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가 너무 길다
하루가 너무 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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쉴 틈 없이 사랑해주세요

“사실은 오빠 옛날부터 짝사랑 했었어요.”5년 만에 다시 마주친 친구 오빠, 시혁에게 술김에 고백한 다혜. 그동안 인사 한 번 받아준 적 없던 그가 갑자기 달콤한 제안을 한다.“우리, 대화 말고 다른 거 할래?”결국 다혜는 지긋지긋한 짝사랑을 정산하고자 이성보다 본능을 따르기로 했다. “잊으면 그만인 하룻밤이야.”“…….”​다혜가 망설이는 사이, 시혁의 말이 비수가 되어 심장에 날아와 박혔다.​​“선택은 네가 하는 거야.”*모든 게 끝날 것 같던 뜨거운 하룻밤 이후, 시혁은 자꾸만 다혜 주변을 맴돈다.“그래서 할 거야 말 거야?”​“뭘요?”​“연애.”​“오빠 저한테 갑자기 왜 이래요? 이런 게 재미있어요?”​“말했잖아, 너한테 흥미가 생겼다고.”​“흥미가 좋아하는 감정은 아니잖아요.”​“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지. 혹시 모르지 내가 널 좋아하게 될지?”냉철하고 오만한 대한민국 대기업 1위 한성그룹 부사장 김시혁과 여리지만 당찬 신인 작가 최다혜. 과연 두 사람은 쉴 틈 없이 사랑할 수 있을까?

온전하지 못한 관계

미주는 테이블에 가지런하게 놓여 있는 신문 1면을 혼란스럽게 바라봤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지만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심장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는 기분이었다.[셀리 미란드, 카일 제럴드와 결혼 발표.]맞다. 카일 제럴드는 강미주를 사랑하지 않는다.절대 변하지 않는 현실에 미주의 입매가 슬프게 휘어졌다. 이제는 정말 그의 곁을 떠나야 할 때다. 수십 번 수천 번 고민했다. 혼자서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을까. 그가 아이의 존재를 알면 어떻게 반응할까.“나 사실, 아이를 가졌어.”그를 떠나려면 솔직히 털어놓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일자로 굳었다. ***“어디 한번 도망가 봐. 내가 얼마나 돌아버릴 수 있는지 나도 알고 싶거든.”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이 미주의 마른 입술을 삼켰다. 모조리 집어삼킬 듯한 격렬함에 그녀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밀어내야 하면서도 금세 그의 체향에 취해 밀어내지 못하는 자신이 한심스러웠다.‘온전하지 못한 관계.’미주는 카일과 자신의 관계를 그 한마디로 정의하며, 또 한 번 깊은 절망에 빠졌다.

나를 가두다

그와의 만남은 아트홀에서 만난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모든 게 그의 계획이었고, 거짓이었다.“우리가 정말 예전에 그저 스쳐 지나간 사이가 맞아요?”“아니라면 지금 우리 사이가 달라지기라도 해? 그럼 아니라고 정정하지.”그녀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고 있었다. 야속하게 그녀는 그와 함께 했던 모든 순간을 지우개로 지워 없앴다.***“내 이름.”다시 찾은 그녀를 놓지 않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면 새로운 기억을 심어주면 된다.그때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그녀가 행복할 수 있도록.그의 음성이 덤덤해졌다. 손목을 붙잡았던 손은 아래로 내려가 허리를 감쌌다.“다시 불러 봐. 그럼 놓아주지.”자연스럽게 두 사람의 몸이 밀착됐다. 그녀를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처럼 열기를 띤 눈이 번뜩거렸다.“네 입에 나 말고 다른 남자 이름을 담는 일은 없어야 할 거야.”그녀를 향한 소유욕이 그의 정신을 지배했다. 지한은 숨기지 않고 정복욕을 드러냈다. 말을 끝낸 그가 허리를 더욱 바짝 끌어당겼다.감히 도망갈 수 있으면 가보란 듯이. 그러고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진주는 마른 입술을 축이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강한 열기에 자석처럼 이끌리고 있었다.자신을 잊은 여자를 갖기 위해 돌아온 남자와 스스로 자신을 가둔 여자의 아슬아슬한 로맨스 이야기.

