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부인….” “보고 있자니 숨넘어가겠어요. 도대체 뭘 하는 건지 궁금해서 원. 괜히 정원으로 자리를 마련했나 봐요.” “응접실은 아무래도 보는 눈이 많아 불편한가 싶어 이번엔 둘만의 자리를 마련한 거 아니오. 부인께서 분위기를 좀 바꿔보자며 먼저 얘기하시고서는….” 공작부인이 아름답게 가꾼 정원엔 제국에서도 이름난 미남미녀가 우아하게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림 같은 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걱정 가득했는데 마음 졸이며 지켜본 것과는 달리 눈치채지 못한 진실이 존재했다. 바로 청회색 머리칼의 사내와 은빛 머리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여인은 고개를 돌려 서로를 마주하고 있지 않았을 뿐 티타임 내내 한 손으로만 차를 마셨고 멀리 있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얼굴이 붉은 노을처럼 붉게 물들어 있었다는 걸 말이다. 엘리나 디엘 폰 그란시아와 이안 루스트 딘 카이센은 남들 몰래 연애를 하는 중이었다.
성 대감 댁 아가씨가 시전 구경을 나왔다 쓰러졌다는 이야기로 한성 바닥은 시끌시끌.송장처럼 누워 주변 이들의 가슴을 애태웠던 아가씨가 드디어 눈을 떴을 땐말괄량이처럼 밝기 그지없던 모습 온데간데없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채였다.성 대감댁은 혼기 찬 여식 흠이라도 잡힐까 양주에서 겨울을 나게 한다.그곳에서 여식 삶을 뒤흔들 기이한 사내를 마주하게 될 줄도 모르고.한 떨기 꽃처럼 나긋한 눈만 내놓은 채, 가리개로 얼굴을 가린 묘한 사내.“백연. 그리 부르면 되오.”그녀는 사내의 시선이 잠시 닿았던 목덜미에 손을 댔다.사내의 날카롭던 시선은, 꼭 투명한 물에 먹 한 방울이 떨어져 퍼지는 듯한 감각이었다.괜스레 자신의 온몸 구석구석이 짙은 먹색으로 물들 것만 같은 기이함.“내일 정자에서 봬요.”잔망스러운 행동에 이리저리 휘둘리면서도 사내는 그녀를 피하기 바쁘고.“오지 않으려 했소.”“여인의 마음을 한순간에 뺏는다는 소문과는 달리 말이 없으시네요.”“그, 그것이 기생이 아닌 여인과는 대화해 본 적이 없어서….”여인을 홀린다는 추문과 달리 사내는 볼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첫 만남의 사위스러움도 잠시, 그런 사내의 태도는 적막했던 그녀에게 호기심으로 다가온다.그녀는 영문 모를 사내에게 기우는 마음을 멈출 수 없는데….
붉은 장막이 쳐진 붉은 정자. 필시 정자임이 맞았으나 풍경을 볼 수 없게 붉은 장막으로 꼭꼭 감싼 기이한 곳. 한 사내가 여인의 턱을 우악스럽게 잡아채 휘휘 돌리기 바빴다. 갑작스러운 거친 손길에 여인의 눈이 크게 떠지든 말든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기이한 곳보다 더 기이한 사내의 눈빛이 일렁였다. “모르느냐? 이 거둬질 리 없는 붉은 장막 안에 너와 나 둘뿐이란 것을 말이다.” 늘 아르바이트로 뛰어다니기 바빴던 지안이 서울 한복판에서 온천지 검붉은 곳에 떨어진 지도 몇 달. 굳이 찾아와 물끄러미 바라보는 눈빛, 입을 뗄 때마다 괜스레 살갗이 아리는 매서운 기운. 사내의 시선이 닿을 때마다 벌벌 떨기 바빴던 지안은 어느 날 짤막하게 말을 뱉고. “놔주세요….” 언제나 앙다문 입술 사이로 숨도 못 뱉던 여인이 자그맣게 목소리를 낸 순간. 기이한 사내의 눈빛은 일렁이다 못해 그녀를 덮칠 듯 깊어졌다.
“우린 손은 언제쯤 잡아 봐?”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는 언제나 초조했어. “손부터 잡을래, 입 먼저 맞출래. 아, 함께면 더 좋고.” 얄궂은 눈웃음엔 늘 불안이 배어 있었어. “도하경. 키스해도 돼?” 올라간 입꼬리는 뭐랄까……. 그래. 아슬아슬해 보였지. 알면서도 항상 외면했어. 널 무시했어. 영영 변하지 않을 줄 알았고 그래야만 했으니깐. 근데 우리 앞에 조금 다른 겨울이 찾아왔어. “도하야…. 이도하.” 난 어제도, 오늘도 혼자였고 아마 내일도 혼자일 거야. 그러니 오늘만은 네가 날 감싸 줘. 언제나 내게 향해 있었던 곧은 애정으로 날 품어 줘. 나쁜 년인 거 알지만, 오늘만 기댈게. 오늘따라 가슴 사무치게 외롭거든. “도하경. 이제 너 못 벗어나.” 붙들려 있는 듯하지만, 붙든 건 결국 자신. 도하야, 미안. 너의 수많은 날 중 하루를 훔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