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르만 헤세
헤르만 헤세
평균평점 5.00
데미안
5.0 (1)

데미안을 통해 참다운 어른이 되어 가는 소년 싱클레어의 이야기.한 폭의 수채화같이 아름답고 유려한 문체로 전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 감수성이 풍부한 주인공 싱클레어가 소년기에서 청년기를 거쳐 어른으로 자라가는 과정이 세밀하고 지적인 문장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진저한 삶에 대해 고민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 노력하는데미안과 싱클레어의 깊이 있는 이야기...

싯다르타

"정신적으로 신약성서보다 더 큰 치유력을 가진 작품”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헤르만 헤세의 종교적 성장소설▶노자의 『도덕경』 이후 내게 이보다 더 중요한 책은 없었다. 헤세는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시적으로 승화해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진 붓다를 넘어서 또 하나의 붓다를 창조하였다. 문학의 종교적·철학적 지평을 넓혀 준 헤세의 ...

헤르만 헤세 초판본 컬렉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전 2권)

코너스톤 《데미안(초판본)》, 《수레바퀴 아래서(초판본)》의 세트 상품입니다. (전 2권)...

헤르만 헤세 컬렉션: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전 2권)

코너스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의 세트 상품입니다. (전 2권)...

|지와 사랑

<개정판|지와 사랑> "이성의 사랑에서 볼 수 없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우정" 1930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삶의 의미와 인간의 진정한 가치와 존중을 깨닫게 하는 작품이다. “나르치스”가 인간의 금욕을 절제하며 인간의 완성으로 다가간다면 반대로 “골드문트”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 즉 자신의 욕구를 순수하게 인정하면서 완성으로 다가간다. 두 사람의 우정이 서로가 다름을 인정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완성되어 가는 것이 마치 아름다운 인간의 내면 예술 작품을 완성해 가는 것을 느끼게 하는 아름다운 책이다. <책 속으로> 골드문트, 나는 자네한테 많은 것을 배우고 있네. 예술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확실히 이해하기 시작했네. 전에는 예술이라는 것은 사상이나 학문에 비해 진지하지 못한 영역이라고 생각했었거든. 인간이란 정신과 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불안정한 혼합물이며, 정신은 인간에게 영원한 것에 대한 인식을 열어주는 데 반해 물질은 인간을 끌어내려 무상한 것에 속박시킨다고 생각했던 거지. 따라서 자신의 삶을 숭고하게 하고 의미 있게 만들려면 감각적인 것에서 벗어나 정신적인 것을 향해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라고 생각했었네. 내가 예술을 존중한다고 했었지만 그것은 의례적인 얘기였을 뿐, 속으로는 교만한 마음으로 예술을 경시하고 있었다네. 지금에야 비로소 나는 인식에 도달하는 길이 얼마나 다양한지를 깨달은 것 같아.

수레바퀴 아래서

<수레바퀴 아래서> 고루하고 위선적인 권위에 맞서 싸우는 어린 소년의 이야기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억압적인 가정과 학교의 종교적 전통, 권위에 짓눌려 괴로워하는 섬세한 소년 한스 기벤라트. 이 책은 고루한 전통과 권위에 맞선 어린 소년의 저항을 통해 무거운 수레바퀴처럼 한 인간을 억누르는 기성 사회에 비판을 가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세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다. 헤세 역시 어린 시절 엄격한 신학교의 규율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달아나는 등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보냈다. 하지만 한스 기벤라트는 헤세의 분신일 뿐만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젊은이들의 자화상이다. 이 작품은 누구나 겪는 기성 사회, 권위와의 갈등을 그려 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로 대립되는 세계에 속한 두 인물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눈 사랑과 우정, 이상과 갈등, 방황과 동경 등 인간의 성장기 체험을 순수하고 아름답게 그려 낸 헤세 문학의 대표작 ▶나로서는 이성 간의 사랑이나 우정에 관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 묘사되어 있는 것보다 더 대단한 체험은 하지 못했습니다. 이 소설은 나의 성장기 체험이 고스란히 담긴 ‘내 영혼의 자서전’입니다.―헤르만 헤세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독일적 낭만성과 현대 심리학의 분석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책이다.―토마스 만 ▶헤세의 소설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주인공이 그렇듯이 골드문트는 고정된 관습의 세계를 거부한다. 그는 끊임없이 낯선 세계와 부딪히며, 때로는 존재의 위기마저 감수하는 모험을 거쳐서야 비로소 자신의 자아가 지나온 삶의 총화임을 깨닫게 된다.―임홍배(서울대 독문학과 교수)

크눌프

<크눌프> 고독한 방랑자 크눌프 모든 구속과 탐욕, 집착을 버린 인생에 대한 성찰 크눌프는 헤세의 여러 작품의 주인공들과 형제인 동시에 작가의 분신이기도 하다. 그는 직업과 결혼을 통한 평범하고 안정된 생활을 거부하고, 세상을 자유롭게 떠돌며 자연과 사람들을 관찰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사랑한다. 『크눌프』가 처음 발표되었을 때 비평가들은 이 작품의 유려한 문체와 부드럽고 단순한 언어, 그리고 작품 속에 그려진 전원적인 풍경에 찬사를 보냈다. 또한 헤세는 그의 작품에 일관되게 나타나는 고독한 방랑자의 모습을 사실적이면서도 아름답게 그려 냄으로써 결코 젊음이 충동과 낭만으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이야기한다. ▶크눌프 같은 인물들이 저를 사로잡습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해롭지도 않습니다. 더구나 유용한 인물들보다는 훨씬 덜 해롭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바로잡는 일은 나의 몫이 아닙니다. 오히려 나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만약 크눌프처럼 재능 있고 영감이 풍부한 사람이 그의 세계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크눌프뿐만 아니라 그 세계에도 책임이 있다고.―헤르만 헤세, 어느 독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헤르만 헤세 선집 06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선집 06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6.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헤세의 작품 연보에서 '문학적 개가(literary triumph)'로 간주되는 작품이다. 헤세가 창작 생활의 말년에 발표한 이 소설은 출간과 동시에 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데미안>과 더불어 헤세의 명성을 대중적으로 널리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다. 한때 <지와 사랑>이라는 내용과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 의역된 제목으로 국내에 소개되었으나 책의 두 주인공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지성과 감성, 종교와 예술, 학문과 자연, 아폴론적인 질서와 디오니소스적인 광휘의 속성으로 대립된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기질적으로 다른 두 사람이 삶을 바라보고 택한 길은 서로 정반대인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진리라는 하나의 지점을 향해 다른 길을 걸은 것이라는 사실을 서로에 대한 사랑과 우정으로 깨닫는다는 이야기로 요약할 수 있다. 소설의 시대적 배경과 시간적 흐름은 상당히 모호하다. 흑사병이 창궐하는 장면 때문에 중세로 짐작되지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누는 철학적 담론은 상당히 현대적이다. 이야기 자체의 플롯이 상당히 구체적이긴 하지만 헤세가 역사적인 정확성이나 시간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한 것은 이 책을 이야기 위주의 사실적인 소설로보다는 일종의 철학소설로 읽어야 함을 알려준다. 골드문트의 방랑을 중심으로 놓고 보자면 이 소설의 주요 테마도 헤세의 대부분의 다른 소설과 마찬가지로 자신을 찾아가는 방랑자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크눌프, 싯다르타, <데미안>의 에밀 싱클레어, <황야의 늑대>의 하리 할러 등과 마찬가지로 골드문트도 자기실현을 위한 방법으로서 방랑을 택하고 길 위에서의 수많은 만남을 통해 어떤 깨달음에 도달하게 된다. 방랑자 계열의 헤세의 모든 소설 중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연도순으로 보면 가장 나중에 발표된 작품이다. 그런 만큼 헤세의 질풍노도의 청소년기와 치열한 구도의 과정이 총망라되어 있는 헤세의 방랑자 소설의 완결판이라 할 수 있다. 사유의 깊이와 이야기의 단순성과 명확성, 독자들을 감동시키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두 주인공의 뜨거운 사랑과 우정은, 내용(관념)과 형식(플롯)이 행복하게 결합된 헤세의 걸작으로 이 소설을 자리매김하게 만들었다. ■ 줄거리 지성을 대표하는 수도사 나르치스는 매사에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자세를 취하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학문적인 깊이로 삶의 진리와 신에 다가가려 한다. 그 수도원에 어느 날 골드문트라는 감성이 남다른 학생이 들어오게 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학문적 깊이에 열등감을 느끼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감성적 잠재력을 알아보고 두 사람은 기질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영혼의 친교를 맺게 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의 가르침을 받으면서 나르치스를 자신의 스승으로 생각하지만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두 사람의 차이는 기질에 차이에 불과하며 골드문트가 지닌 감성의 힘이 얼마나 큰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지 깨우쳐 준다. 골드문트의 기억 속에 억압되어 있던 자유분방한 어머니의 영향력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나르치스를 통해 깨닫게 된 골드문트는 자신의 기질을 올바로 인식하고 수도원을 떠나 방랑과 편력의 길을 떠난다. 수도원에 있을 때 죄악시하던 여자들과의 육체적인 사랑을 통해 자유분방한 자신의 참모습을 발견한 골드문트는 스스로를 억압했던 윤리 도덕에서 벗어나 자연과 사랑 속에서 영혼을 키워 나가는 한편 흑사병의 창궐로 지옥도처럼 펼쳐지는 세상의 풍경과 그 속에서 만난 길동무들과 두 번의 살인, 유대인 학살 등을 목격하며 삶의 희노애락을 깊이 있게 받아들인다. 골드문트는 어느 날 우연히 한 조각상을 보고 그것을 통해 예술의 깊이 있는 표현력에 대해 감명을 받고 장인 조각가 니클라우스를 찾아간다. 어렵게 그의 밑에서 작품을 맡게 된 골드문트는 자신의 모든 경험을 응축시킨 걸작을 만들고 작품의 예술적 완성도를 꿰뚫어본 니클라우스한테서 자신의 후계자가 될 것을 제안받지만 직업으로서의 예술에 관심이 없는 골드문트는 약속된 밝은 미래를 버리고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다시 방랑의 길로 접어든다. 총독의 애첩 아그네스와 간통을 저지르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선고받은 골드문트는 사형 집행 전날 자신의 고해성사를 위해 도착한 신부가 나르치스임을 알게 되고 나르치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다. 수도원장의 자리에 올라 있는 나르치스는 골드문트를 수도원으로 데려오고 그에게 작업실을 제공한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가 깨우쳐 준 어머니와 그가 사랑했던 모든 여인들의 이미지를 집약한 마리아 상을 제작한다. 그리고 마리아 상을 통해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의 방랑과 편력이 그의 삶과 행복하게 일치했다는 것을 깨닫는다. 늙어서 기력이 떨어진 골드문트는 삶에 대한 아무런 회한도 없이 친구 나르치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최후의 시간을 맞이한다. ■ 추천사 헤세의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시적 영민함과 독일 낭만주의적 색채와 현대심리학, 즉 정신 분석학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있는 탁월한 책이다. - 토마스 만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한 명의 예술가에게 깊은 감명을 주는 책들 중의 하나이다. 책 속에는 독특한 매력과 위대한 지혜가 담겨 있다. 이 소설은 예술의 형이상학에 대한 하나의 카덴차라고 할 수 있다. - 헨리 밀러 작품 전체가 중세 독일을 배경으로 한 놀라우리만치 생생한 한 편의 영상이라 할 수 있다. 그 속에는 낭만주의와 사실주의가 함께 녹아 들어가 있다. 햇과일처럼 풋풋하고 향기로우며 알차다. 고루한 교훈을 강요하지도 않으며 그렇다고 특별한 문제점을 전면에 드러내지도 않는다. 철저히 자기 성찰적이다. 이 소설은 헤세의 어떤 작품보다도 더 문학의 영속적 가치를 계승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작품이다. -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어티우스 ■ 본문에서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선에 대한 사랑과 반드시 일치하지는 않아. 그게 그렇게 간단하다면 얼마나 좋겠니! 우리가 알고 있듯이 무엇이 선인지는 계율에 쓰여져 있지. 하지만 하느님은 계율 속에만 존재하시지 않아. 계율이란 하느님의 지극히 작은 일부일 뿐이야. 계율을 지키더라도 하느님에게서는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다는 말이야."" ""너한테는 차이라는 것이 그다지 중요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차이만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야. 나는 본성상 학자이며 내 숙명은 학문을 연구하는 거야. 그리고 학문이라는 것은 네 말을 빌리자면 ’차이를 발견하려는 집념‘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야. 학문의 본질을 그보다 더 잘 설명할 수 있는 말은 없을 거야. 우리 학문하는 사람한테는 다양성을 확인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어. 학문이란 말하자면 차이점을 찾아내는 기술이라고도 할 수 있지. 예를 들어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어느 사람의 특징을 찾아낸다는 것은 곧 그 사람을 안다는 것, 그 사람을 인식하다는 것이야."" ""강렬하고도 섬세한 감각을 가진 사람들, 영감을 가진 사람들, 몽상가들, 시인들, 혹은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보다는 대개 우월하기 마련이야. 너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모성의 풍요로움을 타고난 존재들이야. 그런 사람들의 삶은 충만해. 사랑의 힘과 체험의 능력을 부여받은 존재이기 때문이지. 우리 같은 정신적 인간들은 종종 너와 같은 사람들을 이끌고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충만한 삶을 전혀 모르고 메마른 삶을 살아가고 있어. 넘치는 삶, 과일의 단물처럼 풍성한 삶, 사랑의 정원, 예술의 아름다운 땅은 바로 너희들의 것이지. 너희들의 고향은 대지이며, 우리들의 고향은 관념이야. 너희들의 위험이 감각의 세계에 빠져 익사하는 것이라면, 우리들의 위험은 진공 상태의 대기에서 질식하는 거야. 너는 예술가고 나는 사상가야. 네가 어머니의 품에 잠들어 있다면, 나는 황야에서 깨어 있는 거야. 나에게는 태양이 비치지만, 너에게는 달과 별이 비치지"" 여자와 사랑, 그것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와 사랑은 사실 말이라는 것이 필요치 않았다. 농부의 아내도 단 한마디로 그에게 밀회의 장소를 지정해 주었고, 그 외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대체 무엇으로 의사를 표현한 것일까? 그래, 눈으로 표현했다. 그리고 약간 쉰 목소리에 담긴 어떤 울림과 어떤 향기로. 남녀가 서로를 원할 때면, 살결에서 풍겨 오는 그 부드러운 향기를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것은 섬세한 비밀의 언어였다! 어쩌면 모든 예술의 뿌리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일 것이다. 모든 정신의 뿌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덧없이 사라지는 것 앞에서 몸부림치고, 꽃이 시들고 잎이 떨어지는 것을 슬픔으로 바라본다. 우리들 역시 덧없이 사라지고 금방 시들어 버릴 것임을 가슴속에서 확신하고 있다. 그런 우리가 예술가로서 어떤 형상을 창조하거나 사상가로서 어떤 법칙을 탐구하고 생각을 체계화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거대한 죽음의 무도로부터 구해 내려는 행위이다. 우리 자신보다 더 오래 영속될 무언가를 세우기 위해 그러한 작업을 하는 것이다. 그는 사랑에 대해 그러하듯 사랑이 주는 우수와 무상함에도 몸을 완전히 내맡겼는데, 그러한 비애도 그에게는 사랑이요 쾌감이기 때문이었다. 사랑의 환희가 최고의 절정에 이른 순간에 맛보는 극치의 쾌감이 다음 순간 곧 사멸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아무리 내밀한 고독과 슬픔에 빠져 있던 인생도 다시금 밝고 새로운 어떤 것에 몰입하고 싶은 욕구가 생기기 마련이었다. 죽음과 쾌락은 하나였다. 사랑 또는 욕망을 인생의 어머니랄 부를 수 있다면, 무덤과 사멸 또한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어느 경우든 방랑자는 언제나 무엇을 소유하고 안주한 사람들의 적대자이며 원수이다. 그들은 방랑자를 미워하고, 멸시하며,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모든 존재가 덧없다는 것을, 일체의 생명은 끊임없이 시들어 간다는 것을, 우리 주위를 얼음처럼 차디찬 죽음이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모든 생명은 분열과 모순을 통해 풍요로워지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도취의 상태를 모르는 이성과 냉철함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배후에 죽음이 없는 관능적 욕망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이성 간의 영원한 대립이 없다면 사랑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동방 순례

<동방 순례> 상징과 지혜로 가득한 소설 헤세는 인간의 본질과 정신세계의 문제를 구도자와 같은 자세로 성찰하고, 인류 보편적 원칙들을 규명하려고 노력했던 작가로 유명하다. 같은 맥락에서 그의 대표작 가운데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소설은 1932년 출간되어 양차 세계대전 사이 급변하는 정치·사회·문화 환경에서 인류가 나아갈 길과 새로운 지도자상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오늘날 혼란스러운 정치 사회적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모든 위대한 고전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표면적으로는 순례에 나선 주인공 H.H.(헤르만 헤세의 이니셜과 일치한다)의 놀라운 체험과 복잡하게 얽힌 줄거리가 독자의 흥미를 끌고 관심을 사로잡지만, 그보다 더 깊은 층위에서는 인류가 그간 쌓아온 유산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 그리고 무엇보다도 새로운 지도자의 유형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에게 깊은 성찰을 촉구한다. 아울러 시대를 뛰어넘어 같은 시간과 공간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과 판타지 소설을 방불케 하는 사건들은 신화적 후광을 받은 작가 개인의 사적인 체험과 보편적 인류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 상징적 가치를 주목할 만하다. 순례단이 향하는 ‘동방’이 우리 각자의 미래든, 도(道)이든, 인류가 추구하는 이상형이든 독자는 이 소설에서 지금 이 순간 자신이 놓여 있는 현실과 우리 사회와 세계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생각해보게 될 것이다.

황야의 이리

<황야의 이리> 숨 막힐 정도로 집요한 자아 성찰과 냉철한 문명 비판 병적이면서도 아름답고 환상적인, 헤세의 가장 대담한 소설 ▶나는 독자들에게 나의 작품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정해 주고 싶지 않고 그렇게 할 수도 없다. 각자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취하기를! 그렇지만 만약 독자들이 『황야의 이리』가 병적인 것과 위기를 묘사하고 있음에도 죽음이나 몰락으로 치닫지 않고 반대로 치유에 이르고 있음을 알아차려 준다면 기쁠 것이다.―헤르만 헤세 ▶정결하면서도 대담하고, 몽환적이면서도 이지적인 헤세의 작품은 전통과 애정과 기억과 비밀로 가득하다. 그의 작품은 상쾌함을 문화적 의미에서 새로운 정신적인 단계, 실로 혁명적인 단계로 고양시킨다.―토마스 만 ▶주인공 하리 할러가 앓았던 영혼의 병은 ‘한 인간의 괴팍함이 아니라 시대의 병리 그 자체이며 할러가 속한 세대의 노이로제’이다. 그것은 두 세대 사이에 끼인 자들의 정신적 상처이다.―「작품 해설」 중에서

게르트루트

<게르트루트> 헤세의 소설 중 가장 파란만장하고 드라마틱하며, 언어의 아름다움이 더할 나위 없이 빼어나게 구사된 작품 이번에 문예출판사에서는 《페터 카멘친트》와 《수레바퀴 아래서》에 이은 헤세의 세 번째 장편소설 《게르트루트》를 출간했다. 《게르트루트》는 헤세의 소설 중에서도 가장 소설적인 구성을 갖추었다고 평가받는 음악 소설이다. 헤세의 첫 번째 아내 마리아는 슈만과 쇼팽을 좋아했던 피아니스트였으며, 헤세는 아내의 영향을 받아 자연스럽게 음악과 함께하는 삶에 녹아들었다. 《헤르만 라우셔의 유고》와 《청춘시집》의 성공으로 한창 문명(文名)을 드높이던 시기의 헤세는 대도시의 삶을 선택하는 대신 한적한 시골 마을 가이엔호펜에 농가를 빌려 전원생활을 시작했고, 시인, 화가, 음악가 등과 교류하면서 자연과 음악, 예술이 어우러지는 낭만적인 분위기 가운데 수작 《게르트루트》를 써냈다. 스스로 자신의 소설이 “본래 소설이 아니라 영혼의 고백”이라고 평가하는 헤세지만 《게르트루트》는 가장 소설다운 구성을 갖춘 작품이다. 그러나 ‘고독한 예술가의 고백’이라 할 수 있는 《게르트루트》는 행복에 대한 의미 탐구, 삶에 대한 치열한 묘사와 고뇌라는 점에서 역시 헤세 자신을 묘사한 자전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름다운 바이올린 선율처럼 펼쳐지는 청아한 언어의 향연 속에 연인에 대한 사랑과 삼각관계로 인한 절망이 그려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독자 여러분은 젊은 시절의 고독과 방황, 인생의 참된 의미와 행복의 의미를 되씹어볼 수 있을 것이다. 《게르트루트》 줄거리 주인공 쿤은 학창 시절 불의의 사고로 불구자가 된 후 음악에 심취해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아가며, 아름다운 여인 게르트루트를 만나 격정적인 사랑에 빠진다. 주인공 쿤과 성악가 무오트, 게르트루트는 이로써 애증의 삼각관계를 형성한다. 쿤의 연적이라 할 수 있는 무오트는 격정적이고 마성적인 인물로 고독에 굶주려 있다. 쿤이 사랑하는 여인 게르트루트는 고아하고 귀족적이며 자기 통제가 강한 고독한 영혼의 소유자로, 정반대 성격인 무오트에게 이끌려 그와 결혼한다. 주인공 쿤은 불구로 인해 한층 고독해졌으나 본디 일상생활에 순응해갈 수 없는 ‘불행한 예술가 타입’으로, 이처럼 사랑의 실패 후 수동적이고 자기 성찰적인 체념과 고독 속에서 인생을 살아나간다. 그러나 쿤은 이 같은 큰 고독과 절망 속에서도 음악의 세계에 전념하며 음악가로서 생의 의미를 찾는다.