일그러진 관계

흉악하고 포악하다 못해 짐승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소문이 무성한 HG 그룹의 사생아 강민혁.   언론이나 공식 석상에도 나타나지 않은 미스터리 인물. 그 베일이 벗겨진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쯤 하는 게 좋을까요.” “네? 하지만 저는…….” “나는 한지연 씨가 아닌 한다현 씨와 결혼이 필요해요.” 다현은 이해할 수 없었다. 동생 대신 나간 맞선 자리에서 그가 왜 자신을 원해 하는지. 그리고 알지 못했다.  2년 전, 이미 그와 관계가 일그러졌다는 걸. 다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각인을 새기다

“네 법적인 남편은 박지훈이 아니라 권수혁이라는 사실을 잊고 사는 거지? 다시 깨닫게 해줘야 하나?” “아, 알고 있어요. 수혁 씨 손 좀 놔주세요.” “내 아내 손을 잡는데 허락 맡고 잡아야 하나?” 사납고 거친 손에 붙잡힌 얇은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잔혹한 남자였다. “허락은 박지훈이 네 머리카락을 서슴없이 만지기 전에 네가 받아야 하는 거야.” 보고와 함께 건네받은 몇 장의 사진 중에 지훈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만지고 있는 걸 본 수혁은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다시 한국행 티켓을 끊었다. “가증스럽게 어디서.” 그의 눈이 낮게 가라앉으면서 번뜩거렸다. “내가 한국에 없다고 내 눈에 벗어났다고 생각했어?” 손에 쥐었음에도 이리저리 빠져나가려고만 하는 그녀를 어떻게 완벽하게 가두어야 할까. 너는 내 구원이자 나락이다. 그녀를 향한 집착이 겨우 이성을 유지하던 그의 정신을 갉아먹는다. *** 빠르게 치닫던 거센 움직임이 뚝 멈췄다. 그가 헛웃음을 터트리더니 낮게 비소했다. “하진아, 네 머릿속에 새겨놔.” “민하진은 권수혁의 아내라는 걸.” “날 살린 걸 평생 저주하면서 내 곁에서 살아.” 눈가에서 나온 물줄기가 관자놀이를 타고 내려갔다. 하진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각인처럼 새겨진 흉터가 오래되어 아플 일이 없는데도 뜨겁게 아려왔다.

아늑한 늪지대

“감히 너 따위가 날 물고 도망가?” 욕망과 분노가 섞인 음성은 당장이라도 그녀의 목을 비틀 것 같았다. “도망가면 잡히지 않을 줄 알았고?” 그녀를 우악스럽게 붙잡은 커다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버릇을 다시 들여놔야겠어.” 연의 입에서 애원이 터져 나왔지만, 남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와의 관계는 그가 끝을 내야만 했다. 그가 끝을 말하기 전에는 도망을 가더라도 지금처럼 잡힐 것이다. 하지만. “내게서 벗어날 생각하지 마.” 섬뜩하면서 경고가 담긴 어투에 연은 입술을 피가 흘러나오도록 세게 깨물었다.  이토록 잔인한 남자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사랑해서는 안 되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녀의 가슴은 이성을 거슬렀다. 그는 한번 빠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지대였다.

