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적으로 죽었지만 마왕 덕에 두 번째 생을 얻었다. 복수? 성공? 그런 건 관심 없다. 일레니아는 그저 마왕에게 반했다. 나의 구원자. 악랄하고도 영원한 나의 사랑. 어떻게든 마왕에게 안겨 볼 생각인데, 문제는 이 남자의 철벽이 어마어마하다는 것. “안아줘. 한번만. 응?” 애교나 애원 따위는 당연히 소용이 없고. “이건 어때? 안고 싶지?” 몸으로 유혹했더니 애꿎은 곳에서만 날파리가 꼬였다. 선물세례도 안 먹히고, 협박하고 덤벼봤더니 코웃음 치면서 마왕성 문을 걸어 잠갔다. 칫. 결계인가. “내가 인간 따위를 사랑할거라고 생각하나. 어리석은 짓 그만하고 돌아가. 일레니아.” 일레니아는 그런 순간들이 좋았다.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이나마 마왕이 자신을 바라봐주는 것이. 낮고 나른한 음성으로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좋았다. * 절대 이루지 못할 짝사랑이란 거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끝이 오리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주교한테 들켰어. 내가 마왕 쫓아다니는 거.” “…….” “결혼해주지 않으면 마계의 벽을 허물어버리겠대.” “…….” “어쩌지? 나 일단 주교랑 결혼 좀 해야 될 것 같은데.” “…….” “그래. 어차피 당신은 나 안 좋아하니까 상관없겠지.” 아무리 마왕이 매정해도. 평생 답 없는 외사랑이더라도. 지치지 않을 수 있다고 확신해왔는데 일레니아는 어느 순간 온 마음이 걸레짝이었다. 일레니아는 난생 처음으로 울면서 돌아섰다. 그때조차 마왕은 일레니아를 붙잡지 않았다. 예고에 없던 벼락이 내리쳐, 주교가 살던 신전이 무너져버린 건 바로 그 다음날이었다.
동료와 연인에게서 비참하게 버림받았다. 그들의 죄를 대신해 처형장에 끌려온 리엘라를 구한 것은 황제 헤르한이었다. 그렇게 황제에게 많은 것을 빚지고 많은 것을 내어주었지만, 그뿐이었다. 리엘라는 자신이 감히 그의 세상을 흔들게 될 줄은 몰랐다. “내겐 네 마음이 들리지 않아. 신은 꼭 내가 가장 간절히 바라는 것만 앗아가더군.” 황제가 저주받은 능력자였다는 걸 알기 전까지는. 그리고. “리엘라 블리니테. 판정 결과, 상급 구원자의 자질을 지닌 성녀입니다.” 자신이 그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의 성녀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내 장래 희망은 누군가의 ‘아내’ 같은 게 아니야.” “베, 벨이 아내가 안 돼? 우리 마을의 여자아이는 다 ‘아내’가 되는 거랬는데……, 그러면?” “나는 그냥 내가 될 거야. 베르니세 데메지에르!” 더 정확히는 고귀한 베르니세 데메지에르. 유명한 베르니세 데메지에르. 제국 최고의 부자 베르니세 데메지에르가 될 거다. 몇 년 뒤. “마물 악타이시르를 무찌른 용사 베르니세 데메지에르에게 제국 영웅 훈장을 수여하노라.” 거봐! 내가 된다고 그랬지! *** 영웅이 되어 만인의 선망을 한눈에 받게 되었다. 명예가 하늘을 찌르고 돈은 썩어날 정도로 쌓여 갔다. 내가 이룩해 낸 평화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수상한 남자와 마주쳤다. “누구세요?” “…….” “너 설마…….” 그럴 리가 없지. 걔는 용이었잖아. 심지어 내가 죽인. 아니, 죽은 척 살기로 해 놓고 이제 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