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노름빚에 팔리듯 공작가로 온 엘라는 모두가 기피하는 미친 공작의 담당 하녀가 된다. 공작은 낯선 이질감에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하녀를 바라봤다. 식사를 준비해온 하녀는 다른 사용인들과는 다르게 목소리를 떨지도 않았고, 식은땀을 흘리며 불안해하는 기색도 없었다. 그저 담담하게 자신의 옆에 서 있었다. “이름.” 공작은 저택에 온 뒤 처음으로 담당 하녀의 이름을 물었다. “엘라입니다.” “엘라……. 이번엔 하녀장이 꽤 괜찮은 하녀를 보냈군.” ⁕ ⁕ ⁕ 글로이스 공작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자신이 그저 평범한 하녀에게 이렇게 빠지게 될 줄은……. 하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었기에 자신의 하녀를 위해서 공작은 결심했다. 이 제국을 멸망시키기로.
“결혼하기로 했으면, 책임져야지. 안 그래?” 연인이었던 엘리오스에게 모든 걸 바쳐 헌신했건만, 그는 황녀와 결혼을 해버렸다. 배신감에 홀연히 제국을 떠난 베르. 전 연인을 잊기 위해 독한 술을 들이켜던 그 날. 베르는 절대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간신히 눈을 뜨자, 믿지 못할 광경이 보였다. 갈색 피부, 황금색 눈동자, 검은 머리칼을 가진 낯선 남자. 베르는 왜 처음 보는 남자가 자신의 옆에 누워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누구세요…?” 베르의 물음에 카탄이 오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섭섭하네. 결혼을 약속한 사이인데, 누구냐니.” “네? 결혼이요?” 베르는 어떻게 해서든 이 난감한 상황에서 벗어나려 애쓰지만…. “죄송하지만, 어제 일은 실수였어요….” “실수? 미안하지만 난 실수가 아니었거든.” 카탄은 자신의 품에 스스로 들어온 완벽한 이상형을 놔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결혼하기로 했으면, 책임져야지. 안 그래?” 베르는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살폈다. 190cm는 훌쩍 넘을 것 같은 장신에, 굳은살 박인 커다란 손과 금색으로 이글거리는 눈빛은 시선 한 번으로 사람을 주눅 들게 만들었다. 보통 사람은 눈을 마주치는 것도 힘들게 분명한 남자! 겨우 가슴께에 닿을락 말락 한 자신이 책임지기에는 눈앞에 있는 사내가 너무나도 건장했다. *** 결혼하자며 매달리는 카탄도 골치 아픈데, 황녀와 결혼한 엘리오스가 자꾸 끈질기게 베르를 옭아매기 시작한다. “날 버리고 황녀와 결혼한 주제에 왜 이러는 거야. 도대체 뭐가 문제야?” “허락도 없이 내 곁을 떠난 것. 넌 영원히 내 곁에 있어야 해.” 엘리오스는 베르를 자신의 손에서 놓아줄 생각 따위 전혀 없다. 베르가 있을 곳은 오직 자신의 옆자리일 뿐! ‘나를 방해하는 것들은 전부 없애버려서라도 베르를 가지리라!’
남편의 배신으로 누명을 쓴 채 죽은 줄 알았던 에스카는 스카드 후작가의 절름발이 하녀 몸에서 눈을 뜬다. 에스카는 신이 자신에게 또 한 번의 기회를 줬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배신한 남편에게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복수를 위해 후작가의 사생아 도련님과 손을 잡는다. 비쩍 마르고, 볼품없던 그 도련님이 몇 년 뒤 어떤 사내가 될 줄도 모르고……. “누구시죠? 절 아시나요?” “벌써 날 잊은 건 아니겠지? 나야, 에런.” 에스카는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이 커다란 사내가 자신이 모시던 도련님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제 도련님과 닮은 점이라고는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뿐인 사내. “정말… 정말로 에런 도련님이세요?” “그래, 에스카. 나야.” 그저 독기만 가득하던 어린아이의 눈에서 서늘한 짐승의 눈으로 변한 사내가 웃음을 지으며 에스카의 귓가에 속삭였다. “날 살렸으면 책임져야지. 안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