데미안 초판본

<데미안 초판본> 나를 찾아가는 길, 《데미안》 오리지널 표지 디자인! 1919년의 ‘싱클레어’가 다시 찾아옵니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1919년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판한 소설이다. 당시 문단에서 대문호로 인정받던 헤르만 헤세는 작가로서 자신의 소설이 작품성만으로 인정받는지 확인해보고 싶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명작가 ‘에밀 싱클레어’를 궁금해했고, 헤르만 헤세는 자신이 ‘에밀 싱클레어’라는 사실을 밝혔다. 더스토리에서 출간한 초호화 양장 에디션 《데미안》은 1919년 헤르만 헤세가 ‘에밀 싱클레어’라는 이름으로 출판한 초판본 표지 디자인을 그대로 따랐다. 《데미안》은 헤르만 헤세가 자신의 정체를 밝힌 이후, 1920년 판본부터 저자 이름을 헤르만 헤세로 바꿔서 출판했다. 20세기 센세이션을 일으킨 성장 소설의 고전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 1

<유리알 유희 1> 엄격한 자기수양을 통해 내면세계를 탐구하는 여정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의 마지막 걸작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작 헤르만 헤세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인류 최대의 비극을 몰고 온 정신적 문제가 무엇인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욕망과 금욕, 혼돈과 질서, 삶과 죽음, 동양과 서양, 선과 악 등 양극의 문제를 풀기 위한 평생의 고민을 이 소설 속에 풀어 놓았다. 균형과 조화를 찾아가는 주인공 요제프 크네히트의 삶 자체가 바로 그 과정이자 답이라고 할 수 있다. 1943년에 출간된 『유리알 유희』는 21세기에도 중요한 화두인 지식 정보 사회, 멀티미디어, 판타지, 가상현실, 정신 건강과 명상을 중요한 모티프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현대적인 고전으로 평가받는다.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생사의 대립과 시공의 경계를 넘어 진실의 약동을 그리려 한 화가 클링조어 독일 문학의 거장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 헤세는 이 작품을 집필할 당시 재정난과 아버지의 사망, 아내의 우울증과 막내아들의 발작 등으로 엄청난 정신적 위기를 겪고 있었는데, 여름 한 달 만에 써 내려간 이 소설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죽음을 앞두고 가장 크고 밝은 마지막 불꽃을 피워 올리는 화가 클링조어의 모습 속에는 이러한 헤세의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클링조어가 생사의 대립을 무화하고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이며 자신을 남김없이 불태워 최후의 작품을 완성하는 생애 마지막 여름의 삶은 1차 세계대전 이후 피폐해진 유럽 사회에 몰락을 선언하고, 소멸을 통한 새로운 탄생을 희구하는 전환기의 초상이다. 감각적인 언어들로 그려 내는 클링조어의 그림 속 스위스, 이탈리아 등지의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작가이자 화가인 헤세가 내뿜는 그림에 대한 열정도 엿볼 수 있다.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은 사랑에 대한 헤세의 소설과 에세이 열여덟 편을 모은 책이다. 어린 시절 스쳐지나간 첫사랑의 아련함을 다룬 소설에서부터 사랑에 대한 심도 깊은 성찰이 담긴 에세이까지, 한 편 한 편이 모두 주옥같은 작품들이다.

페터 카멘친트

<페터 카멘친트> 헤세가 작가로서의 명성을 떨치게 된 첫 번째 작품으로서 고독과 방랑의 시인 헤세에게 확고한 문학적 지위를 안겨주었다. 이 책은 헤세 자신의 청년 시절의 추억을 솔직하게 묘사한 자전적 소설이다. 메마른 도시의 삶에 회의를 느끼며 방황하던 주인공이 삶의 기쁨이 되는 친구를 만나지만 헤어지고, 사랑하는 여인을 찾았지만 역시 잃어버리는 아픔을 경험하고는 다시 고향인 자연으로 돌아가 인간애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와 깊이 연결된 어떻게 사랑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끊임없이 사색한다. 어떠한 환경 속에서도 스스로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는 메시지는 헤세의 모든 작품에 일관되어 있다.

헤르만 헤세 선집 10 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선집 10 페터 카멘친트>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10. 페터 카멘친트 <페터 카멘친트>는 헤세의 처녀 장편소설이다. 우리에게는 <데미안>, <싯다르타>, <수레바퀴 밑에> 같은 작품들에 비해 덜 알려진 편이지만 헤세를 문학 지망생에서 한 명의 어엿한 작가로 인정받게 만든 의미 있는 작품이다. 이 첫 작품은 바우어른펠트상을 헤세에게 안겨주기도 했다. 헤세의 문학적 역량을 최초로 입증한 작품이고, 헤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신념과 세계관을 고찰하고 분석하는 데 토대가 되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는 만큼 그 가치는 결코 이후의 작품들보다 덜하지 않다. <페터 카멘친트>는 낭만주의의 영향이 짙게 느껴지는데 알프스 주변의 풍경과 그곳의 사람들에 대한 서정적인 필치가 특징적이다. 산골 소년이 도회지로 떠나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경험을 통해 시인으로 성장하는 내면의 발전 과정을 그린 이 작품은 헤세의 다른 여러 소설들과 함께 성장소설로 분류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의 주인공은 낯선 세상과 부딪혀 그 세상과 화해하는 과정을 겪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세상과의 충돌 이후 고향의 자연으로 돌아와 내면화 혹은 개인화의 길을 걷는다. 이런 면에서도 이 작품은 사회적인 관계보다는 인간 내면의 영혼 쪽으로 포커스를 맞춘 이후 헤세 성장소설들의 초석으로 평가받을 수 있을 것이다. 주제 면에서 이 작품은 헤세의 다른 성장소설들과 큰 차이는 없지만 내용과 스타일 면에서는 상당히 이질적인 면을 보인다. 양극성의 대립 과정과 그것이 통합되어 조화를 향하는 이중성, 혹은 양극성의 도식적 구도를 내포하고 있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페터 카멘친트>는 예술가 계열 소설인 <게르트루트>나 자전적 요소가 강한 <수레바퀴 밑에> 같은 작품들처럼 사실주의적인 스토리와 등장인물의 캐릭터가 생생하게 살아 있다. 알프스를 배경으로 한 자연에 대한 생생한 묘사는 이 작품을 한 편의 '시적 지질학'이라고 평가받게 하기도 하는데 태양과 구름, 산과 바다, 나무와 풀잎 등 모든 살아 있는 자연 속의 존재들을 형상화하고 찬미하는 헤세의 언어에는 '진실성'과 '감정'과 '사상'이라는 그윽한 음성이 고상하게 퍼져 나온다. 한 산골 소년이 학문과 예술을 접하고 사랑과 우정, 그리고 가까운 사람들의 죽음을 체험하면서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삶을 이루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이 이야기는 '시인이 아니면 그 무엇도 되고 싶지 않다'고 한 질풍노도 시기 헤세의 또 하나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다. ■ 줄거리 높은 산에 둘러싸인 호숫가 산골마을 니미콘은 카멘친트 가문의 집성촌이다. 농부의 아들 페터 카멘친트는 그곳에서 자연을 벗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낸다. 산과 들과 호숫가를 혼자 쏘다니고 험준한 바위산, 뾰족한 봉우리들 위로 흘러가는 구름, 폭풍우와 맞서 싸우는 절벽 위의 소나무들을 바라보며 자연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 열 살 때 처음 올라가 본 젠알프 봉우리에서 눈앞에 펼쳐지는 탁 트인 세상을 내려다본 뒤부터 아득한 산 너머 넓고 먼 세계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된다. 진학하기 위해 마을을 떠난 페터는 학교에서 처음으로 문학을 접하고 진지하게 시나 소설을 써보기도 한다. 취리히에서 대학 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친구 리하르트가 잡지에 몰래 그의 글을 기고한 일을 계기로 문예비평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잡문이 아니라 시를, 위대하고 독특한 삶과 동경의 노래를 쓸 날이 오리라는 은밀한 희망을 마음에 품고 있다. 우울한 기분이 엄습해 오는 밤이면 창가에 누워 검은 호수와 창백한 하늘과 빛나는 별을 바라보며, 말 없는 자연을 시로 표현하는 것이 진정한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죽음과 절친한 친구 리하르트의 죽음 그리고 실연의 아픔 탓에 페터는 한동안 술과 방랑으로 점철된 방탕한 생활을 보낸다. 우울증이 깊어져 죽음에 대해 생각하며 괴로운 시간을 보내지만, 어느 날 문득 고요하고 엄숙했던 어머니의 임종의 순간을 떠올리면서 자살 충동을 극복하고 삶의 의지를 되찾는다.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성자 프란체스코의 발자취를 더듬고 그곳에서 만난 사람들의 소박하면서도 자유롭고 쾌활한 생활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은 카멘친트는, 도시 생활과 현대 문명에 염증을 느끼면서 자연을 언어로 표현하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소명에 대해 다시 한 번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페터는 늙은 아버지를 돌보며 마을의 술집을 인수해 정착할 계획을 세운다. 긴 세월 동안 타지를 떠돌다가 결국 다시 고향에 돌아온 니미콘 마을의 페터 카멘친트는 이제 자연뿐 아니라 인간에 대한 애정이 가득한 진정한 시인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준비가 되었다. ■ 추천사 이 소설은 만족과 충만을 발산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소설은 한 젊은이의 작품이자 고백인데, 만족과 포만감이라는 것은 청춘의 특질에 속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 헤르만 헤세 이 책은 호전적 애국주의를 배제한 순수 독일적인 정취와, 영혼의 매춘행위를 떨쳐낸 경건함이 묻어나는 작품이다. 실로 모든 생명체에 대한 진실하고 위대한 사랑이 탁월하게 묘사되어 있다. 태양과 구름, 산과 바다, 나무와 풀잎 등 모든 살아 있는 존재들을 형상화하고 찬미하는 헤세의 언어 속에는 ‘진실성’과 ‘감정’과 ‘사상’이라는 그윽한 음성뿐만 아니라 익숙하고 친숙한 음향까지도 한층 더 새롭고 고상하게 퍼져 나온다. - 발터 라테나우 우리는 오늘날 이 작품 속에서 단순히 감정의 소용돌이에 휩싸인 한 젊은이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시대성에 토대를 두면서도 초시대적 파급력을 갖는 만큼 산문의 형태를 빌은 거대한 서사시로 보는 것이 오히려 타당하다. 그 안에는 주옥같은 글들이 섬광처럼 빛을 발하고 있으며 그 세련미 또한 더할 나위 없이 눈부시다. 산악의 성층을 비롯해 구름과 ‘푄’에 대한 고전적 묘사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은 한편의 ‘시적 지질학’이 된다. - 오시프 칼렌터 ■ 본문에서 우리 마을의 남자들과 여자들도 그들을 닮아서 거칠고 깊게 주름이 패었고 말이 거의 없었는데, 훌륭한 사람들일수록 말수가 적었다. 그래서 나는 사람들을 나무나 돌처럼 바라보며 그들에 대해서 생각을 하고 그들을 말없는 소나무보다 덜 존경하지도 더 사랑하지도 않는 법을 배웠다. 정의로운 자들과 죄를 지은 자들 사이에 서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즐기곤 했던 많은 사람들 속에는 아버지도 끼어 있었다. 어떤 어리석은 짓이 벌어질 때마다 아버지는 몹시 동요했다. 그리고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한 사람에게 공감하며 감탄하거나 자신은 그런 결함이 없다는 두둑한 자부심을 내비쳤는데, 그 두 감정 사이를 우스꽝스러울 만큼 오락가락했다. 부끄럽지만 나는 조금씩 시를 쓰기 시작했다. 몇 권의 노트가 차츰차츰 시와 초안과 짧은 이야기들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것들은 지금은 이미 사라져 버렸고 아마 거의 가치도 없었겠지만,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비밀스러운 기쁨을 가져다주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시도 후에 아주 서서히 비평과 자기성찰이 뒤따랐다. 그 소녀를 위해서 한 일이 많았다. 마침 짧은 방학을 맞아서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매일 온갖 힘든 일을 했는데, 모두 마음속에서 뢰지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험난한 산봉우리를 가장 가파른 쪽에서 올랐고, 호수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으로 조각배를 타고 빠듯한 시간 안에 지치도록 노를 저어 가기도 했다. 그렇게 힘들게 배를 타고 나서 기운이 다 빠지고 허기진 채로 돌아왔을 때 저녁때까지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것이 뢰지 기르타너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먼 산등성이와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던 깊은 골짜기까지 들어가 그 소녀의 이름을 부르며 찬미했다. “그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드는지, 불행하게 하는지, 아니면 둘 다인지 물어봐도 될까요?” “아아, 사랑은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은 우리가 고통을 당하고 그것을 견디면서도 얼마나 굳건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술은 지금까지 내가 얘기했던 그 무엇보다도 나의 삶과 존재를 위해서 훨씬 더 중요했다. 힘세고 감미로운 술의 신은 나에게 충실한 친구였고 오늘날까지도 그러하다. 누가 그만큼 강력한가? 누가 그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이고 열정적이고 명랑하면서도 우울할 수 있을까? 그는 영웅이자 마술사이다. 유혹하는 자이자 에로스의 형제이다. 그는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수 있다. 가련한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고 놀라운 시로 채운다. 그는 은둔자이자 농부인 나를 왕으로, 시인으로, 현자로 만들었다. 텅 비어버린 삶의 배에 그는 새로운 운명을 실어 넣고 난파당한 자를 커다란 삶의 급류 속으로 몰아넣는다. 문학이나 예술에 대해서 이야기해야 한다는 게 끔찍했다. 그 분야에 관해서는 사람들이 거의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 무척 거짓말을 많이 하고 어쨌든 이루 말할 수 없이 잡담을 많이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도 같이 거짓말을 했지만 전혀 즐겁지 않았고 쓸모없고 자질구레한 수다가 지루하고 품위를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어떤 부인이 자기 아이들에 대해서 하는 이야기를 듣거나, 여행이나 그날그날 경험한 소소한 일들이나 다른 현실적인 일들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러면서 나는 때때로 친밀함을 느끼고 거의 만족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국 그러한 저녁이면 또 술집을 찾았고 갈증으로 타는 목과 냄새나는 지루함을 벨틀린 포도주로 씻어 버렸다. 남쪽 나라에서 기분 좋고 따뜻한 사람들과 한동안 섞여 생활하다 보면 집에서도 계속 그렇게 살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탈리아 여행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 또한 그랬고, 당시에는 특히 더했다. 바젤로 돌아온 뒤 그곳의 낡고 답답한 생활이 전혀 새로워지지도 달라지지도 않았음을 깨닫자, 나는 명랑한 기분의 정상으로부터 한 계단 한 계단씩 기가 꺾이면서 불쾌하게 내려왔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 가운데 어떤 것은 계속해서 싹이 터서, 내 작은 배는 맑은 물에서든 흐린 물에서든 적어도 다채로운 색깔의 작은 깃발만은 언제나 대담하고 정답게 휘날리며 흘러갔다. 이제 나의 인생행로와 삶을 위한 노력들을 되돌아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고 농부는 시골에 살아야 하며, 아무리 재주를 부려 봤자 니미콘 마을의 카멘친트는 도시인이나 세계인이 될 수 없다는 해묵은 경험을 나 역시 체험했다는 사실이 기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한다. 나는 이제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데 익숙해졌고, 세상의 행복을 찾으려고 서툴게 추구하다가 본의 아니게 다시 호수와 산으로 둘러싸인 옛 두메산골로 되돌아와서 기쁘다. 나는 산골에 속한 사람이고, 거기에서는 내 미덕과 악덕, 특히 악덕이 그저 평범하고 흔한 것이다. 저 바깥세상에서 나는 고향을 잊었고 나 자신을 거의 희귀하고 기묘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것이 내 안에 유령처럼 따라다니는 정신, 바깥세상의 관습에 순응할 수 없는 니미콘 사람들의 정신일 뿐이었다는 것을 다시 깨달았다.

Demian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319)

<데미안> 영문판. 1919년에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경장편소설. 이 작품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상을 입은 ‘싱클레어’라는 청년의 수기(手記)형식으로 되어 있다. 싱클레어는 부모의 따뜻한 보살핌과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 안에서 자라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는 부모가 품어주는 밝은 세계의 평안함 속에서 안락(安樂)을 누렸지만, 동시에 부모의 세계 밖에 있는 어둠의 세계에도 두려움과 함께 호기심을 갖고 접촉하고 있었다. 그곳은 때로는 욕설과 싸움이 있었지만, 때로는 솔직한 감정의 교류가 그를 유혹하고 있었다. 싱클레어는 자신의 환경으로부터 밝음과 어둠의 두 세계를 발견하고 모두 마음에 품으면서, 어느 곳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한 채 갈등하던 중 연상(年上)의 친구 ‘데미안’을 만나게 되는데...

초판본 싯다르타

<초판본 싯다르타> 1922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초호화 양장 블랙벨벳 에디션! 세상의 근원을 탐구하며 ‘참 나’를 찾아가는 길 《싯다르타》 20세기 독일 문학가들 가운데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작가를 꼽으라고 한다면 단연 헤르만 헤세일 것이다. 내면의 탐구자이자 자아 성찰의 대표 작가인 헤르만 헤세는 휴머니즘을 지향하며, 고뇌하는 청춘과 자연에 대한 동경, 인간의 양면성 등을 작품에 담았다. 도서출판 더스토리는 헤르만 헤세의 대표작인 《싯다르타》를 초호화 양장 블랙벨벳 에디션으로 제작하였다. 벨벳 특유의 고급스러운 색감과 감촉뿐만 아니라 1922년 출판된 독일 피셔 출판사의 초판본 표지디자인을 그대로 되살려 소장 가치를 한층 높였다. 또한 실로 꿰맨 정통적인 사철 제본을 통해 책의 내구성을 높이고 펼쳐 읽기도 편하게 만들었으며, 블랙벨벳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고급스러운 금박을 재현하여 오리지널 초판본의 품격과 가치를 담아냈다. 그리고 독일 문학 연구자인 역자의 깊이 있는 번역은 자서전적이고 철학적인 헤르만 헤세 문학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해줄 것이다.

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수레바퀴 아래서: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강압적인 교육과정과 편협한 어른들이 주는 부담 속에 파괴되어 가는 어린 영혼의 소리 없는 절규!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로 만나는 『수레바퀴 아래서』! 성적 위주의 교육 속에서 경쟁에 지쳐 자신을 잃어버린 모든 이들에게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 자신의 청소년기를 반영한 자전적 소설이다. 이제 『수레바퀴 아래서』를 190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로 소장해보자! 총명한 소년 한스는 주위 어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려운 신학교 입학시험 공부에 매진한다. 좋은 성적으로 시험을 통과한 한스는 신학교에서 감수성이 예민하고 활동적인 하일너를 만나 우정을 나누지만 그만큼 공부에 흥미를 잃어가고, 교사들은 이런 두 사람을 더욱 엄격하게 관리한다. 이에 반항해 신학교를 무단이탈한 하일너는 결국 퇴학당하고, 홀로 남은 한스는 성적에 대한 스트레스와 교사들의 질타, 친구들의 무관심을 견디지 못하고 신학교를 떠나는데….

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데미안: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내면에 우러나오는 진정한 운명을 위해, 자기 자신을 찾아 헤맸던 한 어린 영혼의 치열한 여정! 에밀 싱클레어의 이름으로 출간되었던 『데미안』의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헤르만 헤세의 ‘영혼의 전기’로 소개되는 『데미안』은 깊이 있는 정신분석과 자기 탐구로 가시밭 같은 자아 성찰의 길을 섬세하게 그려낸 그의 대표작이다. 이 책을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의 우아한 표지로 다시 만나보자. 평화와 질서가 있는 밝은 세계에 살던 싱클레어는 불량소년 프란츠 크로머에게 거짓말을 했다가 지속해서 돈을 빼앗기고 괴롭힘 당한다. 자신이 금지된 어두운 세계에 발을 들인 것에 괴로워하는 싱클레어를 신비로운 전학생 막스 데미안이 구해주고, 카인과 아벨, 선과 악, 빛과 어둠 등 지금까지 의심 없이 받아들였던 이원적인 종교관을 새롭게 해석하도록 이끌어준다. 이후 라틴어 학교를 졸업하고 데미안과 헤어져, 다시 어두운 세계를 방황하는 싱클레어에게 어느 날 ‘아브락사스’라는 신의 이름이 담긴 데미안의 기묘한 쪽지가 도착하는데….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 헤르만 헤세만큼 나비와 직접적인 유대를 표현한 작가가 있을까? 나비는 짧은 삶과 아름다운 것의 덧없음, 단계적인 탈바꿈에 대한 상징으로 헤세의 소설과 시, 에세이, 그리고 제목만 보면 나비와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데미안》과 같은 작품에도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헤세가 들려주는 나비 이야기》는 이렇게 헤세가 나비에 대해 쓴 글 가운데 특별히 선별한 작품들만을 모아 그가 “오늘날의 그 어떤 컬러 인쇄판보다 수백 배는 더 아름답고 세밀”하다고 말한 나비 동판화와 함께 엮었다.

데미안 더모던타임즈 05

<데미안 더모던타임즈 05>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것을 사는 것, 그것은 왜 이토록 어려운가?” “태어나려는 자, 한 세계를 깨뜨리고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야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성장소설 《데미안》이 던지는 묵직한 질문과 위로들 독일철학의 진지함이 물씬 배어나는 《데미안》이 출간 100주년이 되었다. 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해 가는 싱클레어의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변적인 일기 같은 내용이 꾸준히 사랑받은 이유는,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일기를 써봤기 때문일 것이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해. 누구도 나를 구해줄 수 없어. 내 삶은 이미 엉망이 되어버렸어’라고 절망했던 기억과, 그것이 결코 나만의 고뇌가 아니었고 결코 절망할 일도 아니라고 깨달았던 순간이 있기 때문이다. 화목한 가정에서 바른 삶을 살던 열 살 소년 싱클레어가 사소한 거짓말 때문에 불량배 크로머의 협박에 시달리다가 전학생 데미안의 도움을 받는다. 이후 싱클레어는 사춘기의 낯선 감정들에 겁먹고 술로 도망쳤다가 “혼자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너만의 길을 가라. 네 안의 목소리를 따라가라”는 데미안의 말에, 자신의 꿈들을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 결과 베아트리체, 아브락사스, 에바 부인을 만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이 데미안과 꼭 닮아 있음을 발견한다. 꿈과 현실이 뒤섞여 전개되는 다소 모호한 내용 속에서 《데미안》이 가장 명확하게 말하고 있는 바는, 세상이 당연하다고 하는 길 말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용감하게 걸어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그 삶의 길에서 마주치는 혼란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라고 말한다. 선악을 모두 포용하는 신 ‘아브락사스’를 향해 날아가라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02_수레바퀴 아래서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02_수레바퀴 아래서> 더클래식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02’ 《수레바퀴 아래서》 청소년기의 ‘자기 치료’를 위한 자전적 소설! 더클래식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시리즈’는 기존에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도서들과는 차별성이 있다. 그것은 헤르만 헤세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를 통해 그의 또 다른 가치관과 미술적 재능을 발견하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더클래식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이 헤르만 헤세 작품의 참된 가치와 진정한 의미를 새로운 차원에서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수레바퀴 아래서》는 헤르만 헤세가 사춘기 시절 직접 겪은 위기적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고통스러웠던 어린 시절을 이 작품에 그대로 투영해 냈고, 이는 사회를 고발하는 역할을 했다. 현재 대한민국에서도 공부 때문에 자살을 하고 고통 받는 어린 영혼들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하며 억눌려 지내는 가운데, 이 작품은 시대의 경종을 울리는 역할을 할 것이다. 고전의 가치는 시대가 흘러도 변하지 않지만 읽는 시대와 읽는 사람에 따라 그 의미는 새로워진다. 더클래식 ‘헤르만 헤세 일러스트 에디션 시리즈’ 중 두 번째인 《수레바퀴 아래서》를 통해 시대를 치유하고 뒤돌아보는 여정을 용기 있게 떠나기를 바란다. ▶ 줄거리 마을에서 유일하게 수재 소리를 듣는 소년, 한스 기벤라트는 그만큼 온 마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다. 그는 수재답게 타인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어렵다는 주 시험을 2등으로 통과해, 마울브론의 신학교에 입학한다. 입학한 그는 같은 방을 쓰는 ‘하일러’를 만난다. 시를 쓰는 이 소년은 정해진 규율을 견디지 못하고, 이를 무시하려고 애를 쓴다. 착실한 모범생이었던 한스는 하일러와 친해지면서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다. 공부가 전부가 아니라 다른 무엇인가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일러와의 만남은 오래가지 못한다. 무단으로 학교를 떠난 하일러의 퇴학과 현실에 대한 혼란으로 한스는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어느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아우구스투스’의 빈스반겔 노인이라든지, ‘시인’의 스승 혹은 한혹 자신, ‘피리 부는 소년’의 사나이, 그리고 그 사나이와 헤어지고 난 후의 소년, ‘험한 길’의 안내자 등, 여러 작품에서 보이는 선지자의 이미지에서 우리는 행복이라든지 불행이라든지 삶과 죽음 등 인생의 근원적인 문제에 대한 하나의 접근 방식을 가르쳐주고 있는 스승으로서의 헤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향수

<향수> 《향수》에서 청춘의 절실한 애착과 소망과 꿈을 그린 그는, 그 다음 작품 《수레바퀴 밑에서》에서는 죽음 바로 직전까지 몰렸던 소년시절의 괴로운 체험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때의 그 악몽을, 그리고 그로 인해서 시인이 될 수 있었던 고난과 시련을 작품으로 형상화시키기 전에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수 없었던 것이리라. 때문에《수레바퀴 밑에서》는 비통한 느낌으로 엮어져 사람들의 마음을 뒤흔들어 놓는다.