아찔하게 파고드는

“은하야. 그동안 재미있었지?” 그윽하면서도 낮게 깔린 목소리에 은하는 숨을 멈췄다. 아닐 거야. 현실을 부정하는 눈빛엔 공포가 서렸다. 실마리만큼 희망이 공기가 되어 사라진다. 저를 당장이라도 집어삼킬 듯한 눈빛을 잊고 싶어도 잊지 못했다. 제 몸 구석구석을 핥고 빨았던 태진이 입가를 적신다. 두려움에 목이 콱 조여온다. “날 엿 먹이고 도망을 친 소감은 천천히 우리 집으로 돌아가서 이야기 나누자고.” “태, 태진 씨.” 제 가족을 몰살시킨 주범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태진이 다가오자, 은하는 아예 등을 돌리며 아이를 보호했다. “아, 안 돼요. 이 아이만큼은 안 돼! 절대로 안 돼!” “주은하, 네가 어떻게 발버둥을 치든지 넌 내 아이를 빼돌리지 못해. 지금도 봐봐. 내가 기어이 널 찾아냈잖아.” 그의 숨결이 귓가에 파고든다.  후, 일부러 귓가에 숨을 불어넣으며 비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감히 내 아이를 품은 채 종이 쪼가리 한 장 남겨놓고 사라져?  주은하한테 2년 동안 아주 제대로 물 먹었어.” 소름이 쭈뼛 돋는 동시에 그가 치아로 귓불을 살짝 깨물곤 핥아댔다.

손끝에 시린 유혹

“결혼기념일이 특별한 의미인가?” 시아는 그의 질문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생각에 빠졌다. 태혁은 자신의 감정을 알지 못한다. 특별하지 않다고 한다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작년 첫 결혼기념일 때처럼 흐지부지하게 넘어가고 싶지 않았다. 이젠 그에게 자신의 마음을 조금은 내보여도 되지 않을까. 시아는 고민 끝에 입술을 들썩였다. “저한테는, 특별해요.” 떨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막상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너무 부끄러워 그를 떳떳하게 바라보지 못하겠다. 시아는 말을 내뱉고 고개를 푹 숙였다. 투명한 유리컵에 물을 따르고 있는 태혁의 시선이 느껴진다. 태혁은 유리컵을 입에다가 가져다 대며 물을 목구멍으로 삼킬 때마다 툭 튀어나올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탁, 컵을 식탁에 내려놓은 태혁이 넥타이를 끄르며 가만히 서 있는 시아에게 다가갔다. “그래, 그럼 그 특별한 날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지.” 그가 손을 들어 고개를 숙이고 있는 그녀의 턱 끝을 붙잡아 끌어 올렸다. 서로의 시선이 뒤엉키면서 얽혔다. 시아가 말을 하려고 입술을 떼려는 찰나, 입술 사이가 벌어진 틈을 타 그가 그녀를 집어삼켰다.  결혼식장에서 가볍게 입술을 맞댔던 거와는 전혀 다른 입맞춤이었다. 시아는 눈을 감지도 못한 채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눈을 감고 있던 태혁이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풀린 눈을 뜨며 입술을 뗐다. 거칠게 머리를 쓸어넘긴 태혁의 낮게 깔린 음성이 시아의 귓가에 박혔다. “여기서는 안을 수 없으니까 침실로 가서 마저 해줄게.” 첫날밤은 물론, 결혼 생활을 하면서 안지 않았던 그였다.  시아는 부디 이게 꿈이 아니기를 바랐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 아래로 내려가며 눈이 감겼다. 그가 술에 취해 안은 밤에 운명의 수레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시아는 손에 쥐고 있는 스틱을 뚫어지라 바라봤다. 흔들리는 눈동자가 또렷하게 그어진 두 줄에 머물렀다. 비명이 터져 나오려는 걸 애써 목구멍으로 삼켜냈다. 매달 정확한 날짜에 하던 게 하지 않아 의아해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약국에 가서 임신 테스트기를 샀다. 아직 딱히 몸에 변화가 느껴지지 않아 의식하지 못했는데. “말도 안 돼.” 시아는 울음이 터져 나올 거 같은 걸 꾹 참으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선명한 두 줄. 임신이었다.

