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미친 악녀 연기는 이제 끝났다. 대금만 받으면 모든 것을 훌훌 털어 버리고 자유를 찾아 떠나려던 레이시의 계획은 완벽했다. <현상금-천만 골드. 생사 불문> 그러나 레이시의 손에 쥐어진 것은 수표가 아닌, 그녀의 얼굴이 떡하니 박힌 수배 전단지였다. 의뢰주가 세게 때리고 간 뒤통수에 얼얼함을 느낄 새도 없이 서둘러 이 나라를 떠야만 했던 레이시는 빗속을 틈타 낯선 배에 몰래 숨어들게 되고. “밤손님으로 찾아온 건가, 아니면 도피를 위한 밀항인가?” 악녀 시절 줄곧 앙숙이었던 이국의 황태자, 할리드와 마주치는데……. “희대의 악녀를 해내었으니, 세기의 신부도 가능할 테지?” “……네?” “내가 바라는 역할은 간단해.” 창가에 기대선 그가 싱긋 미소 지었다. “내가 한눈에 반해 이국에서부터 데려온 정비.” 누구요? 뭘 하라고? 딱 그런 눈으로 얼어붙은 레이시를 향해 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누가 봐도 납득할 만한 연기를 기대하지.” 악녀의 가면 대신, 희디흰 면사포를 쓸 시간이었다. *** “잊지 마세요. 이제 우린 한 배를 탄 사이란 걸.” “한 배를 탄 사이…… 라. 그건 그 배에 타고 나서 말해야지.” “……지금 타고 있잖아요?” 그녀를 올려다보며 그가 입술을 느릿하게 핥았다. “그 배 말고 다른 배.” “…….” 그녀의 시선이 한곳에서 멈췄다. 아, 레이시는 뒤늦게 깨닫고 탄식했다. 그의 욕망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겠다고 좋아만 하긴 일렀다. “이리 올라와 봐, 내 신부.”
‘신의 실수’라 불렸던 성녀 엘제. 끝내 세상의 멸망을 막지 못한 채 죽고, 성녀가 되기 전의 시절로 회귀한다. ‘나만 없으면 이번에야말로 모든 게 올바르게 흘러갈 거야.’ 하지만 과거를 기억하는 한 사람이 그녀를 찾아오는데. “가장 강한 신성력을 가진 여사제. 그게 성녀의 조건이지.” 한때 엘제에게 세상을 맡기고 떠났던 구국의 영웅 네이선. 그리고 그녀가 남몰래 사랑했던 남자. “정말로 단정할 수 있어? 여기에… 또 한 번 성흔이 새겨지지 않을 거라고?” “…….” “정말 성녀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제대로 추락해.” “…추락할게요. 이 힘을 잃어, 제대로 미래를 바꿀 수만 있다면.” 신성력은 신의 사랑을 받는 증거이고, 그것을 잃는다는 것은 죄를 지어 신의 실망을 샀다는 뜻. “대체 무슨 죄를 짓겠다는 거야?” “무슨 짓이 됐든 꼭 저지를 테니 비켜 주세요!” “그럼 지금 해.” “…네?” “무슨 나쁜 짓이든 저지르겠다면서. 그건 상대가 누구여도 상관없단 뜻이잖아.” 네이선이 그녀의 손을 자신의 몸으로 이끌었다. 가슴, 흉골, 전거근……. 적나라하게 만져지는 그의 몸은 강인하고, 단단했고… 무섭도록 무방비했다. “나로 증명해 봐.”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별이 빛나는 밤. 바다 위 선상에서 임무를 수행하던 암살자 아퀼라는 뜻밖의 방해꾼을 맞닥뜨렸다. 군함, 상선, 해적선 가리지 않고 전부 침몰시킨다는 해적단 모스트로 패밀리. 거기서도 바다의 악마라고 불리는 남자, 노체 모스트로. “난 타깃만 제거하면 돼요. 나머진 그쪽이 전부 가져요.” “마음에 드는 제안이네. 좋아.” 악명과 달리 제법 말이 통하는 상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기습을 당한 아퀼라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 남자의 배였다. “왜 날 납치한 거죠?” “나머진 전부 가져도 된다면서.” 아퀼라의 턱이 들어 올려졌다. 그녀의 붉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악마의 황금빛 눈동자가 사르르 휘어졌다. “그 배에서 네가 제일 탐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