나비

<나비> 〈나비〉는 어린 시절을 회상하여 쓴 소설이다. 주인공은 이웃에 사는 친구가 번데기에서 점박이 나비를 길러냈다는 말을 듣고, 친구가 없는 사이에 그것을 구경하다가 몰래 가지지만, 나비 만 망그러뜨리고 만다. 양심의 가책을 느낀 그가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자, 어머니는 친구에게 사과할 것을 권한다. 그러나 친구는 그의 사과를 받아 주는 대신 경멸에 찬 눈초리를 보낸다 ……사람의 욕심이 어떻게 뜻 아니한 과오를 저지르게 하는가를, 그 과오가 사람이 자존심을 가지고 사는 일을 어떻게 가로막는 가를 일깨워 주는 소설이다.

싯타르타 : 영어원서 초판본

<싯타르타 : 영어원서 초판본> 싯타르타 : 영어원서 초판본 부제: 영어원서 초판본 시리즈 1922년 초판본 Siddhartha: A Poem of India by Hermann Hesse Translated into English by David Wyllie 1. 영문(영어)원서 초판본 표지 2. 전자책(ebook) 초판본 시리즈 3. 1946년 노벨상수상 작가 작품 《싯타르타》 Siddhartha: A Poem of India 카스트 제도의 1계급인 성직자의 아들인 싯다르타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아버지의 만류를 뿌리치고 친구인 고빈다와 함께 출가한다. 서양인의 눈에 생소할 수 있는 불교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싯다르타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를 만나기 위해서 출가한 후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헤르만 헤세》 Hermann Hesse(1877년 ~ 1962년) 독일계 스위스인. 시인, 소설가, 화가 1946년에 유리알 유희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독일의 대문호 헤르만 헤세의 대표적인 성장소설이다. 헤세는 이 작품들을 통해 한 인간이 성장하면서 느낄 수 있는 고뇌와 진통을 세밀하게 그렸고 이 두 소설은 시대를 뛰어넘어 독자들에게 지속적인 사랑을 받고 있다. 《데미안》과 《수레바퀴 아래서》는 청소년들이 자신의 자아와 대면했을 때, 그리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변 상황에 의해 흔들리고 있을 때 자신의 내면과 보다 쉽게 마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번 도서에서는 헤세의 대표적인 성장소설 두 편을 한 권에 담아 그 작품의 진수를 제대로 맛보도록 하였다.

청춘은 아름다워라

<청춘은 아름다워라> [이 책은] 이 책은 세계적인 작가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소설이다. 주인공 헤세는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그리웠던 가족과 고향에서 달콤하면서 가장 아름다운 청춘의 휴가를 보낸다. 어릴 때 짝사랑 했던 여동생의 친구 헬레네를 다시 만나면서 애정의 감정을 느끼지만 곧 여동생의 또 다른 친구인 안나가 찾아오면서 심경의 변화가 생긴다. 우연히 헬레네의 약혼 소식을 듣고 주인공 헤세는 깊은 절망에 빠지는데…… [책 속에서] 헬레네와 안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나는 이상하게 야릇한 감정이 들었다. 유달리 아름다운 헬레네하고는 단순한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실수를 할까봐 주의해야 했던 반면, 안나하고 대화를 나눌 때에는 어떤 주제가 나오더라도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안나와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마음이 차분해졌지만 나는 대화 중에 힐끗거리며 헬레네를 훔쳐보곤 했다. 그러나 헬레네를 볼 때에는 기분이 좋아졌지만 어딘가 묵직하게 막혀 있는 느낌이 들었다.

헤르만 헤세 소설 콜렉션 5 (데미안.수레바퀴 아래에서.싯다르타.피터 카멘친트.크눌프 : 독일 원서 읽기)

<헤르만 헤세 소설 콜렉션 5 (데미안.수레바퀴 아래에서.싯다르타.피터 카멘친트.크눌프 : 독일 원서 읽기)> '헤르만 헤세' 소설 콜렉션 5 (데미안.수레바퀴 아래에서.싯다르타.피터 카멘친트.크눌프 : 독일 원서 읽기) * 모음집 수록 목록 1. <데미안 : Demian > 2. <수레바퀴 아래에서 : Unterm Rad> 3. <피터 카멘친트: Peter Camenzind> 4. <크눌프 :Knulp: Drei Geschichten aus dem Leben Knulps> 5 . <싯다르타:' Siddhartha> 특징 1) 싯다르타는 "독일어 + 영어"를 함께(동시에) 읽을 수 있다. 2) "세계 명작"을 2개국어로 공부할 수 있다. -한국어: 싯다르타 -독일어: Siddhartha:eine indische Dichtung -영 어: Siddhartha # 헤르만 헤세 Hesse, Hermann(1877-1962) 독일의 시인·철학자. 슈바벤 지방의 칼부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목사이고, 어머니는 선교사의 딸이었다. 처음에는 목사가 되려고 신학교에 들어갔으나, 적성에 맞지 않아서 중퇴하였다. 그 후 시계공·서점의 점원으로 일하면서 바젤 대학에서 강의를 들으며, 작품을 발표하여 작가로서 출발하였다. 1911년 인도로 여행, 신비한 인도 사상에 큰 영향을 받았다. 1904년 단편 소설 <페터카멘친트>를 발표하여 유명해졌으며, 그 해 스위스의 보덴 호반으로 이주하여 1923년 스위스 국적을 얻었다. 그곳에서 그의 대표적인 작품을 계속 발표하였다. 그는 여행을 즐겼으며, 제1차 세계대전을 반대한 평화주의자였다. 그의 시·소설·수필은 음악적인 아름다운 리듬과 명상적이며 불교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1946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대표 작품으로 <데미안> <싯다르타> <유리알 유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등과 평론집 <관찰>이 있다.

합본 | 수레바퀴 밑에서 (전 5권)

<합본 | 수레바퀴 밑에서 (전 5권)> 헤르만 헤세의 장편소설. 1905년 발표. 주위 사람들로부터 기대된, 그러나 그 기대에 짓밟힌 소년의 모습을 그린 자서전적 소설이다. 헤세의 작품 중에서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제목의 ‘수레바퀴’는 주인공 소년을 짓누르는 사회의 구조를 나타내고 있다.

합본 | 데미안(전 4권/완결)

<합본 | 데미안(전 4권/완결) > 헤세가 1919년에 쓴 소설. 이 작품은 나로부터 시작하여 나를 향하는, 한 존재의 치열한 성장의 기록이다. 진정한 자아의 삶에 대한 추구의 과정이 성찰적으로 또 상징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를 통하여 헤세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은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이며 누구나 나름으로 목표를 향하여 노력하는 소중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헤르만 헤세 선집 12 잠 못 이루는 밤

<헤르만 헤세 선집 12 잠 못 이루는 밤>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12. 잠 못 이루는 밤 <잠 못 이루는 밤>은 대문호 헤세의 에세이들을 한 데 묶은 에세이 선집이다.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펴낸 헤세 전집 중 자전적 글, 일기, 여행기, 단상, 짧은 산문들을 추렸다. 평생 동안 수십 권 분량의 다양한 작품들을 쓴 헤세의 문학적 단초, 그가 평생 동안 경도되었던 동양사상에 대한 글들, 고향의 풍정과 사람들에 대한 예찬, 그 밖에 다양한 주제에 관해 썼던 단상들이다. 이 에세이들을 통해 독자들은 헤세의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는 실마리와 함께 한 거장의 내면 풍경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방랑과 여행을 좋아한 헤세는 수많은 여행기를 남겼다. 그의 여행기는 주관적이고 독자적인 시선으로 풍경을 통해 이끌어낸 삶에 대한 여러 가지 단상들을 보여 준다. 헤세에게 여행은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탈피하고 일로부터 휴식을 취하거나 호기심을 충족시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여행은 나와 다른 사람과 우연히 함께하고, 다른 풍경을 관찰하는 데 있다. 여행을 통해 풍요로워진 체험에 의해 다양성 속의 통일성과 지구와 인류라는 큰 조직에 대한 우리의 이해 증진, 옛 진리와 법칙을 전적으로 새로운 상황에서 재발견하는 데에 있다. 여행 철학이라고 할 만한 여행에 대한 헤세의 견해는 그 당시보다 훨씬 여행이 일상화된 지금의 우리한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크리스마스>라는 에세이에서는 행복하게 살기 위한 지혜를 들려준다. 그것은 적당히 먹고 마시기, 매일 몸을 약간 움직이기, 즐거운 마음으로 청결하게 생활하기이다. 그리고 아무리 작더라도 사심 없는 사랑과 헌신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려준다. 행복은 거창한 성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헤세는 아무런 과장 없이 제시하고 있다. '권력이나 소유물, 인식이 아니라 사랑만이 행복하게 만든다는 것은 어디서나 최종적인 지혜이다. 모든 사욕 없는 마음, 사랑에서 비롯된 모든 포기, 모든 적극적인 동정, 모든 단념은 넘겨주는 것이자 체념인 것 같지만, 그러한 것은 더 풍요롭게 되고 더 위대하게 되는 것이며, 앞으로 그리고 위로 이끌어 가는 유일한 길이다.' 작가로서 헤세는 독서를 무작정 권장하지는 않는다. 좋지 않은 책을 권하지 않고 책을 잡지 보듯이 뒤적거리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알프스에 오르는 등산객처럼, 무기고로 들어가는 전사처럼 책에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생각 없는 산만한 독서는 눈에 붕대를 감고 아름다운 풍경 속을 산책하는 것과 같다. 자신과 일상생활을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대로 자신의 삶을 보다 의식적이고 성숙하게 다시 단단히 손에 쥐기 위해 독서해야 한다.' 나쁜 책은 없다는 통념(?)과는 달리 헤세는 좋지 않은 책들은 분명히 있다고, 게다가 많다고 말한다. 헤세가 기독교를 배경으로 한 서양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동양사상에 평생 몰두한 사실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동양학에 조예가 깊었던 집안의 분위기로 어렸을 때부터 친숙했지만 인도와 중국 등의 동양사상은 헤세의 인생과 문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헤세는 이성과 기술로 대표되는 서양에는 없는 동양인의 종교성을 바라보며 동양과 서양을 종합하는 인류라는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체험을 한다. 동양사상에 대한 관심과 이어지는 문명 비판과 자연 친화적인 삶에 대한 예찬도 헤세 에세이의 주제 중 하나이다. 산업화로 인한 인간의 노예화 현상을 경고하면서 자연과 친구가 되기 위한 게으름을 피울 것을 권유한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소위 속도가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느림의 미학과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자연의 향유>라는 에세이에서는 자연의 질서 있는 순환을 자명한 일로 그리고 기본적으로 진정 아름다운 일로 감수할 것과 모든 목적으로부터 해방되어 세계 전체와 친근해질 것을 주문한다. 지구 환경의 변화로 인한 삶의 대안 찾기 운동이 한창인 요즈음에 비추어 보면 헤세는 이 분야의 선구자적 존재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기쁨과 사랑의 감정 없이 무덤덤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일상의 소소한 기쁨이야말로 늘 시간 부족과 불만에 시달리는 현대인들을 위한 치유제라고 말한다. 잠 못 이루는 밤에 고독과 고통을 곱씹어본 사람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헤세는 그 같은 불면의 밤이야말로 삶에 대해 지속적으로 고조된 분위기의 향기를 불어넣을 수 있는 외경심의 학교라고 말한다. 행복과 사랑, 꿈과 심리분석을 담고 있는 헤세의 에세이들은 독자에게 다시 태어나게 하고, 자기 자신과 자신의 지각 능력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헤세는 두 차례의 전쟁을 통해 비인간적인 세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겪었던 세대이지만 인간성의 위대함에 대한 신념을 결코 놓지 않았고 그것을 지키고자 노력했던 20세기 가장 중요한 휴머니스트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다. ■ 본문에서 사람들은 교사, 목사, 의사, 직공, 상인, 우편집배원이 될 수 있었고, 음악가나 화가 또는 건축가도 될 수 있었다. 세상의 모든 직업에 이르는 하나의 길이 있었고, 하나의 전제조건이 있었으며, 하나의 학교, 즉 초보자를 위한 하나의 수업이 있었다. 그러나 시인이 되기 위한 길만은 존재하지 않았다! 시인이라는 것, 다시 말해 시인으로서 성공을 거두고 유명해지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는 않았고, 심지어 명예로운 일로 간주되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성공을 거두고 유명해지는 것은 대체로 죽은 뒤였다. 시인이 되는 것, 시인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내가 곧 알게 되었듯이,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이자 치욕이었다. 나는 상황을 금방 파악했다. 시인인 것은 괜찮지만 시인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었다. - <요약한 이력서> 시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확고히 한 순간 첫 번째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의 모범 학생은 그때부터 불량학생이 되었다. 그는 처벌받았고 쫓겨났으며 어디서도 고분고분 말을 듣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 자신의 부모님에게 한없이 걱정을 끼쳤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그가 현재 존재하고 있거나 존재하고 있는 것 같은 세계와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 사이에서 화해의 가능성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이제 전쟁 기간에 새로이 되풀이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평화롭게 살았던 세계와 갈등에 빠진 것을 다시 알아챘다. 모든 일이 다시 실패로 돌아갔고, 다시 혼자가 되어 비참해졌으며, 말하고 생각한 모든 것은 다시 다른 사람들에 의해 적의가 담긴 오해를 받았다. 현실과 내게 바람직하고 합리적이며 좋게 여겨졌던 것 사이에 절망적인 심연이 가로놓였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 <요약한 이력서> 그 후로 나는 여러 나라와 도시를 보았고, 여러 성당호가 해안에 서 잇었으며, 많은 여자들을 사랑했다. 책을 읽고 썼으며, 빵과 명예, 우정을 얻기 위해 애썼다. 빈곤에 쪼들렸고 터무니없는 일들을 겪었다. 이 모든 추억은 소년 시절 단 한 번 갔던 여름 바캉스의 추억과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니고 시시하며 빛이 바랜다. 그러나 이 추억들이야말로 내가 고향 마을 골짜기에 돌아올 때마다 내게 그토록 기쁨을 주고 찡한 감동을 안기는 유일한 것이며, 매번 체류를 그토록 소중하게 만들고 이별을 그리도 힘들게 만들었다. 거리의 외진 구석마다 생생한 추억을 만들어 주는 곳, 골목의 조그만 장소마다 체험이 담겨 있는 그리운 곳이자 잊히지 않는 곳, 내가 소년 시절을 보낸 풍부하며 열정적인 삶의 잔광을 지닌 동화 같은 곳은 지구상에서 이 장소가 유일하다. - <소년 시절> 기자가 공장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고를 '비극적'이라 부르면 언어의 남용이듯(그들, 멍청이에게는 '유감스러운'과 같은 뜻이다), 불쌍하게 죽은 모든 병사에 대해 ‘장렬한 죽음’이라고 말한다면 이는 적지 않게 부당한 평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전쟁에서 죽은 병사에 대해 더없이 가엾은 마음으로 동정해 마땅하다. 그들은 때로는 엄청난 일을 해냈고, 고통을 겪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그들의 목숨으로 대가를 치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웅’인 것은 아니다. 이는 단순한 병사로, 장교의 호통을 듣던 자가 총에 맞아죽었다고 해서 갑자기 영웅이 되는 것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 이치다. 이처럼 수백만에 달하는 대중 전체의 ‘영웅’에 관한 생각은 그 자체로 불합리하다. - <고집> 내게 새로운 문학은 한동안 나의 체험, 나의 사고, 내 문제의 상징과 담당자가 될 만한 인물이 눈에 띄눈 순간 시작된다. 이런 신화적인 인물(페터 카멘친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하리 할러)의 출현은 모든 것이 탄생하는 창조적인 순간이다. 내가 썼던 산문문학은 거의 모두 영혼의 전기이다. 그 모든 문학에서 문제되는 것은 이야기, 갈등이나 긴장이 아니다. 나의 문학은 기본적으로 독백이다. 그러한 독백에서는 단 하나밖에 없는 개인, 곧 신화적인 인물이 세계와 자아에 대한 관계라는 차원에서 고찰된다. 사람들은 이러한 문학을 ‘장편소설’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실제로는 젊은 시절부터 나의 신성하고 위대한 모범, 가령 노발리스의

