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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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져드릴게요, 대공 전하
3.36 (14)

전쟁을 제패하고 돌아온 북부의 지배자, 페르난 카이사르. 모든 것이 완벽한 그 남자는, 율리아의 불행한 어린 시절 속 유일하게 좋은 기억으로 남은 사람이었다. 그런 그가 제 남편이 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율리아는 처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하지만, “원하는 게 있다면 얼마든지 해. 성을 개조하든, 보석을 사들이든, 파티를 열든 전부 상관없으니.” “…….” “다만, 아침부터 그대를 마주하고 싶진 않으니 이런 짓은 삼가고.” 기억 속 다정했던 남자는 더 이상 없었다. 일말의 애정도, 온기도 허락하지 않는 냉랭한 사내만이 서 있을 뿐. “그대의 마음은, 내게 단 한 자락도 쓸모가 없어.” 그럼에도 그를 끝까지 사랑한 것이, 율리아의 가장 큰 실수였다. * 절벽 끝에 선 율리아는 한 때 제 세상이었던 남편의 얼굴을 천천히 눈 안에 새겨넣었다. 지금이 아니면 영영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를, 또 다시 사랑하게 될 것이다. 이제 더는, 그에게 얽매이고 싶지 않았다. “율리아!” 절박하게 달려드는 남편을 바라보며 율리아는 절벽 아래로 몸을 내던졌다. 《사라져드릴게요, 대공 전하》

나를 잊은 당신에게

‘울지마, 레아.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게.’ 카이우스 에녹 헤르케시아. 그는 레아의 오랜 연인이자 구원자였다. 온 제국인이 혐오하는 왕국의 볼모, 그런 레아를 조건없는 다정함으로 지켜주었던 남자. ‘돌아오면 그땐, 결혼하자.’ 긴 전쟁을 떠나는 그를 기다릴 수 있었던 건, 그가 남기고 간 진심 어린 약속 덕분이었다. 하지만, 3년간의 전쟁 끝에 돌아온 그는……. “내가 이 여자와 약혼을 했다, 이 말인가?” 한번도 들어 본 적 없는 건조한 목소리. 시리도록 차가운 눈동자. 눈앞의 카이우스는, 레아가 기억하는 다정한 연인이 아니었다. “이게 무슨 미친 상황인지 모르겠군.” 사랑했던 시간도, 나누었던 약속도, 레아라는 여자도 모조리 잊은 낯선 남자였다.

이토록 상냥한 속박

에드먼드 헤이든, 그는 친절하고 자비로운 도련님이었다. 일개 하녀의 딸이었던 로젤라에게 선뜻 손을 내밀고 애칭을 허락할 만큼. 그의 찬란한 미소를 처음 본 순간부터 로젤라는 그와의 만남을 애타게 기다리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녀에게 한결같은 애정을 선사하던 에드먼드를 배신하고, 그의 삶에 침범한 재앙이 되기 전까지는. “넌 알고 있었지? 내가 네게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 “그런 날 보는 건, 우스운 연극 같았겠네.” 본 적 없는 차가운 눈에서 애정이 아닌 증오가 서렸을 때 그들의 관계는 막을 내렸다. 분명 그런 줄로만 알았다. 긴 시간이 지나 돌아온 에드먼드가, 변함없이 다정한 도련님의 가면을 뒤집어쓴 채 그녀에게 접근하기 전까지는. “안녕, 로즈.” 《이토록 상냥한 속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