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차인 두 남녀의 좌충우돌 로맨스“우리도 헤어지자.”프러포즈를 기대했던 란희에게 돌아온 것은 갑작스러운 이별이었다. 옆 테이블에 앉은 남자가 첫사랑에게 차이는 것을 보며 측은지심까지 가졌더랬다. 그와 같은 처지가 될 줄도 모르고.그 길로 한강에 가서 소주에 치킨을 뜯은 것까진 기억나는데……. 어째서 옆 테이블 남자가 옆에서 자고 있는 거지? 그것도 맨살에 재킷만 걸치고서?란희는 어렴풋이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렸다.“우리 서로 차인 김에 결혼합시다.”남자 친구에게 듣고 싶었던 프러포즈를 란희가 먼저 내뱉었다. 그것도 다른 남자를 상대로 말이다.술김에 입을 맞추고, 술김에 셔츠를 벗기고, 술김에 동침까지.모든 것이 술 때문이니 잊으려 했다. 그를 직장에서 만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고란희 씨, 책임지셔야죠!”이 남자, 자꾸 책임을 지란다. 정말 책임지고 싶어지게.
“그러게, 칼은 왜 쥐어. 그냥 찔러 버리지.” 예비 신랑의 바람을 목격하고 칼날을 움켜쥔 해주 앞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옆집 남자, 반재신이 나타난다. 단조로운 말투와 무감한 얼굴로 섬뜩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남자. 그런 그가 처음으로 감정을 드러냈을 때 해주는 낯설고 위험한 충동을 느낀다. 차라리 칼날을 쥐는 게 나을 것만 같은 그런. 충동적으로 입을 맞춘 해주에게 돌아온 남자의 대답은. “지금부터 그쪽이랑 잘 생각인데, 어때요?” “네?” “의사를 묻는 건 아니고. 시작은 그쪽이 먼저 했으니까.” 서늘한 남자가 건네는 온기에는 낯선 해방감이 존재한다. 그러나 하룻밤 꿈일 뿐이다. 오래된 소문이 만들어 낸 죄책감은 해주를 결혼식장으로 이끈다. 저도 다른 남자와 부정을 저질렀으니 부정한 것들끼리 부대끼며 살면 그뿐이라 여겼건만. “기해주 씨, 사람 참 우습게 만드네.” 웨딩드레스를 입은 해주 앞에 나타난 남자는 그날 밤의 기억을 거침없이 불러온다. “이쯤에서 관두는 게 어때요? 이 결혼 말입니다.” “지금 협박하시는 건가요?” “협박이 아니라 구원, 이라면요?” 해주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잿빛이 도는 검은 눈동자. 그 안에 인 파동을 마주한 순간, 이미 몰닉은 시작되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