헤르만 헤세 선집 11 유리알 유희

<헤르만 헤세 선집 11 유리알 유희>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11. 유리알 유희 헤세는 '히틀러 시대와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의 11년을 <유리알 유희>를 집필하면서 견뎌냈다'고 <이력서>라는 에세이에서 짧게 언급했다. 반전 평화주의자였던 헤세가 제1차 세계대전 때 평화를 호소하는 메시지를 보냈다가 독일의 언론과 동포들로부터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고 지식인들의 전쟁 선동과 대중들의 전쟁에 대한 열광에 충격을 받았던 사실을 생각하면 자신의 '이력서'에 11년의 시간을 한 줄로 정리한 그 말의 무게를 새삼 느낄 수 있다. <유리알 유희>는 헤세의 마지막이자 가장 긴 장편소설이다. 헤세의 모든 문학적 기도가 총결산된 대표작으로 평가되며 그의 노벨문학상 수상에도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작품이다. 앞서 발표했던 그의 중기 이후 작품들인 <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동방 순례>의 모티프가 새로운 이야기 구조 속에 결합되어 있으며 헤세의 삶과 문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수도원 기숙사 학교의 체험도 짙게 반영되어 있다. <유리알 유희>는 일반적인 장편소설의 단선적인 내러티브 구조와는 달리 '유리알 유희'에 대한 개론부터 중심인물인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 그가 남긴 유고 등 다양한 요소가 혼합되어 있다. 화자도 일정치 않고 개론서와 연대기적인 장편소설과 단편소설, 시들로 이루어진 구조는 유기적이라기보다는 파편적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중심을 이루는 크네히트의 전기는 헤세 자신의 고백적 성격이 강한데 이런 성격의 글이 지닐 수 있는 단조로움을 피하기 위해 헤세는 다양한 형식의 글을 편집해 작품을 구성함으로써 한 인물과 시대를 다채로운 관점에서 보여 주고 있다. <유리알 유희>는 25세기에서 바라본 20세기를 그린 미래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그 내용은 철저히 헤세가 바라본 동시대의 문제점과 그것의 극복을 위한 대안 제시의 성격을 띠고 있다. 그리고 유토피아 소설로서 <유리알 유희>를 바라볼 수도 있는데 작품 속의 주 무대인 카스탈리아는 모든 학문과 예술과 정신 수련을 종합해서 연구하는 일종의 교육 유토피아로서 헤세가 유년 시절을 보냈던 슈바벤 지방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유리알 유희> 역시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같은 헤세의 다른 성장소설들처럼 주인공의 성장 과정을 3단계로 도식화할 수 있다. 죄와 더러움을 모르는 순진한 자연, 또는 낙원의 상태인 1단계에서, 죄악을 통해 선악을 아는 단계로 정의와 선에 도달할 수 없는 절망의 2단계를 거쳐, 도덕이나 법률을 넘어서서 신앙으로 자비와 구원의 3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도식화는 소설의 중심인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에도 부합하고 크네히트의 유고에 붙은 탁월한 3편의 단편은 그런 도식화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걸작들이라 할 수 있다. 헤세는 <유리알 유희>에 대한 자평에서 '나의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라고 표현했다. 이성과 양식이 사라지고 전쟁으로 치닫는 세상을 보며 헤세는 서양 문명의 한계와 인간성 상실의 위기감을 느낀다. 그러한 위기의 시대에 지식인의 역할은 미미하기 짝이 없었고 오히려 전쟁 선동에 앞장서는 지식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이미 노년에 달한 나이였고 고향에 은거하며 소설 창작보다는 수채화에 몰두하던 시기였지만 파괴를 향해 치닫는 시대의 위기를 보며 헤세는 조용히 자신의 문학적 총결산으로 자리 잡을 소설을 무려 11년간이나 써나갔다. <유리알 유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에 독일에서 출간되었으며 그해 노벨상 위원회는 <유리알 유희>를 특별히 언급하며 헤세를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다. ■ 줄거리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 <유리알 유희>는 맨 처음 유리알 유희에 대한 긴 개론으로 시작한다. 유리알 유희의 성격을 규정하기 위해 그것이 출현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정신문화 타락의 실체가 설명되고, '잡문 시대'라고 규정된 그 시대의 한계를 극복하고자 유리알 유희 교단이 자연스럽게 조직되는 과정을 설명한다. 최고의 학술과 예술 보존 기관이자 정신 수련이기도 한 유리알 유희는 한 사람의 전설적인 유희 명인 요제프 크네히트를 기억하는데 그의 삶은 제자의 기록을 토대로 다음 장에서 전기적으로 기술된다. 소설의 본문에 해당하는 요제프 크네히트의 전기는 연대기 순으로 총 12장으로 펼쳐진다. 초반의 5장은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 명인에 오르기 전까지의 수업 시대를 중반의 2장은 명인 재임기를 후반 5장은 크네히트가 유리알 유희 교단인 카스탈리엔에 대한 회의로 번민하다가 그것을 비판하고 카스탈리엔을 나와 속세로 나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라틴어 학교의 뛰어난 학생 요제프 크네히트는 카스탈리엔 음악 명인의 눈에 띄어 영재 학교에 추천을 받는다. 음악에 천부적 재능을 지닌 크네히트는 명인과 영적인 교류를 시작하고 그로부터 자신의 소명을 체험한다. 영재 교육을 받으면서 서서히 자신의 성장을 자각하고 새로운 세계와 조화와 긴장의 관계에 들어간다. 크네히트가 그곳에서 만난 일반 청강생 데시뇨리와 수도원에서 파견되어 만난 야코부스 신부와의 대화는 그의 영혼의 갈등을 심화시킨다. 데시뇨리와의 만남은 요제프가 바깥세상에 관심을 갖게 만들고 야코부스 신부는 추상적이고 이념적인 정신의 추구로부터 역사적이고 현실적인 사실에 눈뜨게 만든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던 각성과 그로 인한 회의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그를 위계의 최고 자리인 유리알 유희 명인으로 임명한다. 크네히트는 그의 직무 수행에 책임감을 갖고 임하지만 카스탈리엔이라는 정신적인 공동체 역시 역사의 산물로서 언젠가는 사라져 버릴, 결코 완전한 세계는 아니라고 생각하고 미래에도 정신적 이상향으로 남을 카스탈리엔이 아님을 깨닫고 교단에 명인 퇴임 신청을 한다. 카스탈리엔이 절대적인 이상향이 아님을 깨닫고 그의 그의 유일한 희망은 '가급적 나이 어린 학생을 가르치는 것으로 설정하고 교단을 떠나 친구 데시뇨리의 아들 티토의 가정교사가 되기로 한다. 그러나 크네히트는 교단을 떠난 지 이틀 만에 티토와 수영을 하러 갔다가 익사하고 만다. 이어지는 대목은 크네히트가 남긴 유고이다. 세 편의 독립적인 단편과 시들로 구성되어 있다. 각각 원시 사회와 고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세 편의 단편은 헤세가 말한 개인의 인생 발전 3단계 - 순진한 낙원의 단계, 신앙을 통한 자비와 구원 -와 겹쳐 놓고 볼 수 있다. 단편으로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는 세 편의 이야기는 헤세가 이전의 소설들을 통해 구축해 왔던 헤세 문학세계의 깔끔한 종지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사 『유리알 유희』는 나의 삶과 문학의 최종 목표이며 폭력의 시대 한가운데서 정신에 대한 믿음의 고백이다. - 헤르만 헤세 『유리알 유희』는 그의 사고가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정선된 심리학적 연구를 마술의 경지까지 압축했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음악적이며 명상적인 어조에서 괴테의 만년의 작품(『빌헬름 마이스터』)과 같은 수준에 올랐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지그프리트 운젤트 헤르만 헤세는 - 정보시대의 예언자이다. 80년대가 지나고 나서야 독자들은 헤르만 헤세가 1934년과 1942년에 사이에 생각해낸 것을 제대로 평가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 지그프리트 운젤트 『유리알 유희』는 잡문 시대가 이미 오래전에 지나갔음에도 불구하고 전체주의 체제에 대한 도전으로, 특히 시험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교육적 모델로서, 여러 가지 전문 영역에 걸친 정보 처리의 가능성에 대한 전망으로서 읽힐 수 있다. - 폴커 미헬스 ■ 본문에서 문학적 예언자들은 문화의 파멸에 관한 이론에 여러 가지 용이한 공격 포인트를 제공했다. 특히 위협하는 예언자들에 대한 투쟁을 감행하는 자는 시민들의 주목을 받으며 영향력을 확보했다. 사람들이 어제까지도 소유했다고 생각했던 문화, 그에 대해 그토록 자부심을 가졌던 문화는 더 이상 살아 있지 않았으며, 시민들이 사랑하던 교양, 시민들이 사랑하던 예술은 더 이상 순수한 교양이 아니며 순수한 예술이 아니라는 사실은 마치 갑작스러운 돈의 인플레와 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자본이 위협받는 것처럼 적잖이 파렴치하고 참을 수 없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몰락의 분위기에 반대하는 냉소적인 태도도 존재했다. 그 같은 태도를 취하는 사람들은 춤이나 추러 다니고, 미래에 대한 모든 걱정을 유행에 뒤진 바보 같은 짓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예술, 학문, 언어의 종말이 가까웠다는 것에 대해 감상적인 글들을 써댔다. 그리고 자신들이 종이 위에 구축한 문예물의 세계에서 어떤 자살자의 쾌감을 느끼며 정신의 완전한 타락과 개념들의 인플레이션을 확인했다. 그리고 냉소적인 무관심이나 취한 듯한 황홀함으로 예술, 정신, 관습, 성실성뿐 아니라 심지어 유럽과 '세계'의 몰락을 바라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다. 선한 사람들 사이에는 조용하고 암울한 분위기가, 악한 사람들 사이에는 음흉한 비관주의가 만연했다.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교훈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서로 모순되고, 모든 것이 비껴 지나가고 어디에도 확실한 건 존재하지 않네요. 모든 것이 이렇게도 해석되고 반대로도 해석될 수 있어요. 우리는 세계사 전체를 발전과 진보로 증명할 수도 잇지만 마찬가지로 그 안에서 몰락과 무의미함을 볼 수도 있어요. 도대체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진실하면서 보편타당한 교훈은 존재하지 않는 건가요?" "얘야, 진리는 존재한단다. 그러나 네가 갈망하는 '교훈', 절대적이며 완전하고, 분별력을 갖게 만드는 그런 교훈은 존재하지 않는단다. 너는 절대로 완전한 교훈을 동경해서는 안 되고 대신 너 자신의 완전함을 추구해야 한다. 네 안에 있는 신성, 그것은 개념과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란다. 진리는 체험하는 것이지 배우는 것이 아니야. 요제프 크네히트, 싸울 각오를 해라, 싸움은 이미 시작되었어." '정신적 삶이든 육체적 삶이든 삶 전체는 역동적인 현상이다. 유리알 유희는 거기서 근본적으로 단지 미학적인 면을 파악하는데, 그것도 주로 리듬감 있는 과정의 이미지로 파악한다.' 세계사는 지배자와 지도자, 권력자, 명령을 내리는 자들의 끝없는 대열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은 거의 예외 없이 처음에는 아름답게 시작하지만 추하게 끝을 맺는다. 그들 모두 적어도 겉보기에는 선한 동기로 권력을 추구하지만 나중에는 권력에 사로잡혀 맹목적이 되고 자기 자신을 위해 권력을 사랑하게 된다. 그의 길은 그렇게 원을 그리며, 아니면 타원이나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갔다. 직선이 아니었다. 직선은 기하학에 속하는 것이지 자연이나 사람에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 시와 당시의 각성을 오래전에 잊어버린 후에도 그 시에서 느낀 자기 경고와 용기를 성실히 따랐다. 물론 완전하게 할 수도 없었고, 주저나 의심, 변덕과 갈등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지만, 그는 한 단계 한 단계, 한 공간 한 공간 용감하게 정신을 집중하여 그럭저럭 건너왔다. 크네히트는 탐색하는 정신적인 인간은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며, 인간의 희망과 어리석음을 교만 없이 마주 대해야 하지만 그것에 지배당해서는 안 된다는 것, 현자와 사기꾼, 신부와 마법사, 도움을 주는 형제와 사기 치는 부당 이득자는 단지 한 걸음 차이라는 것, 그리고 사람들은 담보 없이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들이기보다는 차라리 협잡꾼에게 이용당하고, 사기꾼에게 돈을 지불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는 인간이 약하고 이기적이며 비겁한 존재로 보는 법을 배워야 하며, 인간 자신이 이런 나쁜 특성과 충동에 얼마나 깊이 참여하고 있는지도 간파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정신이며 사랑이고, 인간의 내면에는 본능을 거역하고 본능이 순화되기를 갈망하는 무언가가 깃들어 있음을 믿고 그것으로 영혼을 살찌워야 한다. 그는 물그릇을 기울여 물을 쏟아 버린 후 그것을 이끼 위에 던졌다. 그리고 풀밭 위에 앉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이런 꿈은 이제 싫증이 났다. 한 사람의 가슴을 짓누르며 피를 멈추게 하다가 갑자기 마야가 되어 버리고 사람을 바보로 만들어 버리는 체험과, 기쁨이나 고통으로 엮어 낸 이런 악마적인 것에는 너무 지쳤고 이 모든 것에 질렸다. 그는 여자도 아이도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왕좌도, 승리도, 복수도, 행복도, 지혜도, 권력도, 덕도 원하지 않았다. 그는 평온과 종말만을 원했다. 그는 이처럼 영원히 돌아가는 바퀴 같은 것을, 이런 끝없는 그림 관람을 멈추게 하고 소멸시키는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바라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을 진정시키고 소멸시키기를 원했다. 죽음이란 아마도 휴식, 짧고도 작은 휴식이며 잠깐 심호흡을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다음에도 다시 계속되었다. 우리는 다시 거칠고 도취적이며 절망적인 인생의 춤 속에 들어 있는 수천 가지 형상 중 하나였다. 아, 소멸이란 존재하지도 않으며 그 끝 또한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헤르만 헤세 선집 09 환상동화집

<헤르만 헤세 선집 09 환상동화집>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9. 환상동화집 헤세는 1925년에 쓴 『짧은 이력서』에서 이렇게 쓴바 있다. "고백하자면, 나는 나 자신의 삶이 바로 동화처럼 보일 때가 많다. 자주 나는 바깥 세계가 나의 내면과 연관되고 조화를 이루는 것을 보고 느낀다. 이러한 연관성과 조화를 나는 마법적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다. 삶을 마법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내게 항상 친근하다. 나는 결코 현대인이 아닌 것이다." 헤세는 열 살 때 처음 「두 형제」라는 동화를 쓴 이후 여든다섯 살 때 「중국의 전설」을 쓰기까지 평생 꾸준히 동화 문학을 썼다. 특히 그는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정서적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면서, 대표작인 『데미안』을 비롯해 「시인」, 「피리의 꿈」, 「아우구스투스」, 「다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팔둠」, 「험난한 길」, 「아이리스」 등 많은 동화를 썼다. 헤세는 동화 형식을 빌려 자신의 내면으로 이르는 길, 자기실현을 위한 갈등과 모색을 환상적이고 초자연적인 모습으로 표현했다. 헤세에게 동화란 낭만주의 시인 노발리스의 표현처럼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어디서도 존재하지 않는 고향 세계에 대한 꿈”으로, 순수한 내면세계를 현실처럼 표현하는 수단이었다. 따라서 헤세의 동화 작품들에서는 환상적인 것과 마법적인 것, 초자연적인 것과 경이로운 것이 섞여 있다. 헤세의 동화는 헤세 생전을 비롯해 사후에도 『동화집』의 형태로 여러 번 출간된 바 있다. 그러나 이 작품들은 헤세 자신이 한 권의 책으로 모은 것이 아니라 편집자가 전집에서 추린 것이며, 연구자마다 무엇을 동화로 보아야 할지 의견이 상이한 부분이 있어, 판본에 따라 수록된 작품이 다소 다르기도 하다. 본서 『환상동화집』은 헤세 연구자인 풀커 미헬스가 헤세의 동화 작품 중 20편을 정선하여 독일의 주어캄프Suhrkamp 출판사에서 펴낸 『동화집』에 실린 작품들이다. 본서에서는 헤세가 동화라고 지칭했으며, 헤세가 사랑했던 민담 형식으로 표현된 환상성 가득한 창작동화 「난쟁이」를 첫 작품으로, 도가 사상의 영향이 느껴지는 「시인」 「피리의 꿈」 「아이리스」, 전쟁에 반대하고 비폭력주의를 옹호하는 「다른 별에서 온 이상한 소식」 「유럽인」 「제국」, 보편적인 가치에 대한 교훈적 내용을 담은 「아우구스투스」 「팔둠」 등이 실려 있다. 헤세의 동화들은 현실을 마법화하여 보여줌으로써 우리들에게 잃어버린 유년 시절의 마법적인 요소들을 회복시켜준다. 특히 헤세의 동화 속 주인공들은 헤세 자신, 혹은 우리 내부의 본래적인 자아로, 인간 되기라는 험난한 도정을 헤쳐 나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즉 헤세의 동화들은 궁극적으로 내면의 무의식 세계를 탐구하고 이로 인한 자기 발견의 길을 다루고 있다. 이렇듯 헤세는 동화 본연의 낭만성과 상징성 위에 인간의 내면 심리와 자아실현, 일상적인 삶을 접목함으로써 전통적인 동화 형식을 뛰어넘는 새로운 동화 문학을 창조했다. ■ 본문에서 죽음의 문턱에 가까이 선 그의 마음은 기대감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는 도시 쪽을 돌아보고, 조금 전까지 골몰했던 생각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그리고 반짝이는 수면을 말없이 응시하며 자신의 인생을 곰곰 생각해 보았습니다. 단조롭고 가련한 삶이었지요. 바보들의 시중이나 드는 현자의 삶, 한 편의 공허한 희극 같은 삶이었습니다. _「난쟁이」 중에서 나는 이미 예감하고 있던 것을 분명히 알기 위해 물 위로 몸을 내밀고 등불을 위로 들어 올렸다. 그러자 시커먼 수면에서 잿빛 눈을 지닌 날카롭고 근엄한 얼굴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늙고 깨달음을 얻은 얼굴, 그것은 바로 나였다. _「피리의 꿈」 중에서 아우구스투스는 눈을 감고, 어두운 복도에서 자기를 이끌어주는 먼 불빛을 바라보듯 자기의 인생을 되돌아보았다. 그러자 다시 깨닫게 되었다. 한때 자신의 주변은 밝고 아름다웠으며, 그러다가 서서히 점점 어두워져서 마침내는 자신이 완전히 암흑 속에 서서 더 이상 어느 것에도 기쁨을 느낄 수 없게 되었음을. _「아우구스투스」 중에서 나는 오랫동안 낙원에서 살았다. 어린 시절의 꿈은 오랫동안 지속되었고, 세계는 나의 것이었다. 모든 것이 현재였고, 모든 것이 내 주위에서 아름다운 놀이로 자리 잡았다. 내 안에서 어떤 불만이나 그리움이 생기고, 즐거워하는 세상이 어쩌다가 그림자를 드리우거나 미심쩍게 느껴질 때에도 나는 다른 세계, 보다 자유롭고 저항 없는 환상의 세계로 가는 길을 대체로 쉽게 찾아냈다. 그 세계에서 되돌아와 보면 바깥세상은 새로이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_「마법사의 유년 시절」 중에서

헤르만 헤세 선집 08 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08 로스할데>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8. 로스할데 <로스할데>는 화가를 주인공으로 한 예술가 소설이자 헤세의 불행했던 첫 번째 결혼의 경험이 짙게 투영된 작품이다. 1904년 헤세는 아홉 살 연상이었던 베르누이와 결혼했지만 수년간의 별거 기간을 거쳐 1919년 정식으로 이혼했다. 불행했던 결혼 기간 동안 헤세는 현실도피의 한 방편으로 인도, 동남아 여행길에 오르기도 했다. 독일의 한 평자의 말처럼 <로스할데>는 '책표지에 저자의 이름이 없었다면' 결코 헤세의 작품인 줄 독자들은 모를 정도로 그의 작품 목록 가운데 이질적이다. 헤세의 분신이랄 수 있는 대립항적인 두 인물의 등장은 보이지 않고 자연주의 소설에서처럼 철저하게 잘못된 관계 속에서 고통받는 화가이자 화목한 가정을 꾸리는 데 실패한 가장의 모습이 절절하게 그려진다. 헤세는 <로스할데> 출간 직전에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불행한 결혼 생활은 잘못된 선택의 문제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의 결혼"이라는 문제를 보다 심도 있게 다루어 봄으로써, 예술가나 사상가, 즉 본능에 의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삶을 지극히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묘사하려는 사람에게 과연 결혼 생활이 가능한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루어 보려 한 것'이라고 썼다. 속살로 파고든 따가운 모래를 진액으로 싸서 진주로 만드는 진주조개처럼 헤세는 실패한 결혼 생활이라는 자신의 상처를 승화시켜 예술과 일상의 상관관계라는 보편적인 질문으로 독자들을 이끌고 있다. ■ 줄거리 오래된 대저택 로스할데에 칩거하는 주인공 요한 페라구트는 저명한 화가로서, 두 아들과 아내를 둔 가장이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하며, 외롭고 낭만적인 사람이다. 부인 아델레는 착실하지만 유머 감각이 결여된 여인으로 자기중심적이다. 페라구트는 7년 동안 이곳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그간 부부 간의 불화가 심해지자 큰아들 알베르트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다른 지방의 학교를 다니게 하는 한편, 본채는 부인에게 내주고 자기 혼자만의 공간을 찾아 따로 자신이 지낼 방 두 개를 지은 다음, 그곳에서 그림 작업을 하며 독신자처럼 생활하고 있다. 소원해진 두 부부를 맺어주는 유일한 끈은 일곱 살짜리 아들 피에르이다. 그는 부모의 귀여움을 한 몸에 독차지하고 있고, 안채와 아틀리에 사이의 다리 역할을 한다. 화가인 남편이 안채에서 하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고는 부인은 언제나 남편을 손님 대하듯 한다. 어린 피에르는 이러한 가정의 균열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지만 얼어붙은 부부의 감정을 녹이는 꼬마 천사의 역할을 한다. 큰아들이 성장하면서 점차로 어머니의 편을 들며 자신과는 소원해지면서 화가 페라구트에겐 그림과 더불어 피에르야말로 삶의 희망이자 이유라 할 수 있다. 인도에 사는 화가의 죽마고우 오토 부르크하르트가 페라구트를 방문해 냉랭한 집안의 분위기에는 일시적으로 온기가 감돈다. 하지만 오토는 며칠 묵으면서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친구 가정의 불화를 몇 차례 목격하고 페라구트도 그런 꼴불견을 친구한테 보인 것에 대해 참담한 심정이 된다. 오토는 요한에게 함께 인도 여행을 떠나자고 권유하고 요한은 친구의 제의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그림에 사랑을 쏟는 그 이상으로 인간을 사랑할 수가 없는 페라구트는 자식을 가운데 두고 결말 없는 싸움을 해야 하는 부부 관계의 괴로움 속에서, 새들이 주고받는 언어를 알아듣고 꽃들에게 상상의 이름을 붙여주는 천진난만한 피에르를 보며 심혈을 기울여 부부와 어린아이가 등장하는 가족 그림을 그려 나간다. 어느 날 피에르가 갑자기 이상한 징후를 보이고, 아이의 상태는 점차 악화되어 간다. 의사의 진단 결과 뇌막염으로 판정이 나고 회복의 가능성이 극히 작은 가운데서 페라구트 부부는 아이의 회복을 위해 열성적으로 간호한다. 부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허무하게 숨을 거두고 요한은 피에르의 죽음과 함께 자신의 결혼 생활도 종말을 맞이했다는 것을 직감한다. 요한은 절망적인 힘을 한데 모아 로스할데에서의 마지막 대작인 가족의 그림을 완성하고 아내에게 자신은 오토를 방문하러 인도로 가겠다고 통보하고 로스할데는 알아서 처분하라고 한다. ■ 추천사 어느덧 헤세도 변했다. 그도 나이가 들면서 다른 무엇인가를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책표지에 그의 이름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그가 이 작품의 저자라는 사실을 몰랐을 것이다. 우리가 늘 절실히 바라고 찬미했던 그의 강렬한 서사력과 감성적 문체가 다시 살아 돌아온 느낌이다. 그는 여름밤과 쾌적한 수영장과 노곤한 피로감과 육체의 고단함만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헤세는 이를 통해 우리들 독자로 하여금 뜨거움과 시원함, 그리고 피로감을 몸소 체험하게 해주는 능력이 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 책은 알량한 연애담에 식상해 있는 우리들에게 진정한 우정의 가치를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환영할 만하다. 어떠한 음모나 권력 의지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인격과 인격으로 혹은 인간과 인간으로 맺어진 우정 말이다. - 쿠르트 투콜스키 ■ 본문에서 그는 비에 젖은 길을 천천히 거닐며 자신의 삶의 실타래를 거꾸로 추적해서 확실하게 풀어 보려고 했다. 그 단순한 직물을 그는 결코 명료하고 만족스럽게 바라본 적이 없었다. 이 삶의 길을 맹목적으로 걸어왔다는 사실이 분명해졌지만 분노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음에 드니?" 쉬는 동안 알베르트가 물었다. 그러자 피에르는 고개를 끄덕이기만 하고 곧 조용히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형의 질문 속엣 피에르는 모종의 어투를 느꼈다. 소년의 경험에 의하면 대부분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쓰는 말투였다. 거짓된 진실과 거만함이 풍기는 말투여서 피에르는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큰형이 온 것은 기쁜 일이었다. 피에르는 큰형을 손꼽아 기다렸고, 저 아래 역에서도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인사를 했다. 하지만 이런 말투로 자기를 대할 줄은 전혀 몰랐다. "아주 간단하지. 개나 고양이, 그 밖의 영리한 동물들은 모두 꼬리를 갖고 있어. 생각하고, 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들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그때그때의 기분에 따라, 동요하는 마음에 따라, 또 생활감정의 미묘한 변화에 따라 수시로 꼬리를 흔들어 표현하는 거야. 놀랍고 완벽한 아라베스크식 언어를 가지고 있는 거지. 그런데 우리는 그런 언어를 갖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우리 가운데 제법 활기찬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이 필요해. 그래서 그들은 붓이니 피아노니 바이올린 따위를 만들어 내는 거야..." 천장이 높은 작업실의 고요하고 희미한 햇빛 속에 그의 그림이 세워져 있었다. 조그마한 들꽃이 몇 송이 피어 있는 풀밭 위에 세 인물이 앉아 있었다. 남자는 몸을 웅크리고 앉아 절망적인 생각에 빠져 있다. 여자는 사라진 기쁨에 실망하며 무언가를 기다리는 표정이다. 아이는 명랑하고 천진난만하게 꽃 속에서 놀고 있다. 이들 세 사람 위로 강렬한 햇빛이 넘실거린다. 햇빛은 의기양양하게 온 공간에 가득 넘쳐흐른다. 만발한 꽃잎 속에서도, 소년의 머리카락 속에서도, 그리고 우울한 여인의 목에 걸린 조그만 금장식에서도 마찬가지로 담담하고 정겹게 빛나고 있다. 여기에 그의 아들이 누워 있었다. 1시간 전만 해도 그 미소가 태양처럼 빛났고, 칭얼거리던 귀여운 목소리가 여전히 그의 가슴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던 그 아이가 말이다. 그 아이가 여기 누워 있었다. 그 아이는 이제 기계적으로 경련을 일으키는 육체에 지나지 않았고, 고통과 비탄의 절망적인 꾸러미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일어나, 로스할데에서 하려고 했던 마지막 일에 착수했다. 우선 피에르의 침실로 들어가 커튼을 열어젖히고 서늘한 가을 햇살이 귀여운 아이의 작고 하얀 얼굴과 굳어 버린 두 손 위를 비추도록 했다. 그런 다음 침대 곁에 앉아 스케치북을 펼쳐 들고, 마지막으로 아들의 얼굴을 그렸다. 그가 그렇게도 자주 관찰해 왔고, 갓난아이 때부터 성장하는 내내 익히 잘 알아 왔고 사랑했던 얼굴, 이제는 죽어서 성숙하고 단순해진 얼굴, 하지만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괴로움이 넘쳐흐르는 얼굴, 그 얼굴을 그렸던 것이다. 페라구트는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며 아들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는 곳들을 찾아다녔다. 마지막으로 피에르가 만들어 놓은 모래성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손을 집어넣었다. 축축한 모래의 습기 때문에 양손이 시려 왔다. 그는 모래 속에서 나무로 된 물건을 더듬어 잡고서 들어 올렸다. 그 물건이 피에르의 조그마한 모래삽임을 알아보자, 그는 힘없이 주저앉았다. 그리고 마침내, 이 무서웠던 사흘이 지난 후 처음으로 목을 놓아 통곡할 수 있었다.

