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사진. 방금 찍힌 거야.”남자는 코를 찡긋, 구기며 술잔을 단번에 비웠다. 충격을 주려는 게 목적이었다면, 성공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들어올 때 보니까 전화기 붙들고 있던데. 그 새끼랑 통화라도 했나 봐?”“…….”“지금은 뭐, 그다음 걸 하고 있을지도.”조금 전 그 통화에서 났던 이상한 소리가 단박에 설명됐다.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막상 사실을 알게 되니 손이 부들거렸다. 왜 여기서 쓸데없는 승부욕을 배출하는 건진 모르겠지만, 그는 뿌듯하다는 듯 입매를 길게 늘였다. 거기에 쓸데없이 잘생긴 외모는 얄미움을 배가시킨다. 자존심이 퍽 상했다.“재미있나 봐요. 그쪽은.”“음, 조금.”새로운 술잔을 든 남자가 고개를 느리게 기울인 채, 온더록스 잔을 빙글빙글 돌렸다. 잔에 부딪히는 얼음 소리가 적막을 채웠다. 은채는 그의 시선이 뜨거워 자신도 모르게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눈물이라도 줄줄 흘리는 꼴을 봐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는데 말이야.”“실망하셨겠어요.”피식 웃는 은채의 앞으로 그의 상체가 조금 더 기울어졌다. 확 가까워진 거리에 그의 숨이 섞일 것만 같았다. 긴장이라도 한 듯 침을 꿀꺽 삼키는 은채의 목선을 빤히도 바라본다.“그랬는데…….”그가 말꼬리를 늘이며 도톰한 입술에 술잔을 가져다 댔다. 목을 젖히는 순간에도 은채에게서 노골적인 시선을 치우지 않는 게 묘한 긴장을 일어냈다.“복수가 하고 싶네.”난데없는 말에 은채가 헛웃음을 지었다. 그리곤 들러붙는 노골적인 제안.“나랑 잡시다, 정은채 씨.”불쾌할 수 있는 제안에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저, 이 상황을 정리하느라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본 작품은 15세 이용가로 재편집된 작품입니다.]
짝사랑이라는 로맨틱한 단어를 가져다 붙이기엔 한참 모자란 감정이었다. 잘생긴 남자와 손끝이 스치면 떨리고. 낮은 목소리를 듣자면 마음이 설레고. 큰 키 때문에 나란히 걷다 보면 기분이 들뜨고. 멋있는 남자를 보면 여자들은 모두가 한 번쯤은 느껴볼 별거 아닌 감정이었다. 우월한 외모와는 참 상반되게 까칠한 그를 상사로 모시기 시작한 3개월 동안의 짧은 설렘이었다. “어떻게 하면, 첫눈에 반했을 때처럼 날 좋아해 줄 건데.” 진심이라곤 하나 묻어나지 않는 프러포즈를 받은 그 날 이후로, 안 그래도 뼈가 녹는 것처럼 힘들었던 비서 생활에 강도 높은 업무가 하나 추가되었다. 대놓고 나를 유혹하는 저 남자에게 다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말 것.
근래 가장 재수 없는 날. 미니미한 박스카 앞을 자꾸만 가로막는 슈퍼카들이며, 전 남자친구와의 만남도 모자라 웬 재수 없는 놈에게 주차 시비까지 걸렸다. ‘앞으로 또 내 전화 그따위로 받으면, 이 귀여운 차 뉴스에서나 보게 될 거야. 저기 한강에 오리 배랑 같이 둥둥 떠다니는 장면.’ ‘누가 들으면 또 전화할 일 있을 줄 알겠네!’ 생긴 건 짜증나게 잘생겨선, 말은 못되게 하지. …… 그리고 다신 볼 일 없을 줄만 알았던 그 재수 없는 놈과 이렇게 단둘이 술을 마시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홀린다는 게, 바로 이런 건가. ‘호텔? 아니면 집.’ 그 야한 물음에 멍하게 풀린 루미의 머릿속에 사이렌이 마구 울린다. 삐용삐용, 원나잇 주의보다.
“사장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노크 몇 번 만에 벌컥 열린 문. 그 사이로 얼른 몸을 비집고 들어온 짧은 머리의 남자가 어찌나 급하게 뛰어왔는지, 무릎까지 짚은 채 헉헉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이정 그룹의 심장, 이정 백화점 사장실. 커다란 명패에 적힌 ‘CEO 도정혁’이란 글자가 그의 모든 걸 설명했다. 다리를 꼰 채 앉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제 비서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는 남자가 느긋하게 보던 서류를 마저 넘긴다. “또 뭔데.” “……했답니다.” 헉헉대는 숨 사이로 자취를 감춘 단어들 덕에 정혁의 눈썹이 설핏 구겨졌다. 안 그래도 찬 인상이 덕분에 얼어붙을 지경이다. “뭐가 뭘 해?” 비서로 데리고 다닌 지만 벌써 3년 차인데, 아직도 저렇게 거슬리는 짓을 골라 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한 수준이었다. 불만은 짧은 한숨으로 대신한 정혁이 결재판을 툭 덮어 두곤 그를 가만히 바라본다. 잠시 숨을 고른 김 비서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 개가 부활을 했답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 이정 그룹의 수장, 이은주 회장. 정혁의 조모로 늘 우두머리의 위용을 떨치며 카리스마로 중무장한 그녀가 웬 무당의 말을 믿고 유언장을 전면 수정했다. 어릴 적 키우던 개가 부활, 아니 환생했다는 말에 달려간 자리에서 만나게 된 유나리. 쫓아내야 마땅할, 마냥 어리다고 생각한 그녀에게 점점 휩쓸려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그는 혼란에 빠진다. 이렇게 된 거, 이쪽의 계획도 전면 수정이다. 그녀를 밀어내는 게 아니라, 온전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아버지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다른 곳도 아니고, 이 자리에서만큼은 아버지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할 것 같았다. 입에 영 붙지 않는 단어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자, 은호가 힐끔 태리를 살핀다. “내가 직접 아는 사이는 아니고, 이쪽 주선자랑 마음이 잘 맞은 모양입니다.” “그게 무슨…….” “거두절미하고, 난 이 자리에서 만나는 여자와 결혼할 생각으로 나왔습니다.” 단호한 그의 목소리에 태리의 큰 눈이 더 커다랗게 떠졌다. 상대가 누구였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지만 심장이 쿵쿵 눈치 없이 뛰어대기 시작했다. “결혼하죠, 나랑.” 조금 전 종업원에게 메뉴를 주문할 때와 다름없는 건조한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