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굴꾼. 불법 경매 상인. 그리고 후작 영애까지. 모두가 나의 신분이다. 황제의 명으로 도굴꾼 토벌을 맡은 테힐 공작은 유난히도 소심하고 조용한 후작 영애에게 자꾸만 눈길이 향했다. 도굴꾼 로즈와 밀라 코스터가 동일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물에 젖은 금발이 드러났다. 제국법으로 금지한 유물을 도굴하는 도굴꾼 로즈를 붙잡았다. 로즈를 생포하라는 황제의 명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녀였다. 그녀가 가진 힘, 끓어오르는 마족의 피를 잠재워주는 그 힘이 중요했다. ‘역시.’ 의식을 잃고 쓰러진 로즈의 복면 끄트머리를 살짝 잡아 끌어 내렸다. 정체를 가린 천이 사라지자, 지난밤 연회장에서 함께 춤을 추었던 여인이 자신의 앞에 있었다. “밀라 코스터.” 작게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마주한 무게가 느껴졌다. 토벌대 대장으로서 로즈를 붙잡아야 하는 책임과, 남자로서 밀라 코스터를 원하는 감정이 소용돌이 쳤다. *** 차라리 그가 다 알기 바라는 마음과 정체를 들키지 않아야 한다는 모순 때문에 심장 소리 말곤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공작의 손이 애타게 얼굴을 더듬었다. 그러다 손가락이 내 입술에 닿고서야 멈췄다. “그대를 지키기 위해 내가 포기한 것이 무언지 알고 있나?” 내 손으로 자신의 눈을 가린 그는 울고 있었다. “그만큼 너를 간절히 원한다.” 맞닿은 입술 사이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사기당했다. 그것도 열 살짜리 꼬맹이한테. 엄마가 필요하다는 아이가 안쓰러워서 몇 번 말벗이 되어 준 것뿐이었다. 아, 조금 놀아도 줬다. 그리고 밥도 사 먹였다. 생각해 보니 공부도 시켰다. 제법 보호자 같아 보이는 내가 어른스럽고 기특하기도 했다. 외롭다는 아이의 순진한 말에 속아서 공작저에 갇히기 전까지는 말이다. * * * 아스칼은 손가락으로 원탁을 톡톡 두드리며 고민했다. 이상적인 공작가의 후계자로 변해 가는 루블리온을 위해서라면 그녀가 옆에 있어야 한다는 걸 몸소 깨달았다. 새끼 표범같이 날뛰는 저 루블리온을 온순한 고양이로 만드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자작 영애니까. “네 보모로 고용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테지.” 그 자리를 슈미트가 관심 있어 하느냐가 문제다. “……그렇다면 아줌마의 책임감과 죄책감을 건드려 보는 건 어때요?” 루블리온은 계획서 맨 아래에 있는 일곱 번째 계획을 손으로 가리켰다. “제가 보기보다 아줌마 약점을 많이 잡았더라고요.” 공작과 비서관, 그리고 집사의 머리가 계획서 위에 모였다. 그들은 이 영악하고도 치밀한 열 살 아이의 계획을 보며 한마디씩 거들었다. “공자님 정말 훌륭하십니다.” “……난 너를 이렇게 키우지 않았는데.” “뭐, 저는 시키는 대로 하겠습니다.”
남사친이 내 소설에 빙의했다. 캐릭터의 모티브가 된 찐 남사친이 말이다. 거기다 나는 악녀다. 남자 주인공 손에 죽는 악녀. 아, 근데 이거 괜찮으려나? 이 소설 꽤 피폐한데……. 심지어 여주를 감금하고 조련하는 청소년 구독 불가의 고수위 로맨스 판타지인데. 어차피 돌이킬 순 없으니 원작 파괴를 막고 현실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자. 일단 감금하는 법과 집착하는 법부터 가르치자! * * * “야…….” “응?” 배시시 웃는 대공의 표정은 천진난만하고 순수했다. 하지만 손에 들린 노끈은 그렇지 않았다. “이제 이거 풀어.” “왜?” “연습은 끝났으니까.” “그래? 난 아직 연습이 더 필요한데.” 해맑은 얼굴 뒤로 속셈이 선명하게 보이는 저 얼굴은 뭐지? 내가 아는 그 녀석이 맞나? “만족할 때까지는 연습 상대가 되어 줘야지. 안 그래?”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는 기분이다. 왜 내가 감금당하고 있는 거지?
덜 성숙한 남자라고 생각했던 하인이 내 남편 앞에서 가슴을 가린 붕대를 풀며 여자임을 밝혔다. 정략혼에 사랑 없는 사이라도 남편의 외도를 지켜보는 것은 비참했다. “잠깐일 테니 괜히 시끄럽게 하지 말고 모르는 척하거라.” 시어머니는 한결같은 사람이었고. “당신 남편은 날 사랑해요.” 그 여자는 아름답고 우아한 드레스 차림으로 저택의 안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자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릴 하면서 말이다. *** 남편의 형이자 황태자 다음의 계승권을 가진 바르네스 힐바르도. 그가 내 발아래에 자신의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원한다면 동생 놈의 목을 베어 그대에게 바치겠다.” “전하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닙니다.” 가장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 황자가 끼어들 이유는 없었다. “분명 권력이 필요한 때가 오겠지. 그때 나를 도구로 써.” 그의 새파란 눈동자는 겨울 여왕의 마법처럼 시리게 아름다웠다. “대신 나와 결혼해. 그것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