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병을 고칠 수 있다며 자신만만하더니, 그 기죽은 얼굴은 뭐지?” 즐겨 읽던 소설의 엑스트라로 빙의했다. 흙수저 평범녀가 하루아침에 금수저 미녀 의사로 다시 태어나다니! 땡잡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 몸의 원래 주인이 죽기 전……. ‘살인귀 공작’ 카이르 밀러반과 주치의 계약을 맺었단 걸 알기 전까지는. “뭐 암튼, 잘 해보라고. 조금이라도 더 목숨 부지하고 싶다면 말이야.” 그런데, 집착남에 악역 남조였던 카이르가…… 불면증이라고? 태양신을 모시는 이 제국에서 그건, ‘악마에게 선택되었다는 표식’이란다. 불면증인 걸 들키면 바로 화형대 행……. 기다려 봐. 이 누나가 얼른 너 고치고 이 드라큘라 공작 성 나간다! 아, 근데 잠깐만. 밤마다 그의 목숨을 노리는 조직, 그들이 보낸 좀비 같은 괴물, 계속되는 악몽까지. 이 남자, 과연 잠들 수 있을까?! 아니 그것보다도, 내가 왜 그걸 다 같이 물리치고 있는 건데? ……추가 수당 받아야지. 진짜 안 되겠어, 이거. “줄게. 안 아까워.” 근데 기분 탓인가. 원작에서 여주인공을 향했던 카이르의 집착이……. “원하는 걸 다 줄 수도 있어.” “저 원하는 거 엄청 많은데요?” “다 줄게. 그럼 계속 내 곁에 있어 줄 건가?” “……계약 기간은요?” 어째 점점 나를 향하는 것 같다? “평생.”
남편의 불륜 현장을 목격한 날. 소설 속에, 그것도 하필이면 남주의 집착광공 전 부인에 빙의했다. “레베카, 허락 없이 내 몸에 손대지 말라고 했을 텐데.” 목숨 부지를 위해 당분간 옆 저택에서 지내는 조건으로 단숨에 이혼해 줘 버렸다. 그런데……. “당신과 이혼을 결정한 순간을 후회해.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나를 떠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던 내 어리석음도.” “레베카, 난 당신의 마음을 되찾고 싶어.” ……대공 전하, 당분간 옆집에서 살겠다고 했지 후회하라고는 안 했는데요? *** “그동안 고생했어요, 나 때문에.” 그 나지막한 말을 끝으로, 레베카는 맞잡았던 서로의 손을 놓았다. “……잘 지내요, 세드릭.” 그 순간, 떠난 그녀의 손길 대신 세드릭에게 머무는 것이라곤 그저……. 예상치 못한 허무감뿐이었다. ‘레베카가 떠났다. 그것도 다른 사내와 함께.’ 두 남녀가 서로를 품에 안는 장면이 자꾸만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이윽고 주먹 쥔 손등 위로 굵은 힘줄이 터질 듯이 불거졌다. ‘레베카, 당신은 아직 날 떠날 수 없어.’ 만에 하나 떠난다고 해도 지금은, 이런 식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 성에 남아 있기로 약속한 그 시간만큼은……. 자신에게 그녀를 붙잡을 수 있는 일말의 기회라도 주어야만 했다. “대답해 봐. 정말, 다른 남자와 도망이라도 가려고 했어?” “차라리 나를 벌주기 위해서 그랬다고 해. 그런 거라면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으니까.”
결혼하기 전에 버렸던 첫사랑이 돌아왔다. 신대륙의 대부호, ‘휴고 웨너’라는 이름으로. 증오가 깃든 눈동자가 물었다. 사랑했던 남자를 버리고 선택한 결혼이 과연 행복했느냐고. 그러나 아버지의 종용으로 시작한 결혼 생활은 이미 불행해진 지 오래였다. 시댁 식구의 냉대, 무능력한 남편의 외도. 종국에는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에게 받은 유산마저 빼앗기고 정신병원에 갇혔다. 마침내 나락으로 떨어진 이본느의 앞에 그가 찾아왔다. “내 아내로 살아.” “당신도 나도, 서로 잃은 것을 되찾기 위해 나쁘지 않은 거래일 것 같군.” 휴고 웨너, 그 사내가 되찾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