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일곱, 스물여섯. 서른. 어둠의 틈새를 비집고 집요하게 새어드는 빛의 조각처럼, 너는.잊혔던 나의 시간 속으로 파편이 되어 스며들었다. “연애나 할래요?”마치 기적과도 같았던 너와의 만남은….불장난을 저지른 어린아이처럼 나를 달뜨게 했고.“누나는 2주. 나는 그보다 하루만 더.”“…….”“사는 게 지루한 사람들끼리. 딱 그만큼만. 만나봐요.”“그리고?”“그리고….”잔잔한 바람에도 휘청이듯 그렇게 나는. “뜨거워지면 더 좋고.”흔들리고 말았다.“우리가 뮌헨에서 처음 만난 사이라는 게 믿어져요?”밤하늘에 별을 헤아리는 일이 이렇게도 낭만적일 수 있을까 싶을 만큼….나의 손끝을 따라 밤하늘에 선을 그으면, 너는 그 길을 따라 별을 헤아렸다. ‘내게 꽃이 되어줘요. 나는 그 꽃이 때가 되면 피고, 지고 또다시 피울 수 있도록, 집 같은 나무가 되어줄 테니까.’‘이대로 시간이 멈춘다면…. 참 좋겠어.’ 어른의 동화일지도 모를 이 환상을 믿고 싶었다.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 그딴 거 말고. 절대 다시 만날 수 없는 악연 말고…. 아쉽지만 잊을 수 없고, 절대 떠날 수 없는. 결국 때가 되면 제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는 계절이 되고 싶었다. “우리가 만날 때 말이야.” 차희는 떨어져 나온 강재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우리…. 딱 잘라 너와 나. 칼같이 선을 긋던 저와는 달리 강재는 여전히 우리를 우리라 말한다. “계절이 지날 때마다, 아쉬워하면서 또 다른 기약을 하고 설레고. 기다렸던 거 생각나?” 생각난다. 강재의 물음에 차희도 지난날을 떠올렸다. 일 년, 열두 달. 언젠가 사계절이 뚜렷했던 그 날에 했던 약속을 말이다. “연애라는 게, 참. 사람을 희한하게 만들어. 지키지도 못할 약속들이 수만 가지인데도 꼭 지켜질 것처럼 사람을 기대하게 하니 말이야.” 그래, 떨어지는 낙엽 하나로도 수만 가지의 사랑을 나눌 수 있었던 그때의 저와 나는. 세상의 모든 낱말을 아름답게 풀어놓고 언제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막연한 약속을 하고는 했다. “그런데 핵심은 그거야.” 강재를 바라보던 차희가 입술을 달싹였다. 자그마한 그 입술을 강재는 놓치지 않았다. “혹시라도 우리가.” 꾸역꾸역 밀어 넣고 방문을 꽝 하고 닫아버린 것처럼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그고 있었는데…. “일방적인 통보로 인해 이별하게 됐을 시.” 차희의 건넛방에서 인제 그만 문을 열어달라 아우성치고 있다. “나는 네게 요지 진술할 권리가 있고 너는 내게 변론할 기회를 준다.” 판도라의 상자. 그 열쇠를 수년간 간직하고 있던 차강재. “불합리하게 확정 판결된 그 사안에 대해 재심청구를 하는 바야.” 그가 고개를 치켜들고 입꼬리를 올린다. “5월의 공릉은. 라일락이 아주 예쁘게 피는 계절이라 했지. 은차희.” 서서히 일그러져가는 차희의 낯빛이 붉게 상기된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