헤르만 헤세 선집 07 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07 크눌프>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7. 크눌프 헤세는 1935년 어느 여성 독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크눌프와 같은 인물들이 마음에 끌립니다. 그들은 ""유용""하지는 않지만 많은 유용한 사람들보다 해를 끼치지는 않습니다. 크눌프와 같이 재능 있고 생기 있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변 세계에서 자리를 찾지 못한다면, 그 주변 세계는 크눌프와 마찬가지로 책임이 있다고 봅니다.' <크눌프>는 <데미안>이 발표되기 이전에 헤세의 작품 중 가장 대중적인 성공을 거둔 책이다. '크눌프 삶의 세 가지 이야기'라는 부제가 알려주듯이 이 소설은 주인공인 방랑자 크눌프의 삶에 대한 세 가지 짧은 일화로 이루어져 있다. 후기의 <황야의 늑대>의 하리 할러나 <싯다르타>의 싯다르타처럼 시민사회의 안온함을 떨쳐버리고 구도의 길을 찾아 방랑을 나섰던 캐릭터들처럼 크눌프도 삶의 해답을 찾으려 정착을 거부한 유쾌한 방랑자이다. 재능 있고 전도유망한 청년이었지만 모든 '유용'함을 거부하고 방랑으로 인생을 마감한 크눌프라는 잊을 수 없는 캐릭터는 자유에 대한 동경을 마음 한구석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 세대의 독자들에게 강력한 인상을 주어 왔다. 신학교에서의 자퇴를 시작으로 평생 정착과 안주를 거부하며 예술과 구도의 방랑을 멈추지 않았던 헤세 자신의 분신이랄 수 있는 크눌프는 헤세가 창조해낸 모든 방랑자 캐릭터 중에 앞으로도 가장 많은 대중적 사랑을 얻을 수밖에 없는 사랑스러운 캐릭터일 것이다. 책에 함께 실린 <동방 순례>는 헤세가 최후의 대작 <유리알 유희>를 구상하는 과정에서 선행 작업으로 집필한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천일야화>나 <캉디드> 같은 황당무계한 여행기처럼 시공간을 초월해서 실제했던 인물들과 작품 속 허구의 인물들이 아무런 이의 제기 없이 등장해 '동방'으로의 순례에 나선다. 여기에서 '동방'은 지리적 개념이라기보다 양극성을 넘어서는 단일성으로의 합일, 무의식의 세계를 탐구하는 동화적인 방랑의 무대로서의 역할을 한다. 동양사상에 경도되었던 헤세가 자신의 사상의 뿌리로서 동방을 내세우고 있지만 작품 속에는 헤세에게 영향을 주었던 동서양 사상의 원류들과 그와 교류했던 수많은 작가, 예술가들이 호명되어 그의 전기적, 시대적 배경들을 알려준다. 본문에 나오는 구절처럼 '동방은 그저 어떤 나라, 어떤 지역만이 아니었다. 영혼의 고향이자 청춘이었고, 어디에나 있으면서 어느 곳에도 없는, 모든 시간이 하나가 되어 버린 그런 곳'이다. ■ 줄거리 -크눌프 <초봄> 건강이 쇠약해진 크눌프는 병원에서 몇 주를 지내다가 옛 친구인 무두장이 에밀 로트푸스의 집에서 휴식처를 제공받는다. 친구는 크눌프에게 건실한 가정을 꾸며야 했다며 충고를 늘어놓지만 친구의 아내는 은밀히 크눌프를 유혹한다. 크눌프는 옆집에 사는 하녀 바바라를 알게 되고 그녀가 고향에서 직업을 찾아 도시로 온 지 얼마 안 되었고 도시 생활에 정을 못 붙이고 고향을 그리워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크눌프는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주고자 그녀와 함께 나들이를 하고 춤을 추며 추억을 남긴다. 늦게 귀가한 크눌프는 친구인 무두장이 부부와 다음 날 소풍을 가기로 약속했지만 내일 아침 친구의 집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한다. <크눌프에 대한 나의 추억>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방랑자가 1인칭 시점으로 묘사한 크눌프와의 추억 이야기이다. 이야기의 초점은 화자가 크눌프와 함께 독일의 숲과 들판을 방랑하며 함께 지낸 날들과 크눌프의 언행에 대한 묘사이다. 크눌프의 밝고 여유 있어 보이는 삶은 실은 인생의 덧없음과 어두운 면에 대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의 방랑 생활은 다른 사람에 대한 신뢰를 배신당한 아픔에서 출발했다. 남의 집에 입양된 자기 아들조차 가까이서 볼 수 없는 슬픔을 간직한 그는 사람이란 결국 혼자서 자신의 짐을 지고 가는 존재라고 말한다. 유쾌하고 자유로운 하루를 보내지만 크눌프는 다음 날 말없이 친구를 떠나 버린다. 친구는 크눌프가 자신을 떠난 이유가 자신이 전날 밤 과도하게 자축하며 술을 마신 데 대한 역겨움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종말> 병이 악화된 크눌프가 라틴어 학교 시절 친구였던 의사 마홀트와 만난다. 친구는 크눌프를 집으로 데려가 돌보며 상태가 매우 안좋다는 것을 알고 크눌프를 가까운 도시의 병원에 입원시키려 한다. 하지만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예감한 크눌프는 자신의 고향에 있는 병원으로 보내 달라고 한다. 그는 고향에 도착하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고 추억을 간직한 장소들과 친구들을 찾아 나선다. 친구들과 옛 추억을 나누던 크눌프에게 석공이 된 한 친구가 왜 재능과 능력을 활용하지 않고 방랑으로 삶을 허비했냐고 책망한다. 크눌프는 숲으로 가서 하느님과 대화를 시작하고 평화롭게 정착하는 훌륭한 삶을 살지 못한 자신의 존재 의미가 무엇인지 하느님에게 묻는다. 하느님은 그에게 특별한 목적을 두었으며 그것은 바로 사람들에게 '자유에 대한 동경'을 일깨워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대답한다. 크눌프는 하느님이 계시해준 자신의 삶의 의미에 대해 동감하고 평화롭게 눈을 감는다.그 -동방순례 결맹에 가입한 주인공 H. H는 순례자들과 함께 떠났던 동방 여행에 대한 체험을 기록하고자 하고 그 순례의 여정을 회상한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자칭 구세주나 예언자난 사도라고 하는 자들이 들끓는' 시대에 '현실의 한계를 뛰어넘고 다가오는 미래의 정신 영역으로 진입'하려는 시도 중의 하나로서 결맹의 순례가 출범한다. '영혼의 왕국'에 도달하려는 참가자들은 각자가 추구하는 바(도의 추구, 쿤달리니라는 뱀의 포획, 마호메트의 딸 파트메 공주의 사랑을 얻는 것 등)를 마음속에 간직하고서 호기롭게 정신적인 여행에 나선다. 순례단은 시공을 초월한 온갖 지역을 통과하고 동화 속 요정, 서사시 속 인물 파르치팔, <돈키호테>의 산초 판자, 화가 파울 클레 등 허구 속 인물과 실제 인물들을 만나며 명상과 축제의 시간을 가진다. 결맹의 축제에는 피타고라스, 조로아스터, 노자,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브렌타노, 호프만, 노발리스 등 수많은 인물들이 결맹의 회원으로서 등장한다. 순례단에서 눈에 띄지는 않지만 특별히 중요한 역할을 하던 레오는 유쾌하고 겸손한 태도로 사람들과 동물의 마음을 얻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하인 레오가 실종되면서 순례단은 자중지란에 빠지게 되고 결국 순례는 중단되고 만다. 화자는 자신이 경험했던 '동방 순례'에 대해 기록을 남기기로 결심하고 친구 루카스를 찾아간다. 친구의 주소록에서 레오의 주소를 찾아낸 화자는 레오를 찾아간다. 하지만 레오는 결맹의 순례에 대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며 결맹의 옛 형제를 알아보지도 못하는 것 같다. 그리고 별로 궁핍하지도 않은데 바이올린을 팔아먹었다고 화자를 비난한다. 레오를 통해 결맹과 재회하게 된 화자는 결맹의 수장이 다름아닌 레오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맹의 비밀 법정에서 레오는 화자의 실책들이 어떠한 것들이었는지 지적하고 이 모든 과정이 화자에 대한 시험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성숙의 과정에서 인간이 범할 수 있는 실수로 인정받고 결국 무죄 판결을 받는다. 결맹의 장서고에 들어간 화자는 자신과 레오의 형상을 닮은 특이한 조각상을 만나게 되고 자신의 형상이 천천히 녹아 레오의 형상으로 흘러들어 하나로 합일해 가는 모습을 지켜본다. ■ 추천사 『크눌프』, 낭만적 세상의 이 고독한 늦둥이는 독일이 낳은 불후의 명작이 될 것이다. 민요처럼 순수한 음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단연 최고의 소설이다. - 슈테판 츠바이크 『크눌프』를 몇 십 년 만에 다시 정독해 보니, 눈부시게 성공한 예술가이지만 방랑자와 사회적 루저로 인식될 수밖에 없는 주인공의 모습이 보인다. - 불프 키어스텐 『동방순례』는 하나의 신앙동화라고 할 수 있다. 불멸의 신앙 공동체가 주는 위안의 신비를 다룬 한편의 의미심장한 판타지 텍스트이다. 전대미문의 환상여행을 모티브로 하는 이 이야기 속에는 개인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이상과 현실이 매력적으로 얽혀 있다. 우리 시대의 작품들 중 헤세의『동방순례』와 유사성을 가지는 소설이라면 음산하면서도 불가사의한 분위기를 풍기는 프란츠 카프카의 작품 정도가 될 것이다. 막스 헤르만 나이세 ■ 본문에서 <크눌프> 어쩌면 무두장이 친구에게 부인의 행실과 관련해 주의를 주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사람들의 문제에 끼어드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이 더 나아지거나 더 현명해지도록 돕고 싶다는 욕구도 없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어 버린 것은 그로서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전에 옥센 호텔에서 여종업원으로 일했던 그녀에 대해 결코 호감을 가질 수 없었다. 그는 무두장이 친구가 가정과 결혼의 행복에 대해 위엄 있게 했던 연설을 떠올리면서 조금은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행복이나 미덕에 대해 자랑하고 떠벌리는 경우, 대부분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의 어리석음을 구경할 수도 있고 또 비웃거나 동정할 수도 있지만, 그들이 결국 자신들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법이다. ""인생이 본래 어떤 것인지는 각자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거고, 그런 것은 결코 어떤 책에서 배울 수 있는 게 아니야. (...)구세주께서 어린아이들 곁에 앉아 이렇게 생각하시는 장면도 있지. '내게는 교만한 모든 어른들보다 너희들이 훨씬 사랑스럽구나!' 그분이 옳다고 생각하네, 우리는 그분에게서 무언가를 배울 수 있어."" ""그래 아마 그렇겠지."" 슐로터베크는 긍정을 하면서도 크눌프의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아이들에 대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훨씬 쉬운 일이야. 자기 자식이 다섯이나 있고 그 녀석들을 어떻게 먹여 살려야 할지 모르는 경우와는 다르지."" ""나는 살아오면서 두 번의 사랑을 경험했어, 진정한 사랑을 말하는 거야. 나는 이 두 번의 사랑이 모두 영원한 것이고 오직 죽음으로만 끝날 것이라고 확신했어. 그런데 두 번의 사랑은 모두 끝났고, 나는 아직 죽지 않았어. 고향 도시에 있을 때 친구가 하나 있었지. 우리는 살아 있는 동안은 서로 헤어져 연락도 않고 지낼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어. 하지만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헤어졌고 연락도 닿지 않는다네."" ""모든 사람은 각자 영혼을 지니고 있고, 자신의 영혼을 다른 영혼과 뒤섞을 수는 없어. 두 사람은 서로 만나기도 하고, 함께 이야기할 수도 있고 또 서로 가까이 지낼 수도 있지. 하지만 그들의 영혼은 각자 자기 자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꽃과 같아서, 어떤 영혼도 다른 영혼에게로 갈 수가 없어. 만일 가려거든 그 영혼은 자신의 뿌리를 떠나야 하는데, 그 또한 불가능한 일이지. 꽃들은 서로 다른 꽃들에게 가 닿고 싶은 마음에 향기와 씨앗을 보내지. 하지만 씨가 적당한 자리에 떨어지는가 하는 부분에서 꽃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것은 바람이 하는 일이고,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원하는 곳으로 이리저리 불어댈 뿐이야."" <동방순례> 내가 보기에는 세계사 전체가 가끔은 인간의 가장 격렬하고 맹목적인 동경, 다시 말해 망각에 대한 동경을 반영하는 한 권의 그림책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 세계사에서는 어느 시대든지 금지나 묵살, 조롱이라는 수단으로 이전 세대가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제거해 버리고 있지 않은가? 여러 해 동안 이어진 엄청나게 끔찍했던 전쟁을 모든 민족들이 몇 년이나 잊어버리고 부정하며 마술적으로 억누르고 쫓아 버렸다. 그런데 그 민족들이 잠시 휴식을 취하고 나서는 수년 전에 그들 스스로 일으켜 고난을 겪었던 전쟁을 흥미진진한 소설의 힘을 빌려 다시 기억해 내려는 것을 우리는 막 경험하지 않았던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이기적인 충동에서 비롯된다는 임상의나 심리학자들의 주장이 옳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일생 동안 어떤 일에 봉사하면서 자신의 즐거움이나 행복을 소홀히 한 채 일을 위해 희생하는 인간이 어째서 실제로 노예를 사고팔거나 탄약 장사를 하여 얻은 수익을 사치로 탕진하는 인간과 정말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느냐는 점이다. 그러나 그런 심리학자들과 논쟁을 벌여 보아야 나는 당장 패배하고 설득당할 것이 뻔하다. 왜냐하면 심리학자들은 언제나 승리를 거두는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헤르만 헤세 선집 05 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05 게르트루트>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5. 게르트루트 수많은 수채화 작품을 통해 헤세의 화가로서의 면모는 잘 알려져 있지만 그의 삶에서 음악이 차지했던 역할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헤세의 삶과 창작에서 음악은 항상 특별한 역할을 차지했다. 음악가의 전통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난 헤세는 어렸을 때부터 바이올린 연주를 배웠고 수많은 음악가, 작곡가들과 교분을 쌓았다. 음악 비평과 논평도 썼고, 그의 수많은 시들은 노래로 작곡되었다. 실제 삶뿐 아니라 헤세의 많은 소설에서도 음악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처녀 장편소설인 <페터 카멘친트>에는 리하르트 바그너에 매료되었던 경험이 반영되어 있고 <데미안>에서 싱클레어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에게 기분이 울적할 때면 북스테후데의 파사칼리아를 연주해 달라고 부탁한다. <황야의 늑대>에서 주인공 하리 할러는 재즈 연주자인 파블로에게 베토벤, 브람스, 바그너의 음악은 화성이 넘쳐 나서 감정을 드높이지만 바흐나 모차르트 음악에 나타나는 정신성은 억누른다고 말한다. 그리고 <유리알 유희>의 세계에서는 퍼셀의 바로크 음악이 감동적으로 울려 퍼진다. <게르트루트>는 음악이라는 소재를 전면에 내세운 헤세의 초기작이다. 국내에는 1970년대에 <사랑의 삼중주>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는데 그당시 제목대로 <게르트루트>는 사랑의 삼각관계를 다룬 작품으로 읽을 수도 있고 헤세의 보편적 주제인 양극성의 조화에 대한 음악적 변주로 볼 수도 있다. 헤세가 자신의 자아를 두 인물로 분리하여 그린 수많은 작품들처럼 <게르트루트>에서도 일인칭 화자인 작곡가 쿤과 삼인칭으로 묘사되는 오페라 가수 무오트는 한 예술가의 아폴론적인 속성과 디오니소스적인 속성을 형상화한 것이다. 헤세 소설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이원적인 존재이다. 그들은 인간이면서 늑대이고, 범죄자이면서 신사이고, 소시민이면서 예술가이고, 건강하면서 병들어 있다. ‘내 가슴에는 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괴테의 <파우스트>의 다양한 변주라고 할 수 있다. <게르트루트>는 작품 전체에서 서정성과 낭만성이 다른 작품들에 비해 두드러진다. 특히 사고로 불구가 된 쿤이 알프스 산악 마을을 갔다가 자연 속에서 작곡의 영감을 얻는 대목은 ‘은은한 리듬감과 색채감, 표현의 소박함’이 묻어난다. ‘언어의 우아함을 이처럼 매력적으로 드러낸 책은 없다’는 현지 평론가의 말대로 이 소설 속에는 ‘음악이 오롯이 담겨 있다’. ■ 줄거리 음악학교 학생인 쿤은 학창 시절 여자 친구와 장난치며 썰매를 타다가 불구가 된다. 연주자의 길과 작곡가의 길을 놓고 고민하던 그는 알프스 산악 마을을 찾아가 그곳에서 작곡의 영감을 얻고 작곡가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작곡한 실내악이 음악계에서 좋은 평판을 얻으면서 쿤은 궁정 오페라 가수인 무오트와 알게 된다. 변덕스럽고 거들먹거리며 바람둥이에 제멋대로 구는 무오트의 첫인상은 쿤에게 부정적인 느낌을 준다. 하지만 무오트가 쿤의 작품을 높이 평가하고 그의 위악적인 겉모습 속에 예술에 대한 열정과 깊이 있는 사고가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되어 기질적으로 정반대인 두 사람은 친구가 된다. 무명의 초보 작곡가인 쿤은 무오트의 소개로 오페라하우스의 바이올리니스트로 입단하게 되고 거기에서 만난 동료 타이저에게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소개해 격찬을 받는다. 타이저의 소개로 임토르의 집에서 개최되는 실내악의 밤에 초대된 쿤은 자신의 바이올린 소나타를 연주한 뒤 임토르의 딸인 게르트루트를 보고 첫눈에 사랑을 느낀다. 쿤은 무오트를 위해 준비해왔던 오페라 곡을 쓰기 시작하고 오페라 곡 연습을 계기로 무오트와 게르트루트는 만나게 된다. 쿤이 게르트루트에게 이성으로서의 호감을 암시하자 게르트루트는 쿤에게 당분간은 친구 관계로 지내자고 한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게르트루트와 무오트가 사귄다는 걸 알게 된 쿤은 변덕스러운 무오트와 게르트루트의 결합이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지만 사랑의 경쟁은 포기하고 자신이 두 사람의 사랑을 위해 양보한다. 그러한 갈등과 긴장에도 불구하고 오페라는 성공적으로 공연되고 쿤은 성공의 여운을 한동안 만끽하며 보낸다. 얼마 뒤 임토리의 집을 찾은 쿤은 무오트와 게르트루트의 결혼생활이 행복하지 않음을 듣게 되고 두 사람은 얼마 안 있어 별거하게 된다. 게르트루트를 애타게 찾던 무오트는 게르트루트가 자신에게로 돌아오지 않자 쿤에게 편지를 보낸다. 두 사람은 무오트가 주문한 게르트루트의 초상화를 옆에 두고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고 단잠을 자던 쿤은 새벽에 하인이 다급하게 불러 무오트의 방에 가보는데 방 안에 자살한 무오트의 모습이 침대에 엎어져 있는 것을 본다. ■ 추천사 이 소설은 기본적으로 음악에 대한 소설이면서 동시에 삶의 의미를 다룬 소설이다. 니체에 기대어 우리는 헤세 소설의 주제를 ‘음악의 정신으로 부터 재탄생한 인간의 자유로운 영혼’으로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적어도 금세기에 출간된 독일 소설 중에서 이성적인 명료함과 추진력 면에서 이처럼 매력적으로 언어의 우아함을 드러낸 작품을 경험한 기억이 없다. 은은한 리듬감으로 채워져 있는 이 소설 속에는 음악이 오롯이 담겨 있다. 하나의 절제된 안단테라고 할 수 있다. - 요제프 빅토르 비트만 헤르만 헤세의 고백은 오늘날 하늘이 들썩거릴 정도로 요란스럽게 살아가는 젊은 세대들에게 이중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처럼 보여진다. 하나는 자연과 풍경과 자연스러움을 만끽하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언어의 소박성을 추구하라는 것이다. - 로베르트 노이만 내가 보기에 헤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아름다운 독일어를 구사하는 작가이다. 그의 문장들엔 색채감과 리듬감이 흘러넘치는가 하면, 더없이 순수하면서도 표현의 의식적인 소박함이 묻어난다. 자연경관을 묘사하는 헤세의 솜씨는 단연 압권이다. 그의 작품을 동시대의 다른 독일 소설들과 차별화시키는 결정적인 부분은 이른바 ‘구체성’의 미학이다. 우리는 그의 구체화된 분위기에 취하게 되고 때론 자신의 기력을 소진시키기도 한다. 나아가 헤세는 색채와 분위기에다 윤곽을 그려 넣고, 확고한 틀을 구축하기도 한다. - 테오도어 호이스 ■ 본문에서 어느 날 저녁 고즈넉할 무렵 바위 비탈에서 집으로 돌아오다가, 그 모든 것을 처음으로 뚜렷이 느꼈다. 이를 골똘히 생각할수록 나 자신이 수수께끼처럼 보였을 때, 불현듯 그 모든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떠올랐다. 내가 어렸을 적 어렴풋이 맛봤던 저 낯설고 경이로운 시간이 돌아온 것이었다. 그 기억과 더불어 눈부시게 맑은 시간이 되돌아왔다. 감정들이 거의 유리처럼 환하게 내비쳐서 어느 감정이든 아무 가식이 없었고, 어떤 감정도 고통이나 행복을 품지 않고 오로지 힘과 울림과 흐름만을 의미했다. 내 고조된 느낌들이 일렁거리고 아른거리고 맞싸우면서 음악이 생겨났다. 인생사와 인간사란, 이것은 미워하고 저것은 사랑하며, 이자는 존경하고 저자는 경멸하면서 그리 손쉽게 헤쳐 나갈 수 없다. 세상만사는 얽히고설켜 있어서 거의 떼어놓을 수 없고 어떤 때는 거의 분간할 수 없다. “청춘이란 속임수입니다. 신문이나 교과서에서 떠드는 진짜 속임수예요!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라니! 노인들이 하는 일이 내게는 훨씬 더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청춘은 인생에서 가장 고달픈 때입니다. 이를테면 나이가 지긋해지면 자살하는 일이 거의 없지요.” “우리 노인들은 당연히 그 반대라고 말하지. 하지만 네 친구는 무언가 진리를 알아챘구나. 내가 생각하기에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청춘과 노년 사이에 경계를 뚜렷이 그을 수 있다. 청춘은 이기심이 없어지면서 끝나며, 노년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살면서 시작되거든. 무슨 말인가 하면, 젊은이들은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서 살기 때문에 인생에서 즐거움과 괴로움을 숱하게 겪는다. 어떤 소원이든 어떤 생각이든 소중하며, 어떤 기쁨이든 끝까지 즐기지만 어떤 고통이든 끝까지 겪기도 한다. 소원을 이루지 못하면 곧바로 인생 전체를 내던지는 젊은이들도 있지. 이것이 청춘이다..... 가장 정열적이었던 젊은이가 가장 훌륭한 노인이 되는 법이다. 학교 다닐 적부터 애늙은이처럼 행동했던 젊은이는 오히려 그렇지 못하지.” “제대로 된 예술가라면 인생이 불행할 수밖에 없네. 배가 고파서 자루를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늘 진주만 들어 있으니까!” “어떤 철학자는 같은 시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아서 개인주의를 생각해 내고, 다른 철학자는 홀로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해 사회주의를 만들어 내지. 우리의 외로운 감정은 일종의 병일지도 몰라. 다만 이를 어떻게 해볼 수 없네.”

