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날아든 가장 절친한 친구와 오랜 짝사랑의 약혼 소식. 그 남자는 내가 먼저 좋아했어, 너도 알았잖아! 복잡한 속내의 세실리아에게 오디크의 문제아, 아센이 다가온다. “세실리아 양. 제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마시면 사랑에 빠지는 묘약이에요.” 해선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아나, 세실리아는 불도저 같은 아센에게 이끌려 간다. 약혼식에서 만난 친구는 새초롬하게 웃으며 속을 긁고, 설상가상 형의 약혼을 축하하기 위해 뒤늦게 참석한 테로스가 묘약을 마셔 버렸다. 게다가 이 사실마저 그에게 들키고 마는데…. “무엇이라도 하겠다는 말. 지킬 수 있나?” 그의 말에 세실리아는 구명줄을 잡는 심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를 일으켜 세운 커다란 손이 곧이어 눈물 자국이 남은 그녀의 뺨을 쓸기 시작했다. “나와 결혼하도록 해.” 맙소사. 묘약을 먹인 대가로 받는 벌이 결혼이라니. “제가 제안을 거절하면요?” “제안이라고 생각했나? 내가 명령을 너무 부드럽게 했나 보군.” 미소가 걸린 입과 대조되게 눈빛은 서늘해서 지옥의 사자가 올라온 것처럼 소름이 끼쳤다. 묘약의 효과가 끝나기까지 반년. 세실리아는 눈물을 머금고, 테로스가 내민 손을 잡았다. 어쩔 수 없지. 가 보지 않은 길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직접 가 볼 수밖에. 세실리아는 과연 한순간의 실수로 빚어진 크나큰 대가를 무사히 치를 수 있을까.
“네가 짐승의 태를 벗고 귀족답게 행동하면 나도 그에 걸맞게 대우하마.” 고아로 자라면서 설움도 많았지만 난 내가 자란 마을 넬하임을 사랑했다. 어느 날 찾아온 헤이츠 공작이 내 삶을 조각내기 전까지는. 소중한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나를 보며, 그는 잔인한 신처럼 미소 지었다. “해치지 않으니 걱정하지 마라. 난 이 뭣 같은 삶에서 널 구제하러 온 거야.” 그는 내가 반역을 저지른 귀족가의 후손이라며 핏줄에 어울리는 귀족의 삶을 살도록 강요한다. 게다가 기억에도 없는 내 조부에게 원한이라도 있는지 내게 끝없는 모멸감을 안겨준다. 난 저 남자가 싫어. 거짓된 삶을 강요하는 것도, 저 특유의 오만함도, 벌인지 거래인지 모를 입맞춤도. 섬세하게 세공한 보석 같은 남자는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아픈 말로 나를 찌른다. “손님이라면 넌 돌아갈 곳이 있어야지. 네게 갈 곳이 있어?” 언젠간 달아날 거야. 당신이 날 가장 필요로 할 때. *** “네가 내 마음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공작의 마음? 내가 그런 것을 알았던가. 그가 짧게 숨을 들이켜고는 토해내듯 말했다. “내게 기회를 줘, 릴리아나.” 머릿속이 일순간 공백이 되고 말았다. 그 고귀하던 헤이츠 공작이 자신의 마음을 알아달라고 내게 이렇게 빌 듯이 말하다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확실히 말해 둘게. 나는 지금 네게 구애를 하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