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죽였던데.”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시은의 치부를 입 밖으로 꺼냈다. “…그래서, 처음부터 저를 싫어하셨던 건가요?” “다른 사람의 행복은 빼앗아 놓고, 넌 행복하길 원해?” 지금 이 상황을 예상 못 하진 않았다. 백화점의 주인이라면 일개 미화 사원의 서류쯤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을 테니. 그러나 겨우 얻은 일자리가 간절했다. “…저를 자르실 건가요?” 구석으로 몰린 시은이 힘겹게 태성의 눈을 마주했다. 그의 짙은 눈동자가 분노로 더 검게 물들었다. “내가 왜 널 증오하는지, 그 이유를 찾아와. 한 달 안에 찾으면 네가 원하는 거 뭐든 다 들어주지.” * * * 모든 것을 알게 된 후 그를 위해 떠나려고 했다. 그러나, “내가 순순히 널 놔줄 거라 생각했나?” “…….” “어디 한번 발버둥 쳐 봐. 내가 받은 고통만큼 너도 돌려받을 때까지 난 놔줄 생각 없으니까.” 그가 비릿한 웃음을 띠며 시은의 얼굴에 묻은 눈물 자국을 닦아 내었다. “바짝 엎드려 기는 일. 그게 앞으로 설시은 당신이 나한테 해야 할 일이야.”
“이혼해요, 우리.” 그와의 3년간의 결혼 생활은 끔찍이도 외로웠던 세월과의 싸움이었고, 새로운 비극의 시작이었다. “고작 이혼 따위가 당신이 원하는 거라고?” 평소 냉철하던 그는 부부 사이의 끝을 논하는 자리에서도 끝까지 냉담했고, “고작 나한테 복수하겠다고 이런 장난을 친 거라면 좋게 받아들여 줄게.” 서화의 진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이혼은 안 돼.” 이혼을 받아들이리라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남편의 입에서 나온 답은 서화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당신…… 나한테 이럴 자격 없어요.” “자격이 있고, 없고는 내가 결정해.” “내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이러는 건가요?” “뭐?” 그녀가 당했던 사고에 관해 끄집어내자, 은원이 조금이나마 남겨두었던 웃음을 모조리 거뒀다. “나 다 알게 됐어요. 내가 기억을 잃기 전…….” “…….” 멈춰 서 있는 남편의 앞으로 서화가 한 발자국 다가갔다.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는 책망을 담았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주은원 당신이 아니었다는 걸.” 가슴에는 미처 버리지 못한 사랑을 품어 원망의 말을 쏟아냈다.
“우연인가? 아님 나 따라온 건가?” 전남친을 잊기 위해 여행을 떠난 예진은 우연히 들른 전시회장에서 낯선 남자와 작품의 해석을 두고 언쟁을 벌이고. 다음 날 밤, 다신 마주칠 일 없을 줄 알았던 두 사람은 묵고 있던 게스트하우스에서 마주친다. “이름 안 알려 줄 거야?” “…….” “세 번째엔 알려 주려나.” 눈이 흩날리는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을 앞둔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도, 직업도 모른 채 충동적으로 우연에 몸을 맡긴다. *** “이름.” “…….” “이름이 뭡니까?” 진영의 무례하고도 고압적인 어투에 예진이 불편한 기색을 띠며 미간을 구겼다. “세 번째에는 알려 주기로 하지 않았었나?” 이름을 묻는 그의 한쪽 입가가 매끄럽게 올라섰다. 서늘한 미소였지만 여유로운 모습은 그대로였다. “그런 적 없습….” “나예진.” “……!” “이름이 나예진이었구나.” 그의 기다란 손가락에서 빙글 돌아가고 있는 제 명함에 예진은 금세 얼굴이 잿빛이 되어 갔다. “뭐 이름은 알았으니까 됐고. 다른 걸 묻죠.” “……?” “그날 왜 도망갔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