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부터 해 볼까, 우리.” 도망가도 된다고 말하는 가민을 향해 아정은 짐짓 여유로운 척 웃어 보였다. 피할 수 없다면 몸이 적응하는 게 나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그런 아정을 내려보는 가민의 눈동자가 서늘했다. 숨을 삼키기 힘들 정도로 두 사람을 감싼 공기가 팽팽해졌다. “그래, 그럼.” 잠깐의 침묵을 깬 가민이 제 멱살을 쥐고 있던 아정의 손을 쭉 당겨 자신의 목덜미를 잡게 했다. 도망가라고 한 건, 나는 멈출 자신이 없으니 네가 이쯤에서 그만두라는 경고와도 같은 말이었다. 권아정은 그걸 무시했고. “눈 감아.” 속삭이는 듯한 저음과 함께 가민이 몸을 기울였다. *** 서로가 원하는 조건을 내걸고 시작한 6개월간의 계약 연애. 16년 지기인 만큼 조금만 지나면 깔끔하게 마무리될 거라 예상했는데. 각자 맡은 역할에 너무 몰입했던 걸까. 아정은 가민의 행동이 점점 헷갈리기 시작했다. 과연 이 계약 관계는 우리에게 해가 될까, 득이 될까.
“한서 그룹 지분만 정리되면, 그땐 시간 낭비하지 않을 겁니다.”백시훈의 사랑이 진심인 줄 알았다.한서 그룹의 허울뿐인 딸, 현은아는 그렇게 남편의 마음을 믿고 있었다. 바보같이.그러나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뼛속까지 들어찬 감정은 한순간에 끊어지지 않았다.그래서 결심했다. 이 비참한 현실로부터 도망치기로.하지만 그 결심 끝에 마주한 건.“아악-!”현관에 덕지덕지 묻은 핏자국,그리고 남편의 실종이었다.* * *“남편분은 해리성 기억 상실증으로, 최근 기억의 일부가 없는 상태입니다.”실종되었던 백시훈이 돌아왔다.아내를 사랑하는 ‘척’하던 과거의 기억만을 가진 채로.당황한 것도 잠시, 은아는 달라진 그의 태도를 이용하기로 했다.그가 자신을 이용했던 것처럼.“사실 우리, 이혼하기로 했어요. 당신이 먼저 제안했고요.”“그걸 은아 너도 동의했다고?”“네, 어차피 우린 쇼윈도 부부였거든요. 그러니까…….”“어쩌지, 은아야.”입술이 닿을 듯 말 듯 한 거리에서, 그의 잔잔한 음성이 위험할 만큼 낮게 파고들었다.“나는 그렇게 쉽게 못 헤어지겠는데.”#무자각미친놈 #애증 #약혐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