헤르만 헤세 선집 04 황야의 늑대

<헤르만 헤세 선집 04 황야의 늑대>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4. 황야의 늑대 <황야의 늑대>는 1960년대에 미국을 중심으로 세계 문학계에 ‘헤세 르네상스’를 불러온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작품이다. 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헤세의 문학세계에 평단이 월계관을 씌워주었지만 헤세가 쓴 책들의 판매는 그의 사후 조금씩 줄어드는 추세였다. 그런 상황 속에서 기존 체제와 관습에 저항하는 청년 문화가 확산되고 삶의 대안을 찾으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 삶의 대안을 모색하던 문화 그룹들이 헤세의 <황야의 늑대>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것이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 대한 관심으로까지 확산되었다. <황야의 늑대>는 헤세의 작품 중 연극, 음악, 영화 등의 대중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1960년대에 설립되어 오늘날까지 미국의 대표적 극단으로 인정받고 있는 ‘매직 시어터’와 ‘스테픈울프 시어터 컴퍼니’는 <황야의 늑대>에 등장하는 가공의 무대와 주인공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고 작품과 동명의 밴드와 앨범, 노래, 영화 등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황야의 늑대>는 헤세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 기법이 매우 현대적이다. 일반적인 내러티브와는 거리가 있는 방식으로 시민사회의 한 아웃사이더를 1인칭 시점, 관찰자의 시점, 소논문의 세 요소로 입체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리고 후반의 실재인지 환각인지 분명치 않은 ‘마술 극장’ 장면의 분위기는 서정과 낭만이 넘치는 초기작들과는 사뭇 다른 카니발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황야의 늑대>의 집필 동기는 헤세가 1차 대전 당시 겪었던 개인적인 체험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주인공 하리 할러는 시민사회의 시민성이 비겁함과 속물성과 안전제일주의로 흐르는 것을 견디지 못하고 거리를 두려 한다. 하지만 자신이 완전한 늑대로서 야생에서 살 수도 없기 때문에 그는 시민사회의 경계에 아웃사이더로서 머물려 한다. 황야의 늑대도 시민사회의 건전한 시민도 될 수 없는 하리 할러의 딜레마는 원천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다. 1차 대전 당시 헤세는 전쟁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했다가 독일 국민들과 언론들로부터 매국노라는 욕을 얻어먹어야 했다. 전쟁이라는 악을 방지하는 데 시민사회가 보인 무력감과 이성의 상실은 헤세에게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주었다. 작품 속에서 하리 할러가 어느 교수의 집을 방문했다가 교수가 자신이 쓴 반전 신문 기사를 거론하며 필자를 욕하는 말을 듣는 장면과 보수적이고 선동적인 신문으로부터 신랄하게 공격받는 대목은 1차 대전 중 겪은 헤세의 체험의 직접적인 반영이다. ■ 줄거리 <황야의 늑대>는 일반적인 스토리텔링 소설과는 다르게 하리 할러라는 아웃사이더의 면모를 여러 관점으로 조명해보는 특이한 구조의 소설이다. 주인공 할러가 아웃사이더로서의 방황을 마치고 25년 이상 살았던 도시로 귀향하면서 소설은 시작된다. 할러에 대한 묘사는 우선 할러가 세들었던 집의 조카가 쓴 ‘편집자의 서언’을 통해 전해진다. 집주인의 조카인 편집자는 ‘서언’을 통해 할러의 외모와 인상을 비롯해서 그의 독특한 행동방식과 생활 패턴을 객관적인 관찰자의 시선으로 묘사한다. 그가 묘사하는 할러라는 인물은 기인(奇人)에 가까운 지식인이라는 사실을 사전에 독자들에게 환기시켜준다. 내용의 뼈대를 이루는 ‘하리 할러의 수기’와 수기 속에서 소개되는 ‘황야의 늑대에 관한 소논문’은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면서도 현대인의 생활환경을 떠날 수 없는 한 인간의 딜레마적 상황을 한 편의 파노라마처럼 펼쳐 보여준다. 할러는 자신의 삶의 뿌리가 부르주아적 시민세계에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지만 ‘시민성’이라는 획일화된 집단 정체성 안에 갇히는 걸 경계한다. 할러가 시민세계에 거리를 두는 이유는 가치와 정의가 붕괴되고 신앙과 도덕도 사라져버렸고 온갖 기만과 부조리가 판치는 위기의 상황 속에서 시민사회가 그에 대응할 윤리를 만들어내지 못하고 보이는 무기력감 때문이다. 자유를 구속할 수밖에 없는 시민사회의 질서와 안정 지향도 할러를 불편하게 만든다. 할러는 여러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시민사회 안으로 편입해보려 하지만 그것이 내포하는 속물성과 질서 안의 합리성이라는 것이 자신의 취향과는 결코 화해될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결국 자신은 시민사회의 영원한 아웃사이더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할러는 바에서 만난 낙천적이고 쾌활한 헤르미네라는 여인을 통해 억압되어 있던 자신의 다양한 모습들을 표현하게 되고 그녀가 소개한 파블로란 악사와 마리아란 직업여성을 통해 에로스와 ‘이성적인 것이 아닌 어떤 것’으로서의 광기를 ‘마술극장’이라는 환상의 무대를 통해 체험하게 된다. ■ 추천사 <황야의 늑대>는 내게 진정한 독서란 무엇인지에 대해 처음으로 일깨워준 작품이다. - 토마스 만 시대 전체가 하리의 영혼 속으로 집결되는 듯한 강렬한 인상이 들었다. 자신과의 싸움을 벌이는 과정이 곧 우주 전체와의 투쟁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 설정이 탁월했다. - 오스카 뢰르케 저자는 이 소설에서 이른바 세 개의 상이한 의식의 단계를 들여다본다. 첫 번째 단계에서는 객관적인 시민의 시각, 두 번째 단계에서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는 예술가적 자아의 관점,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는 초월적 심급으로 관점 전환을 한다. 『황야의 늑대』가 취하고 있는 이러한 작품 구조는 헤세의 그 어떤 작품보다도 제임스 조이스의『율리시스』이래로 우리가 ‘현대 소설’이라 부르는 장르에 가장 근접해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하고 있다. 이 소설이 야기하는 정치적 충격과, 문화계에 대한 진단을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서는 냉철한 머리를 필요로 한다. - 헤르만 부르거 ■ 본문에서 “인간의 삶이 정말로 고통이고 지옥이 되는 때는 두 개의 시대, 두 개의 문화, 두 개의 종교가 충돌을 일으킬 때예요. 고대의 한 인간이 중세 때 살아야 했다면, 그는 그 문명의 한복판에서 고통스럽게 질식하고 말았을 겁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두 개의 시대, 두 개의 삶의 양식에 끼어 살고 있지요. 그래서 자명한 윤리도 안정감도 순수성도 잃어버린 겁니다.” 정신을 죽이고 현실에 만족하는 이 시민적 시대의 한복판에서, 이따위 건축물들과 사업들과 회사들 사이에서, 이따위 정치와 인간들 속에서는 그것을 발견하기 어렵다. 이렇듯 추구하는 목적과 기쁨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이 세상의 한복판에서 어찌 내가 한 마리 황야의 늑대가, 거친 은둔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우리는 내일이면 잊히거나 비웃음거리가 될, 마지막으로 남은 소수의 까칠한 노이로제 환자가 아닐까? 문화, 정신, 영혼, 아름다움, 성스러움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오래전에 죽었는데, 우리 몇몇 멍청이들만 그것이 실재한다고 믿고 있는 유령이 아닐까? 우리 같은 바보들이 잡으려고 애쓰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환영에 불과한 게 아닐까? 한쪽 길은 성자, 정신에의 순교자, 신을 향한 귀의의 길이고, 또 다른 길은 탕자, 본능에의 순교자, 자발적 타락의 길이다. 시민은 이 두 갈래의 길 사이에서 중용의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 시민은 신에게 귀의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하고 싶어 한다. 그는 결코 그 두 갈래 길 중 한쪽에 빠지거나 의지하려 들지 않는다. 시민의 이상은 자아 희생이 아니라 자아 보존이기 때문이다. 시민은 신성함도 그 반대도 지향하지 않는다. ‘절대성’이란 것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시민은 신에게 귀의하기를 원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타락하고 싶어 한다. 덕성을 갖추고자 하면서도 동시에 세상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어 한다. 요컨대 시민은 양극단 사이의 중간, 다시 말해 격렬한 폭풍우로부터 비껴나 있는 안전한 회색지대에 안주하려 한다. 성인과 죄인을 비롯해 모든 절대성을 추구하는 자들이 중립적이고 미온적인 중도, 즉 시민적인 것을 긍정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위대한 것을 행하라는 소명과 재능을 받았으나 그를 이루지 못한 비극적인 인물들의 훌륭한 발명품이라 할 수 있는 유머, 인류의 가장 독특하고 탁월한 업적인 유머만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 유머의 프리즘을 통과한 빛이라야 인간의 모든 영역을 하나로 통합시킬 수 있는 것이다. 세상 속에 살면서도 마치 세상 밖에 있는 듯 사는 것, 법규를 준수하면서도 법을 초월하는 것, 소유하면서도 소유하지 않는 듯 사는 것, 포기하면서도 마치 포기하지 않은 듯 사는 것 등, 고차원적인 삶의 지혜를 실현시켜 주는 것은 오로지 유머뿐이다. 그래도 아무튼 우리의 황야의 늑대는 적어도 파우스트적인 이중성은 자신 안에서 발견했다. 자신이 하나의 육체 속에 하나의 영혼이 깃든 통일체가 아니라, 기껏해야 그러한 조화로운 이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나긴 순례길에 오른 존재임은 깨달은 것이다. “춤은 전혀 못 춘다고요? 원스텝조차? 그러면서도 힘겨운 삶을 살아왔다고 주장하는군요. 그건 엄사라이에요. 춤 하나 배울 의지도 없었으면서 어떻게 치열하게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어요?” “나에겐 더 이상 조국이란 것도, 이상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아. 그런 것들은 다음 살육을 준비하는 양반들을 위한 장식품일 뿐이야.” 이 전쟁에서는 황제, 공화국, 국경, 깃발의 색깔 등 장식적이고 연극적인 시시콜콜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금방이라도 질식해 버릴 것 같은 인간, 더 이상 삶의 낙을 찾지 못하게 된 인간들이 자신들의 불만을 표출해 차가운 회색빛으로 물든 문명 세계를 해체하려 한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인간이 영속적인 통일체라는 견해는 오류일 뿐만 아니라 불행까지 초래한다는 사실을 당신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인간은 수많은 영혼과 자아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겉보기에 하나의 통일체를 이루고 있는 개성을 그토록 많은 형상들로 분열시키는 것은 어쩌면 미친 짓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과학은 그것에다 정신분열증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기까지 했지요. 어떠한 다양성도 통제 없이는, 다시 말해 규칙과 체계에 따르지 않고서는 길들일 수 없다는 점에서는 그러한 과학적 입장은 타당하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수많은 잠재적 자아마저도 어떤 유일무이하고 절대적이며 평생을 따라다니는 질서의 지배를 받을 것이라 믿고 있다는 점에서는 과학은 틀렸습니다.”

헤르만 헤세 선집 03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선집 03 싯다르타>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3. 싯다르타 <싯다르타>는 인도를 배경으로 한 모든 소설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다. 인도에서는 이 <싯다르타>를 인도에서 사용되는 모든 언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기 위해 헤르만 헤세 협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1926년 우리나라에 최초로 소개된 헤세의 소설도 바로 <싯다르타>였다. 헤세의 인도를 비롯한 동양문화와의 인연은 어렸을 때부터 매우 각별했다. 외할아버지가 저명한 인도어 학자였고 아버지와 어머니가 모두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헤세가 <싯다르타> 2부를 헌정한 외사촌 빌헬름 군데르트는 일본 학자로 일본 선불교에 조예가 깊었다. 헤세는 어린 시절부터 외할아버지의 서가에서 <우파니샤드>를 비롯한 힌두교 경전들과 불경들을 읽었고 노자의 <도덕경>에도 크게 영향을 받았다. 유년 시절 이후 부모의 경건주의적 기독교에 반감을 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접했던 인도와 중국 등의 동양사상이 그 배경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싯다르타’는 불교의 역사적 사실과 달리 부처와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부처는 고타마라는 이름으로 등장해 싯다르타에게 영향을 주지만 그 역할은 제한적이다. <데미안>의 데미안과 싱클레어, <수레바퀴 밑에>의 기벤라트와 하일너가 헤세 자신의 두 가지 속성을 분리시킨 인물이듯이 헤세는 <싯다르타>에서도 부처를 깨달음을 얻으려고 영혼의 투쟁을 하는 싯다르타와 깨달음을 얻은 존재로서의 고타마를 분리시키고 있다. <싯다르타> 속의 여러 인물들은 인도 문화에서 가져온 것으로 불교뿐 아니라 힌두교의 종교적 표상도 담고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의 이름은 불교와 힌두교의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신들의 이름이 변용되어 사용되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자기실현을 완성하여 해탈의 경지에 들어서는 깨달음을 얻는 계기는 무위자연을 강조하는 도가철학과 가깝다고 볼 수 있다. 불교의 고행과 금식, 속세로 귀환해서 벌이는 무절제한 욕망의 탐닉으로 처절하게 구원의 길을 향해 몸부림치던 싯다르타는 뱃사공 바주데바의 무언의 가르침과 침묵하는 강이 전하는 가르침을 통해 결국 내면의 평화를 찾게 된다. 헤세는 <싯다르타>를 발표하고 난 뒤 어느 글에서 자신이 생애의 절반 이상을 인도와 중국 연구에 몰두했다고 적었다. 기독교와 서양 문화의 세계관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을 고민했던 헤세가 그 바탕으로 삼았던 것이 동양문화라는 사실은 헤세의 작품세계와 정신적 궤적을 이해하기서도 매우 중요하다. <싯다르타>는 동양문화에 대한 헤세의 오랜 관심과 연구가 응축된 그 결정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줄거리 부유하고 학식이 높은 브라만 계급의 아들로 태어난 싯다르타는 학식이나 주위 사람들의 인정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정신적 갈증을 이기고자 친구 고빈다와 함께 출가해 사문의 길로 접어든다. 시간 속에서 필멸하는 존재의 허무를 극복하기 위해 싯다르타는 온갖 경전을 익히고 참선을 하고 단식과 호흡법을 배워 자아를 탈출해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법을 배우지만 윤회의 순환 고리 속에서 다시 고통스럽게 자신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에 깊은 절망감을 느낀다. 싯다르타는 결국 자신이 찾고자 하는 참된 깨달음을 스승이나 책을 통해서는 얻을 수 없다는 사실만을 어렴풋이 깨닫는다. 그럴 즈음 싯다르타의 귀에 온갖 번뇌를 극복하고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났다는 고타마에 관한 소문이 들려온다. 싯다르타는 사문 생활을 청산하고 고빈다와 함께 고타마의 가르침을 들으러 떠난다. 고타마의 가르침에 감명받은 고빈다는 곧바로 불법에 귀의하지만 싯다르타는 부처가 깨달은 자라 하더라도, 그의 가르침이 아무리 훌륭하다 하더라도 부처의 가르침 자체로는 자신의 해탈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싯다르타는 이제까지의 길을 바꾸어 삼라만상의 감각세계에 열중해 세상을 파악하고자 한다. 아름다운 창녀 카말라를 통해 감각의 세계를 익히고 거상 카마스와미 밑에 들어가 장사꾼으로서도 남다른 수완을 발휘해 막대한 재산을 모은다. 도박에 몰두하고 카말라와의 사랑의 향락에 취하고 사업의 이익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지만 몇 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 그는 이런 삶이 혐오감을 불러올 뿐이라는 걸 깨닫고 자신의 인생은 실패라고 여긴다. 깊은 절망감에 빠져 있던 그는 사공 바주데바를 만나 그의 단순한 삶을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는다. 싯다르타는 바주데바를 스승으로 강물이 전해주는 진리에 귀를 기울이며 사색을 거듭한다. 궁극적 진리는 언어로 전달할 수 없고, 논리적인 설명으로도 이해시킬 수 없으며, 교리를 통해서도 도달할 수 없는 영역임을 다시 한 번 깨달은 싯다르타는 뱃사공의 단순한 삶을 통해서도 부처가 얻은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이 들어 고빈다와 우연히 재회한 싯다르타는 강을 통해 얻은 깨달음, 실재하지 않는 영원한 현재 상태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시간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세와 영원, 고뇌와 행복, 선과 악 사이에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간격도 하나의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전한다. ■ 추천사 노자의 도덕경 이후 내게 이보다 더 큰 의미를 일깨워준 책은 없었다. 짧고 간결한 책이지만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으며, 웃음을 통해 속세의 혼탁함을 극복함과 동시에 세상을 재발견하게 해주는 지혜를 선사해준다. 헤세는 동서양의 정신적 유산을 문학적으로 승화시켜 우리가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붓다를 넘어 또 하나의 붓다를 창조하였다. 이것은 독일인들로서는 실로 전대미문의 성취라고 할 수 있다. 헤세의 『싯타르타』는 적어도 내게는 신약성서보다 더 큰 치유력을 가진 작품이다. - 헨리 밀러 오늘날 헤세만큼 전통에 천착하면서 그 안에 의식의 토대를 두고 있는 작가도 드물 것이다. 사물을 꿰뚫어 보는 그의 눈에는 한 치의 과장도 한줌의 허튼 수작도 용납되지 않는다. 그의 목소리는 국가의 모든 계층들에게 반향을 일으키며, 그들에게 헤세는 언제나 ‘젊은’ 존재로 남아 있다. 헤세의 모든 발언들, 말하자면 그의 저서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수많은 기고문과 서평들을 살펴보면, 그가 자신이 걸어온 파란만장한 삶의 여정들을 성찰함과 동시에 그것을 철저히 객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헤세에게서 감각의 세계는 활짝 열려 있으며, 더 없이 순수하고 거리낌 없는 공간이다. 헤세는 치열한 자기 성찰의 과정을 거친 뒤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는데, 이것이 바로 ‘신중함’이다. - 후고 발 ■ 본문에서 “도대체 네가 스승들한테서 배우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지? 그리고 너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던 그들이 도저히 가르쳐 줄 수 없었던 것이 무엇이지? 바로 자아의 의미와 본질이었어. 나는 자아에서 빠져나오고 싶었어. 하지만 그럴 수 없었어. 단지 자아를 속이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쳤을 뿐이야. 정말이지 자아만큼 내가 몰두한 화두는 없었어. 내가 살아 있다는 수수께끼, 내가 모든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는 남다른 존재라는 이 수수께끼, 내가 싯다르타라고 하는 이 수수께끼만큼 나를 몰두하게 만든 것은 없었어. 그런데도 나는 이 세상의 어떤 것보다도 나 자신, 싯다르타에 대해 가장 적게 알고 있어!” “내가 나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은, 싯다르타가 내게 낯설고 생소해 보이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야. 내가 나 자신을 무서워하고, 나 자신을 두려워하기 때문이야! 나는 아트만을 추구했어. 그리고 브라만을 추구했어. 내 자아를 부수고 껍질을 벗겨 내 미지의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아트만을, 생명을, 그 신성하고 궁극적인 것을 찾아내려고 했어. 그러나 바로 그러다가 나 자신을 잃어버렸어. 나는 나 자신한테서 배워서 나 자신의 제자가 될 것이며, 나는 나를, 싯다르타라는 비밀을 알아내겠어.” 사물의 본질과 의미는 사물의 배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들 속에, 아니 모든 것 속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싯다르타,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바로 이런 것이지요? 강물이란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강의 원천에서나, 강어귀에서나, 폭포에서나, 나루터에서나, 시냇물의 여울에서나, 바다에서나 산에서나, 어디서나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강물에는 현재만이 있을 뿐 미래의 그림자는 없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렇습니다.” 싯다르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것을 배우게 되자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나의 인생도 한 줄기 강물과 다름없더군요. 소년 싯다르타와 장년 싯다르타와 노년 싯다르타는 단지 그림자에 의해 분리되어 있을 뿐 현실에 의해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싯다르타의 전생도 결코 과거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싯다르타의 죽음이나 브라마에로의 복귀도 결코 미래의 일이 아닐 것입니다. 과거였던 것이나 미래에 있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현재입니다. 모든 것이 실재하는 현재입니다.” “깨달음을 추구하는 자가 흔히 겪는 일이지요. 다시 말해 그 사람의 눈은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만 보기 때문에 아무것도 찾아내지 못하게 되고, 아무것도 마음속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됩니다. 자신이 추구하는 것만 생각하고, 자신이 정한 목표에만 정신이 팔려 있기 때문이지요. ‘추구’라는 말 자체가 이미 목표를 갖고 있다는 뜻이지요. 반면 ‘깨달음’은 자유롭게 열려 있는 상태, 목표가 없는 상태를 뜻합니다.” “이보게 고빈다, 내가 얻은 생각들 중 하나는, 지혜란 남에게 전달할 수 없다는 것이야. 지혜는, 현인이라고 해도 그것을 전달하려고 하면 할수록 어리석은 소리가 되네.” “자네 농담하는 건가?” 고빈다가 물었다. “농담하는 게 아닐세. 내가 깨달은 사실을 말하고 있는 걸세. 지식은 전달할 수 있지만, 지혜는 전달할 수 없는 법이라네. 우리는 지혜를 찾아낼 수 있고, 그것을 체험할 수도 있네. 그것을 지니고 있을 수도 있고, 그것으로 기적을 행할 수도 있네. 그러나 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 말로 가르칠 수는 없다네. 젊은 시절부터 나는 가끔 이러한 사실을 예감했고, 그 때문에 스승들을 떠난 거라네.”