구속의 시작점

7년 만에 찾은 란마다 섬.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추억을 회상하기 위해 사라는 다시 란마다 섬으로 향했다.그곳에서 만난 과거의 인연, 류진하.불운이 닥쳐 오던 중에 만난 그는 사라의 유일한 구원이었다.그야말로 그녀에게 가장 크게 덮친 불운인 줄도 모르고.***“왜 계속 도망가려고 하는 거야. 매번 실패하면서.”진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혀를 찼다.“날 사랑하지 않아?”“그건 당신의 실체를 몰랐을 때야! 지금은…!”차라리 그의 실체를 모르는 채로 지냈더라면 좋았을 텐데.이곳 란마다 섬이 류진하의 손아래 있다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다시 돌아오지 않았으리라.“그래, 계속 발악해.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살결을 파고드는 차가운 목소리에 숨이 막혔다.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저 진하의 아래에 깔린 채 버둥거릴 뿐.제발 좀 놔달라는 발버둥은 오히려 그의 음심을 부추기고 있었다.“넌 내 시야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네가 이곳에 다시 온 시점부터.”차가운 그의 입술이 뺨에서 목덜미로 점점 내려갔다.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광기와 집착이 진득하게 붙어 있었다.“네 몸도 마음도 내 것이야.”표지 일러스트 By 메이비진표지 타이틀 By 타마

지독한 족쇄

“어때, 바람난 전 애인 다시 만나니까. 그 새끼한테 돌아가고 싶어졌어?”1년 사귄 애인과 친구의 배신. “말해. 내가 누구야.”복수할 생각으로 친구가 좋아하는 남자에게 접근했다.감당하지 못할 줄 알면서도 그에게 먼저 다가간 자기 자신을 욕했다. 그를 다시 만나기 직전인 두 달 전으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다.오만하고 다정한 것 같으면서도 차갑고 능글맞게 웃고,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는 남자가 도대체 뭐가 좋다고.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느새 그녀의 마음에 묵직하게 버티고 앉은 신재가 미웠다.하지만 정말 이제는, 보이지 않는 지독한 족쇄를 끊어 내야 했다.[본 작품은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작품입니다.]

스며들기 전에

“나는 아직 안 끝났어.”    내 부탁에 응해줄 리 없는 그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이미 그에게 길들여진 몸은 그가 원하는 대로 반응하고 있었다.  한계를 넘어선 몸이 버티지 못하고 부서질 거 같아서 흐느끼며 그를 불렀다.    “도련님……!”    도련님이라고 부를 때마다 민주혁의 얼굴이 굳어지는 걸 볼 수 있었다.    내 도련님. 앞뒤 생각할 겨를 없이 날 미치게 만들었던 도련님. 한때 내 전부였던 도련님.  나는 민주혁이 나를 바라봐주고 흥미를 가져준다는 거에 기뻐했었다.  엄마가 망가지기 전까지.    *    아련한 짝사랑? 웃기지도 않지.  모든 걸 잃어버리고 나서야 바보처럼 깨달았다. 사랑은 허무하고 가치 없다는 것을.  그는 이제 내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다.    “넌 예전이나 지금이나 내 거야.”    그에게 스며들지 않을 것이다. 스며들기 전에 완벽한 복수를 해줄 것이다.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되었을 때 다시는 나와 아이를 찾지 못하도록 떠날 것이다.  그가 날 버렸을 때처럼.    하지만 나는 알지 못했다.  우리의 재회가 그의 오랜 계략이었음을.

