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절단을 맞이하는 자리에 저를 데려가 주세요, 폐하.” “싫습니다. 어차피 내가 그대에게 한 조각의 마음도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가 없는데, 연극을 할 이유가 있겠소?” 대놓고 황제에게 무안당하는 황후를 보며 귀족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면서도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에드먼드의 냉대에 힘껏 짜낸 용기는 순식간에 사라졌고, 소티스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소티스는 에드먼드를 사랑했다. 그러나 에드먼드는 소티스를 미워했다. “오늘 그대를 놔 줄 생각 같은 건 없어.” “놓아 달라고 한 적도 없는걸요. 엉망진창으로 만드셔도 되니까, 얼른…….” 황후를 귀족들의 가십거리로 만든 황제가 향한 곳은 바로 정부의 품. 다른 여인에게 다정하게 속삭이는 에드먼드를 볼 때마다 소티스는 비참해졌다. ‘내가 사라지면 모두가 행복할까. 나만 사라지면 괜찮을까. 그냥, 내가 사라졌으면 좋겠어.’ *** 고요하게 잠든 황후가 일어나지 않는 침실에선 한 마법사만이 상처받은 그녀의 영혼을 보았다. 창가에 걸터앉아 수줍은 듯 무안한 듯,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자신의 긴 머리카락을 빗어 내리고 있는 소티스를. “그렇게 애쓰시지 않아도, 노력하시지 않아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폐하를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나타날 거예요.” 그리고 그 마법사는 처음 보는데도 마치 모든 걸 안다는 듯, 그녀의 속마음에 대답했다. “방법을 찾겠습니다. 당신이 저를 구해 주셨던 것처럼, 저 역시 당신의 두 발이 다시 땅을 디딜 수 있게 하겠습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꼭 그런 날이 올 것처럼 들려요.] 침대에 곱게 누워 있던 황후를 등지고 매일같이 창가의 영혼에게 속삭이던 마법사는 결국 소티스의 육체를 깨우고……. “내일 오전, 우리의 이혼을 공언할 거요. 그대의 몸 상태도 좋지 않고 영혼도 불안정한 데다, 후사를 이을 능력이 없다는 것이 이혼 사유요.” 한 마법사의 지극한 헌신으로 육신을 되찾은 황후 소티스가 맞이한 것은 황제의 이혼 통보였다.
서비스 종료를 하루 앞둔 MMORPG 게임, ‘아스테리온’.아스테리온의 오랜 유저로 지내 온 한서경은 서비스가 종료되는 아침 6시를 기다리며 강하게 소원한다.이 세계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그 소망이 이루어진 걸까?[FINAL QUEST] ‘아스테리온’을 구해 주세요!검은 마왕, 아스테리온의 소환을 저지하고 위험에 빠진 이 세계를 구해 주세요. 오로지 ‘별의 계승자’인 당신만이 해낼 수 있는 일입니다.―조건 : 마왕의 소환을 저지할 것.―특수 조건 : □□의 □을 완전히 □□하고 □□과 □□이 □□□ 것.―보상 : 로그아웃, ‘별의 선물(소원을 무엇이든 빌 수 있다. 단, 철회 불가.)’.한서경은 자신의 캐릭터― ‘마네(Mane)’에 빙의하여 아스테리온 세계 속에서 눈을 뜬다. 심지어 게임을 서비스 종료시킨 마지막 스토리, ‘마왕 강림’ 이전으로!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선 ‘마왕’을 저지해야 한다.한마디로 마왕이 될 예정인 NPC― ‘키니스’의 흑화를 막아야 한다!“마네, 너는 바라는 게 없나?”“있어. 이 세상이 멸망하지 않는 것.”그 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키니스와 함께 오른 여행길.“세상을 구할 용사가 필요 없어지는 날이 오면, 너는 떠나 버릴 건가?”“응. 떠날 거야. 아주 먼 곳으로. 네가 무슨 수를 써서도 절대로 잡지 못할 만큼 멀리 떨어진 곳으로 떠나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야.”과연, 마네는 이 세계를 구하고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라비티에겐 아주 대단한 계획이 있다. 그녀의 어머니를 비참한 죽음으로 몰아가고, 그녀 자신을 오랜 시간 지옥에서 살게 한, 증오스러운 플레어 공작에게 복수하는 일. 그렇게 라비티가 계획한 복수는 죽음이었다. 죽음으로써 자신이 더는 이용할 수 없는 패가 되도록. 계획은 완벽했고, 아무 문제도 없을 줄 알았다. “안녕, 라비티 플레어.” 서늘한 겨울나무 같은 남자가 나타나 그녀의 죽음을 방해하기 전까진. “어때, 라비티 플레어. 칼을 다시 쥐는 거야. 그 칼에 기회와 방법, 힘과 명분을 실어 주는 건 내가 될 거고.” “…….” “그 칼로 네 심장이 아니라 공작의 심장을 찔러도 좋다고 한다면…….” “…….” “복수할 텐가?” 성서에 적힌 악마의 속삭임이 이러할까. 남자, 에이든의 제안은 분명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그런데도 라비티 아몬디네는 에이든 ‘셀크레아’를 믿을 수 없었다. 남자가 장성하지 않은 소년이던 때. 셀크레아 2황자도, 지금처럼 소네트 대공작도 아니던 때. 그는 제 이익을 위해서 라비티와 그녀의 어머니를 플레어 공작에게 팔아넘겼으니까. “나를 원망하나?” “원망?” “…….” “어떤 단어로도 이 곯은 마음을 다 담을 수는 없을 거야.” 그날, 숲속에서 우리가 만나 시작된 연은 악연과 인연 중 어떤 끝을 맺게 될까. * * * “라비티.” 사물의 윤곽만을 겨우 구분할 정도로 사위가 어두운데도 그의 얼굴만큼은 선명하게 보였다. 조금 내려앉은 눈썹, 그늘진 눈썹 사이,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 꾹 다물린 입술, 잘게 떨리는 목울대까지. 나는 그것을 멍하니 시선 끝으로 더듬다가 말했다. “아파요.” 아파요. 아팠어요. 아주 많이, 또 사무치도록. “그래.” 내 아랫입술을 누르는 그의 엄지손가락에 힘이 지그시 실렸다. “미안해.” “…….” “미안해. 라비티. 미안해. 미안해…….” 그 말이 뭐라고 위로가 됐을까. 당신은 딱히 내 용서를 바라지 않고, 나는 이보다 몇 배는 더 아프대도 당신을 원망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일 텐데. “……미안해.” 이 말이 뭐라고 마음 한구석이 부드럽게 무너질까. 상황에 알맞지도 않은 이 한마디가 도대체 다 뭐라고. 사실 나는 그냥 누구에게든, 어떻게든, 언제가 됐든 사과 한마디를 듣고 싶었던 모양이다. 뭐든 혼자 삭이는 것이 버거워서, 그 말에 기대서라도 견뎌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불쑥 떨어진 그 말이, 알맞지도 않은 그 말이. 무엇보다도 강렬한 정답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