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이자 아가씨와, 그를 지키는 기사의 이야기. “헤이든, 나는 이번에야말로 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헤이든의 주군, 레오닐라 후작가의 아네스는 오로지 황후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하지만 몇 년 전, 황태자와의 약혼이 무산된 이후 그의 우울은 깊어졌다. 이어지는 네 번의 자살 시도, 그리고 실패. 모두가 아가씨의 곁을 떠나고 오직 아가씨의 호위기사인 헤이든만이 곁을 지키고 있다. ‘헤이든, 그거 알아? 흔히 자살을 시도했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사람은 생의 소중함을 알고 힘차게 살아간다고들 하지.’ ‘…네, 다들 으레 그런 말을 하곤 하죠.’ ‘그것은 남겨진 사람들이 만들어 낸 거짓말이야. 죽었다 살아남은 사람은 말이야,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오히려 죽음조차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사람을 더욱 나락으로 떨어뜨리지.’ 아, 오늘도 나의 주인께서는 죽음을 갈망하신다.
“신관님, 사랑은 어떤 맛이 날 것이라 생각하세요?”멀리 떨어진 제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10년 만에 귀국한 크뤼거 공작가의 공녀 살로메.그리고 살루트 신전의 신실한 대신관 요한.“내기 하나 할까요.”문제의 성인식 이후부터살로메는 요한에게 뜻모를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갑자기 무슨 내기를….”“요한, 장담하죠. 당신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예요.”그는 과연 이 ‘미친 공녀’ 살로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어릴 때 저택에 불을 질렀어요.”“예?”“모두가 잠든 시각이었죠. 창고에 있던 기름을 가져다 온 저택에 뿌리고 다녔어요. 요리사가 들고 있던 램프를 떨어뜨렸어요. 그 다음에는 집안에 켜져 있던 양초를 전부 넘어뜨렸죠.”살로메의 말에 나는 하마터면 들고 있던 찻잔을 떨어뜨릴 뻔했다.“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궁금하다는 표정이네요. 별다른 이유는 없어요. 그저 난로 속 종잇장처럼 타들어 가는 저택을 구경하고 싶었거든요.”공녀는 여유롭게 찻잔을 손에 들었다. 그 위에 각설탕을 여러 개 떨어뜨리고, 티스푼으로 살살 저었다. 방금 따른 뜨거운 차의 열기에 쌓여있던 각설탕이 녹아내리는 것이 보였다.“저택은 순식간에 불길에 휩싸여 이 각설탕 탑처럼 무너져 내렸답니다. 뭐, 다행인지 불행인지 죽은 사람은 없었어요.”“…….”공녀는 이윽고 아무렇지도 않게 차를 한 모금 마셨다.“이 차, 맛있네요. 각설탕을 너무 많이 넣은 것 같기는 하지만요.”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이 미친 공녀를 사랑하게 될 일은 없었다.
삼촌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밝히기 위해 그가 마지막으로 머물던 외딴 호텔로 떠났다. 그런데 이 호텔, 정상이 아니다. “이미 호텔을 둘러보면서 무수히 경험하셨을 텐데요. 상식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일들을.” 인간이 아닌 것들까지 손님으로 받고, 괴물 직원들이 일하는 기이한 호텔, 벨베디어. 정체불명의 총지배인은 이제부터 내가 호텔의 사장이며, 죽을 때까지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말도 안 돼. 이건 분명히 사기 계약이다. 어떻게든 이 호텔에서 탈출하겠어. 이런 곳에서 죽고 싶지 않아. “왜 호텔에서 나가고 싶어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 “저는 사장님이 원하시는 것은 뭐든 이루어 드릴 수 있어요. 세계 멸망을 원하신다면 그것까지.” “…그런 게 가능하다고요?” 푸른 눈의 괴물이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인다. “존재한 이래로 시도한 일 중에 실패한 것은 없는지라.” 일러스트: 열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