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인은 망설임 없이 마당 한가운데 놓여 있던 하얀 가마에 올랐다.그녀를 모시던 이들이 비가 내리는 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여인이 마지막 명을 내렸다.“가자.”그녀를 태운 가마는 늦가을 차가운 빗속에 궐을 나섰다.열일곱, 어린 왕비가 폐비가 되는 오욕을 뒤집어쓴 날은 하루 종일 비가 내렸다.폐비가 되어 좁은 사저에 갇힌 지 수 해가 지났다.왕은 희진의 처소에 방문했다. 그의 눈에 시퍼런 날이 섰다.희진의 사저에는 쌀 두어 줌, 지긋지긋한 감 그리고 감자 몇 개와 콩 한 바가지가 전부였다.“감나무가 없었다면 국모였던 이가 아사했다 실록에 남을 뻔하였구나.”* * *“안주는 안 주시오?”그의 말에 중전이 전을 하나 집어 왕의 입으로 가져갔다.왕이 그것을 베어 물며 말했다.“나는 다른 안주가 먹고 싶은데.”“예?”중전이 주안상의 안주들을 바라보자 왕이 갑자기 그녀를 끌어당겼다.“중전, 내가 먹고 싶은 안주는 그곳에 없소.”왕이 그대로 중전의 입술을 머금었다.중전의 입에서는 정과의 단맛이 났다."
후작가의 어린 후계자인 베아트리체는 어미가 목숨으로 지켜내고자 한 자신의 자리를 당당히 지켜내야 했다. 그리고 단 하나의 사랑 또한 그러했다. 외로운 베아트리체 삶의 빛이자 사랑이었던 피에르와의 가슴 저미는 이별 그리고 재회. *** “정말 나여도 괜찮겠나? 베아.” 눈물이 가득고인 눈으로 베아트리체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 아픈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굴복하지 않는 주인공들의 이야기. “저기가 피에르와 우리의 아이들이 살아갈 땅이군요.” 베아트리체의 그 말이 피에르의 가슴 속으로 파고들었다. 모진 고난과 시련 속에서도 서로를 향한 사랑을 놓지 않은 베아트리체와 피에르. 아침에 눈을 뜬 베아트리체는 새 짓는 소리에 창을 열었다. 베아트리체는 나신을 얇은 시트로 감싸고 창문으로 다가갔다. “베아, 이런 모습은 내 심장을 멎게 해.” 피에르가 베아트리체의 몸을 감싼 침대 시트를 그녀의 품에서 떼어냈다. 베아트리체의 발밑으로 시트가 떨어져 내렸다.
“복사꽃 도령이 이곳에 오면 밥을 줄 거라 했어요.”“복사꽃 도령이 누구냐?”“있어요. 복사꽃 닮아서 아주 어여쁜 도령이.”돌아선 율의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젊은 여인이 있었다. 젊은 여인이 혼자 주막에 오는 것이 좀 의아해서였을까 그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여인에게로 향했다. 장옷 사이로 보이는 것은 까맣고 그린 듯 고운 눈썹이었다.왠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시선이 가던 그와 여인의 눈이 마주쳤다. 조금 전 본 가여운 아이들로 인해 눈에 화가 서려 있던 율의 강렬한 눈동자와 마주친 까만 눈동자는 투명하다 싶은 생각이 들 만큼 맑았다. 얼굴도 온전히 확인한 것이 아닌, 눈만 보고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경험은 낯설고 당황스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