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허울뿐인 공녀, 루반나 블랑즈. 가문, 친구, 알량하게나마 남아 있던 공녀로서의 긍지. 모든 것을 버리고 은둔을 결심했는데······. 은둔한 별장 안으로 조금 아니, 많이 위험한 남자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저는 한번 마음먹은 건 꼭 이뤄내고 마는 사람이어서요.” “그래서 반 황제 시위대에 있는 건가요?” “스케일이 좀 클 때는 위험한 무기도 들어줘야 하는 법이죠. 총이나 검 같은.” 물리적으로도 위험하고, “나를 공녀의 침대에 숨겨주시겠습니까······?” 심장으로도 위험한 이 남자, 카온 이벨스터. 이 남자 하나만으로 벅차 죽겠는데, “자랑스러운 우리 루브, 제국의 법이 개정되었으니 너가 다시 가문의 보탬이 될 수 있다.” “그대 루반나 블랑즈 공녀를 황궁의 치유법사로 임명하겠다는 황제 폐하의 은공이 주어졌다.” 날 버린 가문과 날 무시해온 사교계가 나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살려주세요, 이 위험한 것들로부터.
“굴복하면 거둬줄게.” 이 한마디가 뇌리에 잔상처럼 아로새겨진 순간, 아로엔 웬투스티안은 과거 속 브리든 라이오네르를 지우기로 결심했다. “어쩌나? 굴복할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버려버렸는데.” 칼을 겨누려는 브리든의 앞에서 아로엔은 거침없이 약혼반지를 빼서 버려버렸다. 한때 이어져 있었다는 마지막 증표를. *** 초식 종족과 육식 종족이 한창 서로 간의 이해관계로 열을 올릴 민감한 시기.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까?” “왜 못 해? 내가 널 좋아하는데.” 아로엔 자신과 브리든, 우리 둘만큼은 중립 구역을 자처하는 듯 평화로이 사랑하는 감정만 키워나갔었다. 처음 브리든이 청혼을 하고 약혼식을 올릴 때까지만 해도 이상론이 가능했었다. 어릴 때부터 봐오던 소꿉친구에서, 아카데미 동문을 거쳐, 연인이 되기까지. 자연스러웠던 과정인 만큼 당연히 부부가 되는 과정도 당연히 손쉬울 것이라고, 브리든만큼은 다른 육식들과는 다르게 자신을 섬세하고 자상하게 아껴줄 것이라고, 아로엔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공녀님. 폐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이 시간 이후 우리 육식, 위스만 제국은 초식 포레노리안 제국에 전쟁을 선포...... 아니.” “집단 사살과 도륙을 선포한다.” 왜 그리 멍청하게 혼자서만 꽃밭이었을까. 그 시절의 아로엔은 자신이 혐오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 말 종족 웬투스티안 공가의 자부심을 걸고 전장을 내달리며 육식들을 베어나갔다. 그들의 날카로운 이빨 따위, 말이 튼튼한 다리에서 오는 속력, 제 검술 실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흑사자 공자 따위, 별거 아니야.’ 아로엔은 브리든을 절대 두려워하지 않기로 했다. “제발 이제 그만해줬으면 좋겠어...” 브리든이 파르르 경련하는 검을 자신의 목에 겨눠도 아로엔은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안 돼.” 아로엔은 얌전히 브리든을 향해 겨누려는 검을 고쳐잡을 뿐이었다. “이대로 멈추면 내가 널 잊지 못 할지도 몰라.” 누가 애걸복걸하는 쪽인지. 아로엔은 그것이 자신만은 아니기를 바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