그의 곁을 떠나는 날

“오늘은 절대 울지 않기로 했잖아.” 하린은 거울을 보며 자기 자신을 다독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한심하게 콧물을 질질 흘리면서 울었지만, 오늘은 울지 않았다. 열여덟. 그를 처음 본 이후로 그가 세상의 전부처럼 느껴졌다. 은서네 집에 가고 싶다고 핑계 대며 윤재를 보러 갔다. 제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한때는 그도 저처럼 세상의 전부를 자신으로 생각하기를 바랐다. 솔직히 지금도 그를 바라고 있었다. 미련을 놓지 못하고 희망을 품는 자신이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변화하기를 기다렸지만, 그의 마음은 움쩍도 하지 않았다. 이미 뿌리를 내린 나무처럼 견고했다. 그를 만날 때마다 행복했지만, 외로웠다. 좋았지만, 지독하게 쓸쓸했다. 같이 있지만, 혼자 덩그러니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애석하게도 제 사랑은 결실을 보지 못했다. 제 사랑은 실패했다. 그는 제게 전부이자 사랑이었다. 그가 그토록 바라는 걸 이젠 들어줄 차례였다. 약속대로 1년째 되는 날이니 그의 바람을 들어줘야 했다. 제 짝사랑에 마침표를 찍는 날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서 사랑했으니까 후회하지 않아.” 그러니까 그 앞에서 절대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지 말자. 하린은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손이 덜덜 떨렸지만, 거울에 비친 여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 윤재는 눈두덩이를 가린 손을 힘없이 떨궜다. 그동안 그녀한테 했던 쓰레기 짓들이 슬로모션으로 지나갔다. 그녀가 바라는 대로 웃어 줄걸. 웃는 게 뭐가 어렵다고 웃어 주지를 않았던 걸까. 그녀한테 은서로 착각해서 안은 게 아니라고 말해 줄 걸 그랬다. 그랬다면 제게 폭삭 안기며 그 조그마한 입술로 사랑을 속삭였을 것이다. 윤재는 왜 자신이 하린을 종일 머릿속에서 떨치지 못하고 자신이 그녀한테 한 모진 짓을 되짚었는지 알 거 같았다. 내가 지금 후회를 하는 건가. 아, 후회하는구나. 그녀가 진짜 곁을 떠났다는 게 실감이 나니 비로소 깨닫는구나. 이렇게 그녀를 보낼 수 없었다.

짙게 물들다

“리아야.” 쌍꺼풀 진 깊은 눈매, 검은색이 아닌 회색빛이 도는 동공이 빛나자 리아는 그 안에 든 광기밖에 보이지 않았다. “봐.” 서늘하지만 부드러운 저음에 리아는 그 순간만큼은 그가 자신이 알던 동욱인 것 같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흥미를 담은 눈빛에 리아는 아랫입술을 이로 꾹 짓눌렀다. 동욱은 주저앉은 리아에게 손을 뻗었다. 하지만 리아는 동욱의 손을 잡지 않고 가만히 바라만 봤다. “저항하지 마.” 나긋하지만 강압적인 어투에 리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가 두렵고 무서워졌다. 처음 봤을 때처럼 공포감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도, 동욱 씨.” “죄책감 갖지 마. 마음도 약해지지 마. 너는 네 부모님 복수할 생각만 해. 더러운 건 내가 깨끗하게 다 치워 줄 테니까.” 리아가 괴로워하는 걸 보면서도 동욱은 희열감이 차올랐다. 그녀가 저로 인해 괴로워하고 슬퍼하는 게 제겐 짜릿할 정도의 쾌감이었다. 그녀가 저를 걱정하는 걸 보면 아픈 척이라도 하고 싶어졌다. 그렇기에 동욱은 리아 앞에서는 꽤 신사적이고 조신한 척 굴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이 그녀한테는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런 제 모습도 그녀가 받아 주기를 바랐다. 평생 속이고 살 수도 있었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확신했다. 그녀라면 자신이 더러운 오물이라는 걸 알아도 받아 줄 것이라는 걸. 세상에 이렇게 사랑스러운 존재가 또 있을까. 네 신경 세포 하나하나가 다 나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거였으면 좋겠다. “우리 공주님은 꽃길만 걸어.” 동욱은 말을 끝마치면서 입술을 벌려 리아의 입술에 포갰다.