헤르만 헤세 선집 02 수레바퀴 밑에

<헤르만 헤세 선집 02 수레바퀴 밑에>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2. 수레바퀴 밑에 헤세는 어느 글에서 자신의 작품들을 ‘영혼의 전기’로 규정했다. 각 작품들은 그 시기의 헤세의 고민과 문제의식이 숨김이나 과장 없이 잘 드러나 있다. <수레바퀴 밑에>는 헤르만 헤세의 많은 작품 중에서도 자전적인 요소가 가장 두드러지는 ‘유년 시절의 자서전’이라 할 수 있는 작품이다. 시골 마을에서 주위 사람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던 수재 한스 기벤라트(Gibenrath라는 이름에는 ‘Geben Sie mir Rat’ 즉 내게 조언을 해주세요, 라는 뜻이 담겨 있다. 하지만 기벤라트는 가정과 학교로부터 진정한 조언을 받지 못하고 사회의 몰이해 속에서 죽음을 맞이한다)가 명문학교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억압적인 규율과 학업의 부담감, 가족과 주변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서 원초적인 건강한 생명력이 말살 당해 결국 파멸에 이르는 이야기는 가감 없이 헤세의 신학교 입학과 자퇴에 이르기까지의 전말을 다루고 있다. 소설 속의 주요한 캐릭터인 한스 기벤라트와 헤르만 하일너는 열세 살 때부터 ‘시인이 아니면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다’던 헤세의 두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주위의 기대에 부응하고자 행동하는 모범생 한스 기벤라트와 규율에 반항적이며 시인을 꿈꾸는 몽상가 기질의 헤르만 하일너는 속 깊은 우정을 나누며 답답한 신학교 생활을 이겨내려 하지만 권위적인 교육 시스템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두 소년의 불행한 결말로 소설은 획일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을 억압하는 교육 제도에 대한 비판을 일면 강조하는 듯 보인다. 하지만 그런 어두운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에서 기벤라트와 하일너가 나누는 우정은 너무도 아름답다. 감수성 강한 사춘기 때 새로운 친구를 사귀고 우정을 쌓아가는 과정을 이렇게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형상화해 보여준 사례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청춘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기벤라트와 하일너라는 두 소년의 이름은 청춘과 우정의 영원한 심벌로 앞으로도 계속해서 성장통을 겪는 모든 이들을 위로할 것이다. ■ 줄거리 한스 기벤라트는 온 마을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수재이다. 학교의 교장선생님이나 마을의 목사 같은 주위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어린 한스는 공부에 방해되는 모든 놀이를 포기하고 공부에만 매진한다. 과도한 학업이 어린 소년에게 가져다줄 안 좋은 영향에 대해 구두 장인 플라이크만이 걱정을 한다. 작은 마을 출신으로 어려운 주 시험을 차석으로 통과해 한스는 온 마을의 자랑거리가 된다. 한스는 입시 공부로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입학 전까지 좋아하는 낚시를 하고 자연 속에서 한가로운 시간을 보내려 하지만 학교에서 앞으로 할 공부에 대한 예습이 필요하다는 목사님과 교장 선생님의 권유에 따라 다른 아이들처럼 방학 중에도 마음껏 쉬지 못하고 수학과 히브리어를 공부하게 된다. 신학교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 한스는 개성 강한 학우들과 지내면서 학업 성적을 유지하기 위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데 시인을 꿈꾸는 헤르만 하일너라는 반항적인 천재와 사귀면서 한스는 성적에만 가치를 두는 자신의 사고방식이 옳은 것인지 회의하기 시작한다. 헤르만과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학교의 주입식 교육과 엄한 규율이 점점 구속으로 다가오게 되고 한스의 성적은 점점 더 추락하게 된다. 헤르만이 감옥과도 같은 신학교의 담을 넘어 며칠간 마음대로 나다니다 결국 마을에서 붙잡혀 온 뒤 퇴학을 당하고 혼자 남게 된 한스는 친구들의 무시, 학교 선생님들의 무관심 속에서 마음의 병이 점점 더 깊어진다. 헤르만의 퇴학 이후 심신이 완전히 무너진 한스는 성적은 말할 것도 없고 두통과 환각에 시달리다가 결국 학교를 떠나게 된다. 과도한 긴장으로 신경쇠약 진단을 받은 뒤 고향에 돌아온 한스는 예전과 다름없는 자연을 통해 위로를 받지만 그에게 성원을 보내줬던 사람들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한스를 냉랭한 시선으로 대한다. 한스는 구두장이 플라이크의 조카딸인 에마에게서 짜릿한 첫사랑의 감정을 느끼지만 짧은 만남이 덧없이 끝남으로써 더 깊은 좌절감을 맛본다. 신학교에서 퇴학당한 한스는 견습 기계공으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 한다. 일주일의 익숙지 않은 노동 뒤 일요일에 한스는 동료들과 어울려 놀러간다. 술집에 들러 처음으로 과음을 한 한스는 의식이 흐릿한 상태에서 혼자 귀가하다가 강물에 빠져 익사한다. 목격자가 아무도 없어서 그의 죽음이 사고사였는지 자살이었는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한스 기벤라트는 비극적인 죽음으로 다시 고향에서 유명한 존재가 되지만 장례식이 끝나자 사람들은 곧 자신들의 일상세계로 되돌아간다. ■ 추천사 이 소설은 부모와 후견인 그리고 교사들에게, 실용주의와 성과주의에 매몰되어 있는 사회가 어떤 식으로 건강하고 재능 있는 한 젊은이를 파멸로 몰아넣는지를 환기시켜주는 지침서 같은 역할을 한다. 뿌리를 잘라버림으로써 채 자라지 못한 어린 줄기를 말라 죽게 만드는 사회 말이다. - 아르투어 엘뢰서 하나의 경향소설? 물론이다. 따뜻한 가슴의 언어로 길어 올린, 젊음을 갈망하는 청춘의 권리가 살아 숨 쉬고 있지 않은가. - 테오도어 호이스 내가 살아 있는 한 난 헤세의 편에 설 것이다. 관습적 어리석음이 빚어낸 끔찍한 결과를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이 작은 소설은 그 당시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 유효성을 인정받을 작품이다. 평화와 아름다움과 행복감을 늘 가슴속에 지니고 살아가는 한 존재의 진지한 언어는 삶의 공포적 상황과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한스 기벤라트에게 고통을 주는 자들을 보면서 나치의 앞잡이 노릇을 했던 나의 어리석은 스승들을 떠올렸다. 하지만 헤세의 이 작품을 통해 문학을 통한 연대감을 확인할 수도 있었다. 나는 기꺼이 헤세의 작품을 함량 미달의 교육자들이 아이들에게 저지르는 부당한 행위에 대해 조소와 증오로써 응징하고자 하는 타당한 보복 행위로 간주하고 싶다. - 가브리엘 보만 ■ 본문에서 한스는 기필코 남들보다 앞서고 싶었다. 왜 그래야 하는지는 자신도 알지 못했지만. 루치우스가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다고 하자 음악 선생님 하스는 머리털이 곤두섰다. 음악 수업을 하면서 루치우스의 음악적 재능이 형편없음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치우스가 노래를 부르면 학생들은 꽤나 즐거워했지만, 음악 선생은 절망하곤 했었다. “야, 하일너, 넌 대체 부끄러운 줄도 모르니?” “부끄러워? 너희들 앞에서?” 그는 경멸하듯 큰 소리로 말했다. “천만에, 이 친구야!” 하일너에게 우정은 즐거운 사치이자 위안 혹은 한낱 장난이었다. 하지만 한스에게 그것은 자랑스러운 보물이자 때로는 무거운 짐이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야윈 소년의 얼굴에 나타난 어찌할 줄 모르는 미소의 배후에, 불안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대며 살려 달라는 눈빛을 보내는 무너져 가는 한 영혼이 있음을 보지 못했다. 한스는 왜 하필이면 오늘 그날 일이 떠올랐는지, 왜 그 추억이 이처럼 아름답고 강렬하게 다가왔는지, 왜 그 추억이 자신을 이다지도 비참하고 슬프게 만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이 자신에게 작별을 고하기 위해, 행복의 고통을 남기기 위해, 추억의 옷을 입고 자기 앞에 나타났음을 깨닫지 못했다. 머릿속이 온통 어젯밤 에마와의 일로만 가득 차 있는 이때, 행복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건 적절치 않다는 것만 감지할 수 있었다.

헤르만 헤세 선집 01 데미안

<헤르만 헤세 선집 01 데미안> ■ 헤르만 헤세 선집을 펴내며 ‘거대한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우고 있었다. 그 알은 세계였고, 그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야 했다.’ 세상과의 경계에 서 있는 젊음의 불안과 방황을 통한 자아실현과 영적 탐구를 헤르만 헤세만큼 투명하고 생생하게 보여준 작가는 없었다. 질풍노도의 성장기에 겪었던 혼돈과 투쟁, 그리고 그것을 통해 완전한 자유에 이르는 과정을 기록한 헤세의 날카롭고 섬세한 글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젊은 영혼들을 위한 잠언집이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 자연과 정신, 육체와 영혼의 이분법을 지양하는 헤세의 문학세계는 삶의 총체적 긍정에 도달하는 장대한 순례이다. 비상하는 새처럼 삶에 대한 더 높은 지평을 우리에게 제공하는 헤세의 작품들이 나날이 험난해지는 이 세상을 이해하고 이겨내는 데 모든 이들의 더할 나위 없는 동반자가 되기를 바란다. - 현대문학 편집부 01. 데미안 <데미안>이 1919년 발표되었을 때 그 파장은 괴테의 <젊은 베르터의 고뇌>에 비견될 만큼 선풍적이었다. 1차 대전의 패배로 피폐해진 독일 젊은이들은 에밀 싱클레어의 이야기에서 ‘그들 또래의 선지자가 등장해 삶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드러냈다고 생각해 그 충격에 기꺼이 휩쓸렸고’ 평단에서는 토마스 만, 알프레트 되블린 같은 대가들의 극찬이 이어졌다. 성장기에 접어든 한 소년이 자신을 둘러싼 안락한 세계를 깨고 세상이라는 새로운 무대로 나서기 위해 새롭게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데미안>의 이야기는 모든 사람들의 성장 과정 속에서 겪는 성장통을 예리하고 섬세한 필치로 보여줌으로써 성인으로 입문하기 전에 누구나 한번쯤은 반드시 읽어야 할 책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데미안>은 헤세의 문학세계에서 <페터 카멘친트>, <수레바퀴 밑에> 같은 초기의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벗어나 소위 ‘내면화의 시기’를 여는 첫 작품이다. 헤세가 그 전에 발표했던 작품들과는 다른 태도로 <데미안>의 창작에 임했다는 것은 그가 소설의 주인공인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책을 냈다는 데서부터 엿볼 수 있다. 나중에 이 책이 신인 작가에게 수여하는 상인 ‘폰타네상’의 수상작으로 결정되자 헤세는 자신이 썼다는 것을 그제야 밝히고 상의 수상을 거부했다. 초기작들에서 일변한 그의 스타일에 세간은 또 한 번 놀라게 되었다. <데미안>은 <싯다르타>와 <황야의 늑대> 같은 내면화의 시기의 대표작들과 더불어 헤세의 작품들 중 전 세계적으로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읽히고 있고, ‘헤세 르네상스’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헤세가 초기의 낭만과 서정에서 나아가 좀 더 복합적이고 비의적이고 의미심장한 내면화의 시기로 접어든 큰 계기는 카를 융의 정신분석학이라 할 수 있다. 작품 속에서 데미안이 싱클레어에게 ‘밝음과 어둠, 선과 악’을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필요함을 역설하는 대목이나 남성성과 여성성, 감성과 이성, 육체와 영혼 같은 양극적인 요소가 상호 보완을 통해 궁극적인 조화로 나아가게 된다는 생각에는 헤세가 정신분석 치료를 받으면서 접한 융 사상의 영향이 짙게 드리워져 있다. <데미안>은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한 번은 읽게 되는 책이지만 몇 번을 읽게 되어도 독자의 상황에 따라 읽을 때마다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그만큼 텍스트가 내포하는 의미의 층이 다중적이고 다채롭기 때문이다. 한 어린 영혼의 고통과 방황,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투쟁이라는 단순하지만 누구나 다양한 방식으로 겪는 보편적인 이야기, 그리고 그 안에 들어 있는 수많은 화두와 잠언들은 <데미안>을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더 그윽한 고전의 향기를 뿜어내게 하는 요소들이라 할 수 있다. ■ 줄거리 라틴어학교에 다니는 착실한 기독교 집안 출신의 싱클레어는 술주정꾼의 아들인 크로머와 놀다가 공명심에 사로잡혀 사과를 훔친 적이 있다고 거짓말을 했다가 그의 마수에 사로잡히게 된다. 크로머는 싱클레어의 약점을 잡고 지속적으로 금품을 갈취하고 그의 요구에 응하기 위해 싱클레어는 거짓을 일삼으면서 점점 더 죄책감에 시달리게 된다.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진 싱클레어가 자살까지 고민하는 상황에서 신비스러운 소년 데미안이 나타난다. 어린 싱클레어가 말 못할 고민을 안고 있다는 것을 꿰뚫어본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크로머의 위협으로부터 구해주고 크로머의 위협으로부터 풀려난 싱클레어는 돌아온 탕아처럼 부모님께 그간의 악행과 거짓을 고백한다. 하지만 가정이라는 어린 시절의 낙원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은 부모의 ‘밝은 세계’로부터 데미안이 인도하는 ‘어두운 세계’로 이미 발걸음을 내디뎠음을 느낀다. 데미안은 종교 수업 시간에 나온 창세기의 카인과 아벨 이야기, 골고다의 십자가에 매달린 두 명의 강도 얘기에 대해 급진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선과 악, 밝은 세계와 어두운 세계를 구분하고 선과 밝은 세계만 공인하는 종교가 아니라 악과 어둠까지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종교의 탄생이 필요하다는 데미안의 이야기는 전통적이고 경건한 신앙 속에서 자란 싱클레어에게 커다란 충격을 안겨준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싱클레어는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보고 남몰래 사랑에 빠지고 어느 날 그녀의 그림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낸다. 데미안은 답장에서 ‘아브락사스’라는 새로운 신의 이름을 언급한다. 싱클레어는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를 만나 아브락사스에 관해 듣게 되고 이원론적인 기독교의 세계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진실을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자아실현과 진리의 길을 찾아 방황하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만나 그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만나면서 자신이 꿈에서 봤던 존재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에 놀람을 금치 못한다. 어느 날 싱클레어는 공원에서 베아트리체라는 소녀를 보고 남몰래 사랑에 빠져 숭배하기 시작한다. 그는 전격적으로 악의 세계에 등을 돌리고 성스러운 나라로 인도되어 경건한 사람으로 바뀐다. 싱클레어는 자아의 원형인 그녀의 모습을 그린 초상화를 바라보다가 그림 속의 인물이 데미안과 자신을 닮았음을 발견한다. 싱클레어는 새의 그림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내고, 그 후 자신의 책갈피 속에서 이런 답장을 발견한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한층 성숙된 싱클레어는 어느 날 구름 속에서 거대한 새의 형상을 보고 아브락사스를 현실에서 다시 체험한다. 종교와 신화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춘 피스토리우스가 싱클레어에게 아브락사스에 관해 설명해주면서 둘은 친구가 된다. 피스토리우스는 인식의 불꽃이 처음으로 희미하게 비칠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고 말한다. 그는 각자의 내부에는 인간이 될 가능성이 깃들어 있으나, 각자가 그 가능성을 예감하고 그것을 의식하는 법을 배움으로써 그 가능성이 자신의 것이 된다고 설명한다. 결국 싱클레어는 데미안과 피스토리우스를 통해 이원론적 기독교 세계관을 극복한다. 용기와 신념을 얻은 싱클레어는 자살 직전의 동료 학생 크나우어를 구해주고 그의 숭배를 받기도 한다. 이제 싱클레어는 점차 자신감을 지닌 청년이 되어 어떤 질문에 대해서도 자신의 내면으로부터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성장한다. 싱클레어는 피스토리우스와 헤어져 현관문을 나오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이마에 카인의 표지를 느끼고,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여 불굴의 정신으로 사는 것이 자신의 임무임을 인식한다. 자신의 길을 가는 싱클레어의 길은 태초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향해 가는 길이다. 에바 부인은 데미안의 육체적 어머니인 동시에, 싱클레어의 정신적 어머니가 된다. 에바 부인은 고통을 깨닫는 상태에서 더 높은 곳으로, 모든 대립이 지양된 행복한 상태로 싱클레어를 이끌어간다. 방학이 되자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살던 집을 찾아갔다가 데미안의 어머니 사진을 보는데, 사진 속의 부인은 싱클레어가 꿈속에서 그리워하던 여성이었다. 이제 싱클레어의 얼굴에는 카인의 표지가 더욱 뚜렷해진다. 데미안은 싱클레어를 에바 부인에게 데리고 간다. 실제로 모습을 드러낸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가 그리던 연인의 모습과도 비슷하고, 데미안을 닮기도 하며, 싱클레어 자신과 비슷하기도 하다. 에바 부인은 싱클레어를 만나는 순간 미소를 보내는데, 그녀의 눈길은 완성을, 그녀의 인사는 귀향을 뜻한다. 싱클레어는 항상 도중에 있었지만 이제 고향에 돌아온 느낌을 갖는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자 어머니인 에바 부인과의 만남은 싱클레어에게 최초의 성취감을 안겨준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싱클레어는 데미안으로부터 전쟁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고 데미안과 함께 전선으로 나간다. 이듬해 봄 싱클레어는 심한 부상을 입고 야전병원으로 후송되는데, 잠깐 의식이 돌아온 그는 옆 침대에 누워 있는 데미안을 발견한다. 데미안은 이제부터는 자기를 불러도 예전처럼 달려가 줄 수 없을 테니, 그럴 때는 자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며 그러면 자신이 싱클레어의 내면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거라고 한다. 다음날 아침 싱클레어가 깨어나 보니 데미안은 이미 병상에서 보이지 않는다. 싱클레어가 앞에 있는 거울로 자신의 모습을 보니 거기에는 데미안과 닮은 자신의 모습이 비춰진다. ■ 추천사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베일에 싸인 싱클레어의『데미안』이 불러일으켰던 열광적인 반향은 잊을 수 없다. 이 소설은 섬뜩하리만큼 정확하게 시대의 신경을 건드린 작품이다. 그 시대의 젊은이들은 그들 또래의 선지자가 등장해서 삶의 가장 은밀한 부분을 드러냈다고 생각했고 그 고마운 충격에 기꺼이 휩쓸렸다. - 토마스 만 헤세는 비할 데 없는 확실성을 가지고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린다. 그는 근원적 비도덕성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나는 그 속에서 ‘실재’를 보고 느끼게 되며, 초도덕적인 영혼의 움직임을 체험하게 된다. 아아! 하지만 그 실재를 직시하고 그 안으로 진입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데미안』은 언어와 몸짓에 있어서 모든 지적인 것을 거부한다. 또한 이 작품 안에서 펼쳐지는 ‘감각’의 세계는 얼마나 풍요로운가. - 알프레트 되블린 다른 어떤 독일소설과는 달리 이 책은 나를 나치 시대의 한가운데로 데려다 놓았다. 그 즉시 나는 에밀 싱클레어의 발전사를 나 자신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이 소설을 통해 나의 문제가 다루어지고 나의 고민거리가 해결되는 것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은 한 가지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세상의 권력자들을 믿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민은 거짓말쟁이라는 사실이다. - 호르스트 크뤼거 ■ 본문에서 “우리는 아무도 겁낼 필요가 없어. 사람들이 누군가를 두려워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자기를 지배할 힘이 있다고 인정해 주었기 때문이야. 예를 들면 네가 나쁜 짓을 한 적이 있고, 다른 사람이 그걸 알고 있다면, 그는 너를 지배할 힘을 갖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겠지?” 이제 내 이야기로 되돌아가 보자. 내 유년 시절의 종말을 알리는 예감과 꿈의 영상들은 너무나 많다. 그래서 하나하나 이야기 할 정도로 중요하지는 않다. 중요한 것은 ‘어두운 세계’, 그 ‘다른 세계’가 다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한때 프란츠 크로머였던 것이 이제는 나 자신의 일부가 되었다. “세계의 이 온전한 부분, 이 절반 전체가 은폐되고 묵살되어 버렸어. 사람들은 신을 모든 생명의 아버지라고 찬미하면서도, 생명의 근원이 되는 성생활은 그냥 묵살하고, 가능하면 악마의 소행이며 죄악이라고 선언하는 거야! 나는 이런 신인 여호화를 숭배하는 것에는 조금도 반대하지 않아. 하지만 내 생각에 우리는 인위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공식적인 이 절반의 세계뿐만 아니라 세계 전체, 다시 말해 모든 것을 숭배하고 신성시해야 해!”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싸운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파괴해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이다.’ “그러나 아브락사스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이름을 신적인 것과 악마적인 것을 결합시키는 상징적 과제를 지닌, 어떤 신의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희열과 전율, 남성과 여성이 뒤섞인 것, 가장 신성한 것과 가장 추한 것이 서로 뒤얽힌 상태, 더없이 사랑스러운 순진무구함에 의해 경련을 일으키는 깊은 죄악, 이것이 나의 사랑의 꿈속에 나타난 영상이었고, 그리고 아브락사스이기도 했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웠을까. “누군가를 살해하거나 어떤 엄청나게 추악한 짓을 저지르고 싶다면, 그렇게 당신의 내면에서 엉뚱한 상상을 하는 것은 바로 아브락사스라고 잠시 생각해 봐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의 모습에서 우리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는 무언가를 미워하는 거예요. 우리 자신의 내면에 들어 있지 않은 것에 우리는 흥분하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때 갑자기 나의 내면에서 하나의 깨달음이 맹렬한 불꽃처럼 타올랐다. 즉 누구에게나 하나의 직분은 있지만 누구에게도 스스로 선택하고 정의하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직분은 없다는 것이었다. 새로운 신을 원하는 것은 잘못이었고, 이 세상에 무언가를 제공하겠다는 것은 완전한 잘못이었다! 깨달은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찾고, 내면을 굳게 다지며, 어디로 가개의치 않고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가는 것 이외에는 어떤 의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의 정신과 이 시대의 특징에 대해 이야기했다. 어디서나 동맹과 집단의 형성이 유행하고 잇지만, 자유와 사랑은 어디에도 없다고 그는 말했다. 대학생 동아리와 합창단에서 국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체는 강제적인 결속이며, 불안과 공포, 당황에서 비롯된 공동체인데, 그 내부가 썩고 낡아서 붕괴 직전이라고 했다. “전 그 당시 때때로 자살해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어요. 인생길은 누구에게나 그렇게 힘든 것인가요?” 부인은 내 머리를 손으로 바람처럼 가볍게 쓰다듬어 주었다. “태어난다는 것은 늘 힘든 일이지요. 알다시피 새는 알을 깨고 나오려고 애쓰지요. 기억을 돌이켜 한번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이 그렇게 힘들었던가? 단지 힘들기만 했던가? 또한 그 길이 아름답지는 않았던가? 혹시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고 있었던가?” “나는 구세계의 붕괴가 임박했다는 것을 느끼고 있어. 처음에는 아주 미약학 희미한 예감이었지만, 점점 분명해지고 강렬해졌어.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은 나 자신과도 관련된 크고 무서운 무언가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뿐이야. 싱클레어, 우리 우리가 가끔 이야기했던 것을 체험하게 될 거야! 세계는 스스로를 쇄신하려 하고 있어. 죽음의 냄새가 나고 있어. 새로운 것이 오려면 죽음이 따르기 마련이지. 그것은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끔찍한 일이야."

