 여자가 나타난다. 사교계에서 문란한 추문으로 유명한 여자 엘리시아 펄만. 그녀는 자신을 그의 정부로 삼아 달라 청하고, 신체 비밀을 대가로 계약을 제안한다. “너… 이 빌어먹을, 대체 정체가 뭐야.” “보시다시피, 제 살결은 수인들을 흥분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하데온은 이용당하기 위해 기꺼이 사자 굴 속으로 걸어 들어온 인간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며 조건을 내건다. *** “내 정부가 되는 동안 다른 사내를 만나지 않겠다, 이 자리에서 신 앞에 맹세해.” “아, 알겠어요.” “아니지.” 하데온이 손에 쥐고 있던 엘리시아의 미사포를 건네주며 싱긋 웃었다. “정식으로, 맹세해. 저 앞의 신에게. 마침 이곳이 교회니.” “매, 맹세를요?” 교회 안에 끼익거리는 낡은 의자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 엘리시아 펄만은.” “…나, 엘리시아 펄만은….” “오늘부로 신께서 짝지어 주신 사내 하데온 라크를 나의 불법적인 정부로 맞아.” “오늘부로… 예?” 엘리시아가 뭐라 항의하기도 전, 낮고 힘 있는 음성이 텅 빈 예배당 안을 울렸다. “나, 엘리시아 펄만은 오늘부로 신께서 짝지어 주신 사내 하데온 라크를 나의 불법적인 정부로 맞아 이 사내가 기쁠 때나 뭣 같을 때나, 건강할 때나 병신 같을 때나, 부유할 때나 개털일 때나, 조건 없이 울어 주며, 죽음이 갈라놓을 때까지 그의 소유가 될 것을 신 앞에 맹세합니다.” 일러스트: Dd
*이 소설은 가상시대 환조국을 배경으로 한 로맨스 소설로, 역사적 사실 등이 실제와 다릅니다. 예비 부마의 화촉(華燭) 궁녀로 간택된 온. 하룻밤을 검증하고 버려지는 패. 살아남아도 첩으로 독수공방, 최악의 경우 왕실의 치욕으로 도륙당할 운명. 하지만 공주의 남편과 첫날밤을 보낸 후, 온에게 떨어진 청천벽력. “앞으로 네가 공주가 되어 안방마님 행세해 주렴.” 졸지에 안방마님이 되어 버렸다. 궁녀 생활 풍월과 짬밥이 어디 가지 않는다. 기울어 가던 99채 기와집 살림살이가 세상에서 제일 쉽다. “공주님, 아니, 마님이 오신 후부터 잡초마저 벼가 되는 듯합니다!” “마님 덕에 이 집이 살아나고 있수다!” 근검과 청빈을 지조로 삼던 가난한 심가. 그러나 온이 마님 행세를 한 후로 부처님 손바닥에라도 앉은 듯 불티나게 가세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그대를 이리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더 수상한 건 부마 남편이다. “약속하시는 겁니다, 부인. 하늘이 무너져도, 태풍이 불어도, 홍수가 들이닥쳐도 손끝 하나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안방에서 호사롭게 앉아 술상에 고기 바치는 대로 잡수시며 가산을 흥청망청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습니까?” *** “한 시서에서 이르기를, 한 줌의 인연으로 천생을 맴돌아 다시 만날 그날을 달빛에 묻었노라는데….” 온의 관자놀이에 입술을 붙인 채 의겸이 자기 자신에게 읊조리듯 중얼거렸다. 컴컴한 어둠 속에 보이는 사내의 목덜미가 온통 붉었다. “…혹여 바람 불면 임 소식이 실려 올까, 달 뜨면 임 얼굴이 비칠까.” 그 순간 의겸은 전생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내게서 도망 못 칩니다. 그 어디로도.” 심지어 죽음조차도. 이젠 그대가 내게서 도망치는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화촉(華燭) 궁녀: 공주의 혼인 전 신랑의 건강 상태, 신체적 결함 유무, 성격, 잠자리 습관 등의 사전 검사를 위해 부마와 첫날밤을 미리 치르는 궁녀. 일러스트: 이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