낭떠러지

“너 사람 미치게 만드는 거 잘하잖아.” “…….” “엿 먹이는 것도 잘하고.” 잔뜩 비아냥거리면서도 저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혁준의 뺨에 손을 올렸다. 둘은 눈길로 서로를 붙들었다. 자기 뺨에 닿은 그녀의 손길을 느끼는 듯이 느릿하게 눈을 감은 혁준이 말을 내뱉었다. “그 재수 없었던 날이 아직도 꿈에 나와. 내가 수술대에 오르고 눈을 뜰 때까지 무슨 생각을 했는지 너는 죽어도 모르겠지.” 그가 눈을 뜨자 주황빛을 띠는 동공이 탁하게 물들었다. 그녀는 혁준의 뺨에 올린 손을 거두며 침묵했다. 4년 전에는 그가 다시 세상을 보기를 바랐다. 하지만 지금은 혁준의 멀쩡한 눈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와 다시는 얽히고 싶지도 않았고 사진마저도 보고 싶지 않았다. “넌 네가 밉다고 해도 아무 말도 안 하는구나. 예전에는 귀엽게 대들기라도 했는데 이젠 그러지도 않네.” “그래 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테니까요.” “그렇지. 이젠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난 널 놓지 않을 거거든.” 짙은 소유욕에 예서는 입술을 들썩이다가 다물었다. 그런 눈으로 나를 보지 마. 애정을 갈구하듯이 나를 보지 말란 말이야. 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 이상 우리 관계에 진전은 없을 것이다. 이건 그를 이용하려는 것일 뿐. 동생이 죽은 이후로 높은 낭떠러지에 우두커니 서 있는 기분이었다.  조금만 발을 삐끗해도 그대로 추락할 것 같은 나약한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견디며 악착같이 버텨 살아가고 있는 것을 그는 모를 것이다. “예서야.” 그의 세상과 제 세상은 너무나 다르니까. “네가 앞도 못 보는 나를 버리고 간 날을 말이야. 나는 그 말을 머저리처럼 믿고 기다렸잖아.” 서늘한 음성에 예서는 숨을 죽였다. 목에서 느껴지는 숨결이 숨통을 조이는 것 같았다.

너는 나를 사랑해야 해

“넌 내가 원하는 대로만 살아야 해. 네가 원하는 건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아.” 그의 목소리에서 지독한 소유욕이 풍겼다. 무열은 다시 입술을 묻으며 이빨로 그녀의 목을 깨물었다. “내가 널 필요로 하니까. 네가 순종적이든, 반항적이든, 상관없어.” 목가에 뜨거운 공기가 전해지면서 그녀의 몸을 서서히 뜨겁게 달궜다. 시은은 제멋대로 반응하는 몸에 당황했다. 끝내자고 말했으면서도 그에게 반응하는 자신이 너무 싫었다. “그만 해요. 하지 말란 말이에요!” 이대로 가다가는 그에게 휩쓸릴 것 같아 시은은 남은 힘을 다해 그를 밀어냈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붓는 격이라는 것도 모르고. “유시은.” 그녀의 목에 새빨갛게 자신의 흔적을 남긴 무열은 그녀의 목을 천천히 훑으며 낮게 숨을 내쉬었다. “네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까 책임을 져야지.” 눈물로 범벅이 된 채 눈앞에서 끝을 고하는 작고 여린 여자가 감히 제게 감정을 가르쳤다. 그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교묘하게 감정의 씨앗을 제게 심었다. 그 씨앗은 시간이 지날수록 무성하게 자라나, 주인 허락 없이 제 몸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렸다. 깨달았을 때는 너무나 늦은 뒤였다. 너무 깊게 뿌리내려 뽑아내고 싶어도 뽑아낼 수 없게 됐다. 그녀를 향한 집착과 갈망은 그 씨앗에서 비롯된 거였다. “아주 간단하고 쉬운 책임이니까 겁먹지 말고.” 그녀의 몸만 가지면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는 마음도 갖고 싶어졌다. 그 욕망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만 갔다. “시은아.” 다른 남자에게 향한 유시은의 마음을 온전히 제 것으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어떡하겠어. 네가 내게 불필요한 감정들을 알려줬으니, 그에 마땅한 책임을 져야지. “너는 나를 사랑해야해.”

