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남자와 결혼하는 조건은 단 하나였다. “결혼과 동시에 임신을 계획하여 아이를 가져야 합니다.” “가능한 한 최대한 빨리.” 연주는 그에게 줄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조건을 망설임 없이 승낙했다. “정말 감당할 자신 있어요?” 그의 굵은 음성이 나지막이 뒤따랐다. “난 가능한 모든 날에 최선을 다할 생각인데.” 또렷한 눈빛의 연주가 답했다. “네. 감당할 자신 있어요.” 노력하면 아이는 금세 찾아올 줄 알았다. 아이가 생기면 그의 애정이 깊어지리라 희망을 품었다. 아이가 생기면 더는 외롭고 숨 막히는 삶은 없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유일한 소망은 결혼 2년 만에 무너졌다. “유감스럽지만 지금 상태로선 아이를 가질 확률이 희박합니다.” 사형선고와도 같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연주의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
“이제 우리 아이는 없어요.” 서하는 억누르고 있던 숨을 터트리듯 말했다. “우리 사이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단 뜻이에요.” 이로써 권도현과 자신이 부부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도 없게 되었다. 우린 오직 아이로 인해 억지로 맺어진 관계였으니까. “이사님도 마지못해 선택한 결혼이겠지만…….” “저 역시 이런 결혼은 바란 적 없어요.” 사랑 없이 책임감으로만 진행된 결혼. 온 세상 사람들이 비웃었던 결혼. 완벽한 그를 낭떠러지 끝으로 몰아세운 결혼. 이런 결혼은……, 결코 바란 적이 없었다. 서하는 떨려오는 눈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힘겹게 입을 열었다. “저 이사님 이제 안 좋아해요.” “저도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사님 곁에 남아 있었던 거예요.” 그에게 알려줘야 했다. 저에겐 그에 대한 사랑이 조금도 남지 않았음을. 저 역시 그와 똑같은 이유로 여태껏 곁에 있었음을. “그러니 이젠 저 그만 놓아주세요.” “여기서 끝내요. 우리.” 그리고 그는 절대 몰라야 했다. 당신에겐 하룻밤의 실수일 뿐이었던 아이가, 당신이 그토록 원망했던 우리의 아이가……. 아직 내 안에서 살아 있음을.
“억울하면 그쪽도 딴 놈이랑 놀다 와.” 다른 여자를 만나다 들킨 약혼자는 당당하게 말했다. “결혼 전까진 누구랑 무슨 짓을 하든 봐줄 테니까. 이러면 공평하잖아?” 안타깝게도 나에겐 약혼자를 내칠 용기도, 이 결혼을 거부할 자격도 없었다. “어차피 그쪽도 나와 똑같은 처지인 거 다 알아.” 이젠 모두가 알고 있다. 내가 얼마나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인지. 작게나마 남아있던 자존심은 추락했고, 애써 유지했던 정결함도 벗겨졌다. 그 순간, 한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백은채 씨가 마음에 들어요.” 태성 백화점의 대표 이사 태강헌. 저에게 대놓고 욕망을 표현했던 남자. 남자의 굵직한 저음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끌렸거든요. 처음 봤을 때부터.” 굵은 비가 쏟아지는 밤, 나는 태강헌을 찾아가 말했다. “저랑 자고 싶다고 했죠?” “…….” “그래요. 자요.” 누구든 상관없었다. 어떤 식으로 대하든 상관없었다.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저에게, 추악함의 끝을 보려 작정한 저에게, 다정한 밤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한 번 놀아봐요. 우리.” * * * “순진한 건지, 순진한 척하는 건지 모르겠네.” 강헌이 상체를 은채 쪽으로 바짝 기울였다. 순식간에 거리가 가까워졌다. 더욱 진해진 체향과 함께, 끓는 듯한 눈동자가 바로 앞에 마주했다. “놀기로 했으면 제대로 놀아야죠.” 강헌이 그녀의 턱을 그러쥐었다. “난 시작도 안 했는데, 어딜 내빼려고.” 탁한 음성이 떨어지는 순간, 그가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덮쳤다.
“박 의원은 뭘 줍니까? 서예하 씨 단추 푸는 값으로.” 우향의 개. 박 의원의 세컨드. 모두가 그 여자를 그렇게 불렀다.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는 태경에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몇 번 안고 나면 금방 싫증이 날 테고, 언젠가는 아무것도 아니게 될 여자였다. 얼마나 추잡한 소문을 달고 다니든, 누구와 굴러먹었든, 누구를 마음에 품었든…… 그런 건 아무래야 상관없었다. “난 아무래도 서예하 씨랑 자야겠어요.” 갖고 싶은 건 기어코 가져야만 하는 성격이었다. 평생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생각이었다. 여자를 제 곁에 불러들이고, 가장 취약한 점을 잡아 제 손아귀에 넣었다. 결국엔 욕심껏 취하고, 쌓아온 욕망을 쏟아부었다. 하지만 수 없는 밤이 흘러도 갈증이 해소되지 않았다. 텅 빈 눈을 볼 때마다 짙은 무력감만 불어났다. “내가 당신을 사랑할 일은…… 죽어도 없을 거예요.” 여자가 온전히 저를 떠난 후에야 깨달았다. 내가 그 여자에게 미쳐 있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