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아나, 쓰다듬어 주세요. 당신이 만져주면 기분이 좋습니다.” 19금 피폐 소설 속 악역으로 빙의했다. 그것도 하필이면 침대 위 황제를 덮치려던 순간에. 그때까지만 해도 꼼짝없이 죽었다고 생각했다. 에녹 필리프 디하르트. 그는 남과 닿는 걸 미치도록 싫어하는 폭군이었으니까. 그런데 이 남자, 뭔가 이상하다. “오늘은 만져주기로 약속했지 않습니까. 옷도 벗기기 쉬운 거로 입어 봤는데.” 조금 독특한 취향을 가지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제 모든 처음은 당신이었습니다. 그러니 리아나, 당신에게도 제가 그런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조금 애틋한 거 같기도 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내가 자기 심장에 박힌 얼음을 녹여 줄 치료제라며 졸졸 쫓아다니기까지 하는데……. 폐하. 정말 얼음만 녹여드리면 되는 거 맞나요? *** “리아나.” “…….” “리아나, 나 좀 봐줘요.” 치료대상으로 말고. 남자로. “나 좀 좋아해 줘, 응?”
사랑받길 꿈꿨지만, 사랑받지 못했다. 시한부 선고를 받는 그날까지도. 천덕꾸러기 입양아. 백작가의 골칫덩어리. 그 꼬리표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리트리샤가 수도를 떠나기로 결심했을 때 그녀에게 거래를 제안해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가문에서 나오도록 도와줄 테니, 나와 결혼합시다.” “대공 전하. 제게 남은 시간은 1년뿐이에요.” “상관없습니다.” 대공은 리트리샤가, 리트리샤는 대공이 필요했기에 두 사람은 부부가 되었다. 1년짜리, 시한부 부부가. 그리고 약속된 기한이 끝나던 날. 리트리샤는 대공성을 떠나려 했다. “이 자리에서 그대의 옷자락을 붙잡고, 울며 매달리면. 그러면 날 버리지 않을 건가?” 저주받은 황자. 피에 미친 전쟁귀. 그 무시무시한 수식어들의 주인공인 헤베루스 대공이 자신을 붙잡지만 않았더라면. “……버림받지 않으려면 난 어찌해야 할까.” 1년짜리 목숨, 거짓말로 이루어진 가짜 부부. 저주받은 황자의 시한부 대공비는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의 남편이, 그녀를 살리기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내가 말했던가, 인어라면 치가 떨린다고.” 냉소적인 목소리에 아일라는 입술을 물었다. “경고하지만 남편의 의무 따위, 기대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테오도어 데본셔우트는 아일라 파노페아를 증오한다. 이건 절대 변치 않을, 불변의 명제와도 같은 것이었다. 아일라는 인어였고, 그 빌어먹을 인어로 인해 테오도어는 형을 잃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모른다. “테오, 제발 날 기억해내 줘.” 테오도어, 네가 그토록 찾아 헤매는 과거의 인연이… 바로 나라는 걸. *** “아일라. 그동안 대체… 무슨 짓을 해 온 거지?” 테오도어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일라의 새하얀 살결 위로 벌어진 상처에서 흐르는 피에 덜컥 숨이 막혀 왔다. “미래를 본다는 게 이런 방식이었던 건가?” “왜요. 이제는 제가 쓸모가 없나요?” 마치 저울대 위에 올린 물건처럼 가치를 운운하는 지친 목소리. 버석하게 메마른 아일라의 시선을 마주한 그날, 테오도어의 세상이 무너졌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아일라에게 준 상처는, 결코 되돌릴 수 없는 것임을.
“설마 내가 정말 사랑에라도 빠졌다고 믿었나? 천한 장사치의 딸 따위에게?” 모든 게 허무한 꿈이었다. 뜨거운 입맞춤도, 찰나의 다정이 비치는 아름다운 파란 눈동자도. 그 어디에도 진심은 없었다. 라이오넬 에드문트 발하임. 에슈발트 제국의 육군 대령이자 북부 혁명진압 사령관. 자신의 첫사랑이자 남편인 그의 마음에 사랑 같은 건 없었다. 라이오넬에게 자신은 그저 제 동생을 죽음으로 몰고 간 원수의 딸이자, 전쟁으로 돈 놀음이나 해 대는 혐오스러운 족속일 뿐이었다. *** 라이오넬은 자신을 바라보지 않는 아네스의 손을 움켜쥐었다. “라이오넬, 그거 알아요?” “뭘 말이지?” “내 다리를 이렇게 만든 게 당신이라는걸요.” 라이오넬의 얼굴이 천천히 일그러졌다. 언제나 냉담하기만 했던 연청색 눈동자가 서서히 절망에 잠겨 가더니. 이내, 돌이킬 수 없는 제 잘못을 깨달은 그에게서 목이 졸린 음성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