언리콰이티드 러브(Unrequited Love)

사랑받아 보지 못해서 상처를 주는 것밖에 몰랐다. 그 결과는 참혹했다. 채은은 2년 전으로 돌아온 현실을 받아들이며 새롭게 다짐했다. 그에게 사랑받기 위해 이전 삶의 지식을 끌어모아 그의 곁에 머물자고. 그러면 태오가 자신을 바라봐 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놓지 않았다. 채은은 그의 눈에 띄기 위해 태오를 무작정 찾아갔다. 그리고 그토록 바라던 태오의 눈에 띄어 곁에 머물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시작은 사랑이 아닌 독이었고 운명은 비웃듯이 자신을 짓밟았다. “왜요, 내가 김채은 씨한테 감정이라도 생겼을까 봐 기대했나 봅니다.” “……부회장님.” “몸의 상성은 잘 맞아서 그건 마음에 들긴 했는데.” 그의 서늘한 눈빛에 채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을 내뱉는 순간, 그에게 눈물을 보일 것 같아서. “그런데 어쩌지.” 태오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움켜잡았다가 놓으며 입매를 뒤틀었다. “나는 너를 도구 그 이상 이하도 생각해본 적 없는데.” 이번 생은 사랑받을 줄 알았던 그에게 또다시 버림받았다.  헛된 기대였고 바람이었다. 채은은 태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영원히 그의 세상에서 사라지기로. “다시는 부회장님 눈에 띄지 않겠습니다.” 그의 아이를 품은 채. *** 부정하고 부정했다. 다른 여자도 아닌 김채은을 좋아하게 될 일은 없을 거라고. 하지만 그녀가 떠나고 나서야, 제 어리석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닌 다른 남자와 나란히 걷고 있는 그녀의 부푼 배에 이미 늦어 버렸음을 알았다.  처음으로 태어나 절망이라는 걸 맛봤다. 태오는 손으로 눈두덩이를 가리며 정신 나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웃었다. 아, 사랑이었구나. 나는 너를 사랑하는 거였구나. [언리콰이티드 러브(Unrequited Love): 짝사랑]

미워할수록 뜨거운

“옛정을 생각해 불쌍해서 만나 줬더니.” 불쌍해서……. 유은은 속으로 그 단어를 되새기고 또 되뇌었다.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자존심에 쫙 금이 가면서 와르르 부서져 내려갔다. “우리가 부부가 되는 순간부터 나는 아이를 가지기 위해 노력하려고 해.” “…….” “동의하지?” “제게 선택권이 있던가요? 왜 묻는 거죠?” “그러게. 물을 필요가 없지. 네가 싫어한다고 달라질 건 없으니까.” 장승언의 아이라니. 싫었다. 무엇보다 그와 살이 닿는다고 생각하니 끔찍했다. 결혼도 부족해서 좋아하지 않은 사람과 밤을 보내야 한다니. 생각하는 것만으로 속이 뒤틀렸다. . . . 이상했다. 분명 속이 뒤틀릴 만큼 싫었는데. “젖었네.” “거, 거실에서 이야기해요. 머리 말리고 갈게요. 이번에는 우리 서로 목소리 높이지 말고 차분하게 말로―” “오히려 시원하고 좋아.” “―네?” 그에게 심장 박동 소리가 들릴까 봐 말을 꺼내던 유은의 손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변태적인 발언에 등줄기에서 소름이 돋았다. 그의 다갈색 짙은 동공에 광기가 물들어 있었다. 그가 싫다. 멋대로 구는 것도, 통제하려는 것도, 능글맞게 대하는 것도, 나만 바라보겠다고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것도, 결국에는 여자가 있는 것 같은 것도, 방탄함을 버리지 못한 것 같은 것도. 그러면서 소유욕을 내보이는 그가 얄미웠다. 자신을 원하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모습이 보일 때마다, 그를 향한 혐오와 두려움의 이면에 숨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감정이 불쑥 고개를 들었다. 유은은 고개를 들어 올린 감정을 눌렀다. 그를 미워할수록 가슴이 뜨거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