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비천한 신분이라는 이유로 버러지 취급받던 앤지 딜리언. 그녀는 팔려가듯 망나니라 소문난 테라 테리시스 제2황자와 결혼했는데, 테라는 앤지를 차가운 황궁에 홀로 내버려 둔 채 남부로 떠난다. [나를 찾지 않길 바라.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르거든.] 황가 사람들은 수군거리고 뒤에서 욕하기 바빴지만 그녀는 상관없었다. 스스로 가치를 증명해 보이면 되는 일이니까. 3년 뒤, 그녀를 두고 떠났던 남편이 돌아왔다. “좋아해. 너는 나를 어떻게 생각해?” “전 저하가 미워요.” “솔직해서 좋네.” 남편의 뜬금없는 고백에 정신없는 와중에 앤지를 더 혼란스럽게 한건 자신의 편이라고 믿고 의지했던 4황자 에스테반의 고백이었다. “차라리 저를 형수님의 정부로 삼아 주세요.” 말도 안 되는 4황자의 부탁, 제멋대로 행동하는 2황자의 고백. 그리고 이 모든 걸 견뎌 내야 하는 그녀의 삶, "넌 나의 자랑이란다, 앤지." 그래도 나는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남아 있는 그런 삶을 살고 싶었다.
코스탄스 오르시. 해군 제독의 아들. 후작가 후계자가 날 좋아하는 거 같다. 한낱 공무원인 나를 왜 좋아하는지 모르겠으나, 그의 관심은 나에게 버거웠다. 그래서 직장을 포기하고 남쪽에 내려가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우, 우연입니다, 비비.” 수도에서 떨어진 남쪽 시골 마을, 한적한 카페에서 만났다고 하기엔 우연이 지나치다. * “왜 자꾸 도망가는 겁니까? 제가,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어떤 상황이어도 예를 갖추던 분이다. 상황이 급박해도 행동을 급히 하지 않던 사내였는데……. “……죄송해요.” “도대체 뭐가?” 내가 고개를 푹 숙이자 코스탄스는 초조한지 입술을 달싹거렸다. “……당신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아, 설마. “내가 당신을 계속 쫓아다녔던 이유. 난 비비, 당신이 생각한 것보다 더 진심입니다. 당신과 결…….” “경!” 다급하게 그의 말을 막았다. 코스탄스는 눈물에 젖은 눈을 크게 뜨며 날 바라보았다. “저한테, 저한테.” “…….” “청혼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요…….” 이윽고 코스탄스의 표정이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달달한 로판에 빙의했다. 공작 아들과 후에 결혼하는 하녀, 여주 리케로. 오만남에게 좀 휘둘리다가 사랑에 빠지면 해피엔딩 달성인 줄 알았으나, “까아아악! 도망쳐!” 유례없는 거대한 지진이 일어났다. *** 로판이 재난물이 된 후. “난 널 정말 모르겠어.” 원작의 남주이자 까칠한 공자, 데몬 가르세반은 겁이 많아졌고, “X 같은 재난물이 되기 전 그냥 너한테 고백이나 해버릴걸.” 다정할 줄만 알았던 서브남주, 아서 드힐은 적극적으로 마음을 표현했다. 그 외 접점이 없던 6명의 원작 인물과 나는 생존 동지가 되었다. “대피처가 있는 수도로 가는 게 어떻습니까?” “거긴 안전하답니까?” 다들 생존을 위해 협동했으나 내겐 이들과 다른 남다른 목표가 생겼다. ‘원래 삶으로 돌아갈 거야.’ 평범하고 굴곡 없었던 본래의 삶으로.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는 이 빙의에 비밀이 있음을 깨달았다. 나는 ‘무언가’에 의해 이곳에 끌려왔다.
“날 그냥 잊어 줘.” ⠀ 자신을 잊어 달라던 소꿉친구가 5년 만에 고향에 돌아왔다. [헬리안의 새 영웅] 그것도 유명 인사가 되어서. 근사한 얼굴에 다부진 몸, 심지어 백작위까지. “너네 봤니? 클레어 아가씨랑 단테 경이 나란히 걷는 모습!” “완벽한 한 쌍이었어!” 내가 우러러보던 아가씨마저도 단테에게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그렇게 소꿉친구는 나와 동떨어진 사람이 되었다. * “왜 자꾸 피해?” 단테가 집요하게 따라오며 물었다. 평소 무뚝뚝한 어투에는 왜인지 모를 다급함이 묻어 있다. “안 피했… 어요.” “거짓말. 내 눈, 못 보잖아.” 뒷걸음질 치던 나는 등과 부딪친 차가운 벽에 움찔했다. 도망칠 곳이 사라졌다. “그리고 왜 존댓말이야?” “그, 그게… 이제 신분도 다르고, 작위도 얻으셨고….” 그 순간, 단테가 내 뺨을 감싸 쥐어 시선을 꽉 붙잡았다. “그래서 뭐가 달라져? 너와 내 사이도?” 화가 난 그의 푸른색 눈동자가 보였다. 표지 일러스트: 코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