Steppenwolf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367)

<황야의 이리> 영문판. 1927년에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장편소설. 인생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대립과 맞서 방황하며, 불안과 불만 속에서 자아를 고통스럽게 추구해가는 고독하고 불완전한 인간상(人間像)을 그리고 있다. 50세가 되어 인생의 전환기(轉換期)를 맞은 작가가, 주인공인 50세의 ‘하리 할러 (Harry Haller)’의 모습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시켜 그 내면을 철저히 분석한 자기 고백서(告白書)이다.

Journey to the East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329)

<동방여행> 영문판. 1932년에 출간된 헤르만 헤세의 중편소설. 여행 중에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던 충직한 심부름꾼 ‘레오(Leo)'가 사라진다. 일행은 혼돈에 빠지고 급기야 여행이 중단되는 지경에 이르는데…

Siddhartha (영어로 읽는 세계문학 11)

<싯다르타> 영문판. 1922년에 발표된 장편소설. 헤르만 헤세가 초기의 몽상적 경향을 탈피하고 소설의 무대를 동양으로 옮겨 내면의 길을 탐색한 작품이다. 싯다르타는 산스크리트로 목적을 달성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이름으로서, 원래는 석가의 어릴 때의 이름이다. 헤르만 헤세는 싯다르타라는 인물이 내면의 자아를 완성해 가는 과정을 이야기하면서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언급하는 등 동양의 초월주의를 강조하며 동서양의 세계가 조화된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청춘은 아름다워

<청춘은 아름다워> 헤세는 전형적인 현대 작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그의 글은 투명하고 꾸밈이 없다. 해학적이기보다는 반어적이고, 요란하기보다는 고요하고, 밖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안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의 단순함은 겉으로 보이는 것일 뿐이다. 카프카가 그렇듯이. _워싱턴 선데이 스타 20세기 최고의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 국내 미발표작 포함, 최고의 단편만을 엄선한 정수! 『청춘은 아름다워』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작가 헤르만 헤세의 단편소설집으로, 1900년에서 1954년까지 그가 쓴 백여 편을 웃도는 단편소설 중 오랫동안 사랑받아온 작품은 물론,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거나 국내에 처음 선보이는 작품까지 총 열한 편을 엄선해 묶었다. 헤르만 헤세의 단편 창작기간은 1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1900년에서 1914년에 집중되어 있으며, 전체 단편소설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이 시기에 쓰였다. 이후에는 단편의 형태가 아닌 좀더 서사적인 장르를 통해 갈등과 저항을 표현하게 되었지만, 헤세는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자아 성찰의 시각을 갈고닦으며 자유롭게 글을 써나갔고, 그의 첫 반생애 동안 쓰인 단편들은 훗날 영혼의 자서전이라 불리며 전 세계 젊은 독자들이 탐독하는 필독서가 된 『데미안』『수레바퀴 아래서』『황야의 이리』 같은 책의 단단한 초석이 되어주었다. 이 소설집은 헤세의 초기부터 후기까지 시기를 폭넓게 아우르며 대표작뿐만 아니라 새롭게 선보이는 작품을 한 권의 책에 담는다는 의도에 따라 수록작을 선정했다. 『황야의 이리』에서 다룬 주제를 선취한 것으로 평가받는 초기작 「늑대」, 바젤에서 보낸 헤세의 어린 시절이 투영되어 있는 「어린 시절에」, 떠돌이 장인의 삶을 통해 19세기 독일 사회의 단면을 자세히 엿볼 수 있는 「한스 디를람의 수습 시절」, 널리 알려진 대표 단편소설로 독자들의 사랑을 받아온 「청춘은 아름다워」와 「나비」, 동화풍의 희비극적 연애소설 「약혼」, 성직자의 의무를 다하면서도 세속인들의 자유를 갈망하는 한 신부의 은밀한 이중생활에 대한 이야기인 「마티아스 신부」, 인도로 떠난 영국 선교사의 눈을 통해 유럽 제국주의와 기독교의 모순적인 양면을 신랄하게 비판한 「로버트 애기언」, 고향에서 보낸 수습생 시절의 경험이 담겨 있는 「회오리바람」, 헤세가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이 년 후에 쓴 작품으로 영민한 한 소년과 아버지의 갈등을 탁월하게 묘사한 「어린아이의 영혼」, 서양의 카니발과 동양의 무위사상이 어우러져 몽환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후기작 「꼬마 굴뚝 청소부」가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의 면면으로, 대가로서의 헤세뿐만 아니라 인간 헤세의 면모와 그 저변을 고루 담고 있으며, 이중 「늑대」 「한스 디를람의 수습 시절」 「꼬마 굴뚝 청소부」는 국내에 처음으로 번역, 소개되는 작품이다. 일찍이 오로지 시인이 되리라 결심했던 헤세는 평생 시인의 열정을 간직한 작가이자 꽃과 나비와 자연을 사랑했던 방랑자이기도 했다. 그런 그는 수평선을 물들이는 색깔, 집안이나 숲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 희미한 향기 같은 것까지 놓치지 않고 예민하게 포착해 풍요로운 묘사로 풀어내며, 요란하지도 조급하지도 않은 조화로운 언어와 그만의 매력이 깃든 안단테의 리듬과 잔잔한 울림으로 우리 앞에 아련한 유년의 풍경과 경이로운 청춘의 기억을 그려 보인다. 영혼이 겪는 요동치는 봄과 뜨거운 여름을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이런 평온함은 10월의 끝에 맛보게 되는 고급 포도주처럼 익어간다. 문학에도 실내악이 있다면 단연코 헤세가 최고의 대변자이리라. _로맹 롤랑 자전적 경향이 짙은 소설들 가상의 고향에서 펼쳐지는 ‘게르베르사우 이야기’ 어느 작품이든 작품을 쓴 작가와 그 삶을 반영하고 있겠지만 헤르만 헤세는 그야말로 “자신의 삶에서 작품을 조형해낸”(테오도어 호이스) 작가였다. 그만큼 그의 삶과 작품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으며 여러 작품 곳곳에서 자전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한 해의 시작을 알리는 이른 봄, 대지의 모든 생명이 태동하는 기적의 순간과 맞닥뜨린 주인공이 매년 봄이면 떠오르는 추억을 들려주는 「어린 시절에」 역시 예외는 아니다. 한밤중에 잠이 깬 소년은 침실에서 부모님이 나누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몸이 아파서 봄이 올 때까지 버틸지 모르겠다는 대화 속 아이 브로지는 한때 친하게 어울렸던 친구였다. 그 시절 브로지와 함께했던 일들을 하나둘 새겨보던 소년은 다음날 어머니의 권유로 병문안을 간다. 헤세의 아름다운 언어로 펼쳐지는 이른 봄의 신비로움, 자연과의 내밀한 연대감, 그윽한 향기를 품고 있는 유년기와 죽음이 대비를 이루며 독자들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품은 바젤에서 보낸 헤세의 어린 시절을 바탕으로 쓰인 것으로 실제에 가까운 어머니나 남동생에 대한 서술을 자전적 요소로 들 수 있다. 「한스 디를람의 수습 시절」과 「회오리바람」에는 헤세가 시계공장과 서점에서 수습생으로 일한 경험이 투영되어 있다. 쫓겨나다시피 학교를 나와 기계작업장의 수련공으로 들어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사랑에도 눈뜨지만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한스 디를람의 이야기는 기계공, 기술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헤세가 쓴 여러 작품 중 가장 극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기벤라트와 이름이 똑같은 한스는 어쩌면 헤세 자신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회오리바람」에서 고향의 작은 공장에서 실습생으로 일하고 있지만 직업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고 “새로운 만족을 찾을 수 있는 세계”로 떠나고 싶어하는 열여덟 살의 주인공 ‘나’도 그러하다. 대기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돌다 마침내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고, 잠시 몸을 피했다가 나온 내 앞에는 처참히 파괴되어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풍경이 펼쳐진다. 정겨운 추억을 간직한 장소는 이제 폐허가 되어버렸고, 회오리바람은 고향과 유년 시절에 작별을 고하는 계기가 된다. 한편 자전적인 경향의 단편들은 대개 가상의 도시 ‘게르베르사우’를 배경으로 한다. 독일어로 ‘무두장이의 섬Die Aue der Gerber’로 풀어쓸 수 있는 이곳의 실제 모델은 직물과 가죽으로 유명했던 독일 남부의 도시 칼프다. 게르베르사우는 헤세가 태어나 유년기와 청년기 일부를 보낸 칼프를 투영하고 있는 문학적 지명으로, 이 책에 수록된 「한스 디를람의 수습 시절」 「청춘은 아름다워」 「약혼」 같은 작품들이 이 ‘게르베르사우 이야기’에 속한다. 수년간 객지에 머물던 ‘나’가 의젓한 어른이 되어 고향을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해 일을 하러 새로운 곳으로 떠나는 것으로 끝나며 그가 고향에 머문 여름 한철의 이야기가 담긴 표제작 「청춘은 아름다워」는 헤세가 초기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으로 꼽기도 했던 작품이다. 1946년 헤세는 누이인 아델레(이 작품에서 ‘로테’로 등장한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쓰고 있다. “「청춘은 아름다워」는 내게, 그리고 아마 너에게도 전쟁과 위기가 닥치기 전에 내가 쓴 초기 단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작품일 거야. 왜냐하면 우리의 청춘, 우리 부모님의 집, 당시의 우리 고향을 충실하게 담아 묘사하고 있으니까.” 방랑하던 한 젊은이를 소박하고 목가적인 고향의 정경과 어린 시절 추억이 깃든 집, 인자하고 온화한 식구들이 따뜻하게 맞이해주고, 그가 삶의 즐거움으로 가득한 몇 주를 보낸 뒤 유년기에 영원히 이별을 고하는 과정이 특유의 나직한 어조와 풍성한 묘사로 그려지는 이 작품은 실제로 헤세의 단편소설 중 가장 널리 알려져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다. 한편 직물 가게 주인 안드레아스 온겔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약혼」은 다름아닌 몇십 년 전 ‘게르베르사우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던 이야기를 전한다. 온겔트의 수줍음과 소심함은 자라서 수습 기간을 거치고 고모가 운영하는 직물 가게에서 일하게 된 지금까지도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런 그가 짝을 만나기까지의 우여곡절이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애처롭게 펼쳐진다. 이처럼 헤세의 수많은 작품을 탄생시킨 공간인 게르베르사우, 즉 칼프는 그에게 “망가뜨리고 싶지 않은, 세계의 첫 질서가 세워진 성전” 같은 곳이었다. 이곳에서 헤세는 열두 살의 나이에 이미 시인이 아니면 그 무엇도 되지 않겠다고 결심했고 시인은 배워서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할 뿐이라는 본질을 직관으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고향에서 시인으로 존재한다는 것의 무게는 버거웠다. 「청춘은 아름다워」나 「회오리바람」에서 드러나듯, 시민생활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는 가족과 고향 사람들의 따가운 눈총을 감당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리하여 헤세는 1895년 열여덟 살의 나이에 고향을 떠난 후로 그곳에서 일상의 터전을 만들어 살고 싶어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곳으로부터 영원히 등을 돌리는 대신, 가상의 고향을 찾아 유년과 청춘의 성장통을 되풀이했다. 시인의 운명을 타고난 소년이 놀란 눈으로 세계의 부조리를 보아버린 곳, 존재의 이유를 터득한 곳이기에 애틋하고 모순으로 가득하기도 했던 곳, 유년기와 칼프는 방랑객 헤세가 길 끝에서 자주 돌아갔던 시간과 공간이었다. 게르베르사우 이야기들에는 그 시공간이 오롯이 녹아들어 있다. 삶과 자연을 관조하는 시선, 꿈과 동경의 언어 뒤에 위대한 지혜와 통찰력을 숨긴 이야기들 헤세 단편의 정수를 담은 만큼, 이 책에는 인생에서 다시없을 비범한 시기, 한 인간이 성숙하기 위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하는 유년과 청춘에 대한 통찰력, 무상하고 덧없는 존재의 상징으로서의 꽃과 나비에 대한 무한한 사랑, 문명과 기독교 정신의 모순에 대한 비판, 아버지와 아들의 권력과 갈등의 문제 등,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만나볼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단편인 「꼬마 굴뚝 청소부」에서는 예술가라는 존재에 대한 압축적인 자기 성찰을 엿볼 수 있다. 화가인 나는 아내와 함께 사육제가 벌어지는 광장을 찾게 된다. 가장 행렬과 수많은 인파, 화려하고 들뜬 축제 분위기 한가운데서 나는 굴뚝 청소부의 가장의상을 입은 한 소년을 보게 되고, 넋을 잃은 채 행복한 경탄의 눈으로 한곳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소년에게 매혹된다. 그리고 나의 시선과 마음도 오로지 소년과 아름다움을 느낄 줄 아는 감수성, 소년도 미처 의식하지 못한 행복을 향하게 된다. 짤막한 이 단편에서 헤세는 축제의 한복판에서도 아무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는 관객이나 청중과는 달리, “힘이 닿는 한, 눈이 풍경과 스케치북 사이를 분주히 오가는 수고를 견딜 수 있는 한, 뇌 속의 기록부에 공간과 확장력이 남아 있는 한” 긴장한 채 작업하는 존재가 예술가임을, 그것이 예술가가 축제를 향유하는 방식임을 역설한다. 축제의 현장 한가운데서 그 모든 것을 관조하는 나의 시선은 바로 헤르만 헤세의 그것이라 할 수 있을 터이다. 그 섬세한 시선을 통해 포착한 것들을 우아하고 품격 높은 문체로 표현해냄으로써, 헤르만 헤세는 가장 널리 읽히는 20세기 최고의 독일 작가가 되었다. 헤르만 헤세와 그의 단편소설에 쏟아진 찬사 헤세는 내가 예술에서 최고로 꼽는 모든 특징을 갖추었다. 우아한 멋과 심오함, 예술적인 규칙과 창조적인 힘의 불가사의하고도 멋진 결합! _앙드레 지드 그의 책들은 한결같이 조화로우며, 순금의 언어는 요란하지도 조급하지도 않고 격앙되는 법이 없다. 영혼이 겪는 요동치는 봄과 뜨거운 여름을 다루고 있음에도 작품은 평온하기 그지없다. 이런 평온함은 10월의 끝에 맛보게 되는 고급 포도주처럼 익어간다. 문학에도 실내악이 있다면, 단연코 헤세가 최고의 대변자이리라. _로맹 롤랑 헤세 산문의 간결하고 잔잔한 울림은 음악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만의 고유한 매력이 깃든 안단테로. _막스 리히너 헤세는 유년이라는 비범한 시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은 연습이자 수련이다. 죽어버린 관계를 버리고 자신을 변화시키기 위한. _카린 슈트루크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상)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상)> <지와 사랑>으로 알려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참다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헤세의 오랜 질문을 진지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그 질문을 중심으로 중세의 지성들의 모이는 수도원에서 최고의 지성과 열정, 순수한 영혼을 갈구하는 젊은이들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보여주고 있다. 작가는 두 개의 가치에 바탕을 둔 세계를 표현하기 위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라는 인물을 설정하고 그들이 쌓은 평생의 우정을 두 세계의 공집합으로 설정한다. 이 두 인물의 대비되는 가치관을 보여주어 세계를 대하는 두 가지 모습을 자연스럽게 제시한다. 그것은 대립이 아니라 화합을 위한 끊임없는 교감과 포용과 이해였다. 그리고 사랑이었다. 즉 그는 이 소설에서 지성과 감성의 결속, 현실과 이상의 융합이라는 관심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상징하는 학자의 이성과 예술가의 감성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둘도 없이 조화롭게 공존한다. 이때 헤세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의 궁극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우리 인생을 바라보는 방식으로써 '이성과 감성의 조화'라는 어려운 경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훌륭한 사례다. 이러한 이원론적 세계의 탐구는 유럽과 비유럽, 기독교와 비기독교, 예술과 지성 등 거대한 세계의 조화를 이루는 방법을 찾고는 기어이 세계와 화해하는 구도와 관련이 있다.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그러한 주제의식을 유럽 중세라는 기독교의 패러다임 속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두 인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상징화하고 있다. 하나의 진리가 이미 정답처럼 제시된 시절에도 이 인물들은 풍요로운 성찰을 해낸다. 또한 이 작품의 골드문트는 헤세 자신을 많이 닮아있다. 즉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예술가로서 헤세 자신이 어떠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자기 자신에게 던진 작품이기도 하다. 문학가는 예술가인 동시에 지식인이기라는 특수한 정체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문학가 헤세에게도 이 문제는 중요한 문제였을 것이다. 그리고 소설에서는 지식과 예술성이라는 두 가지의 요소가 충돌하면서 조화롭게 공존한다. 어쩌면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문학가 헤세의 두 심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신의 두 영혼은 늘 대화하고 긴장하며 때로는 화해한다. 그러한 모습을 <나르치스와 골드문트>에서는 인물화하여 ‘과연 문학가는 어떠해야 하며, 예술가는 어떻게 세계를 바라볼 것인지’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정리한 것으로 보인다. 처음에는 뚜렷한 교집합을 보이지 않은 채 우정으로 교감하던 두 인물은 서서히 깊이 이해하고 교집합을 이루면서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나르치스는 골드문트에게 영향을 받고,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에게 영향을 받으면서 둘은 뒤섞이게 된다. 결국 작품의 마지막에 이르러, 두 인물 모두 자기 탐구를 거쳐 삶의 근원적 힘을 깨닫게 되고 관조의 세계를 독자에게 보여줌으로써 자연과 인간을 순수하게 사랑하고 삶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이것은 헤세가 지식인이면서 예술가인 문학가의 참 자세로 제시한 하나의 사례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는 영혼과 육체, 이성과 감성, 지식과 예술이라는 두 요소의 대립과 화해 그리고 우정을 아름답게 풀어낸 이야기다. 그 긴장과 균형 사이로 흐르는 감미로운 선율로 가득 찬 작품이다. 헤세만의 품격 있고 유려한 이야기를 통해 조화로운 인간의 모습을 만나 보자.

크눌프 그 삶의 세이야기

<크눌프 그 삶의 세이야기> 헤르만 헤세의 <크눌프, 그 삶의 세 이야기>. 초봄, 크눌프에 대한 회상, 종말의 세 편으로 이루어질 작품으로서, 제1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에 간행되었다. 각각의 작품이 따로따로 발표된 적이 있을 정도로 한 편 한 편이 완결된 구조를 이루고 있는, 독특한 구성을 지닌 작품.

싯달타

<싯달타> 심한 노이로제 중세에 대한 시달려 온 헤세는 정신과 치료를 받는 것을 계기로 정신분석학과 친해지고 그의 작품은 내면 세계를 추구하게된다. 이때 집필된 싯다르타는 동서의 세계관, 종교관을 자기체험속에 융화시킨 작품이다.

젊은날의 초상

<젊은날의 초상> 방황하는 젊은이들에게 삶에 대한 본질적 문제를 일깨우는 헤르만 헤세의 자전적 에세이집. 헤세의 작품마다 흐르는 젊음의 고뇌와 슬픔이 작가 자신의 정신적 체험에서 비롯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은 공장 견습생, 서점 직원 등으로 일하던 시절 그가 괴테 문학과 운명적으로 만나 <유리알 유희>로 노벨문학상을 수여하기까지, 치열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겪은 정신적 체험을 그려내고 있다.

수레바퀴 밑에서

<수레바퀴 밑에서> 이 전자책은 헤르만 헤세(Hermann Hesse)의 걸작 <주홍글씨>의 탄생 배경과 작가에 얽힌 에피소드, 작품의 줄거리, 문학사적 의미와 평가, 국내에 출간된 도서정보 등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한 ‘세계명작다이제스트 시리즈’ 중 첫 번째 Sheet eBook이다. 이 Sheet e-Book의 목적은 ‘책 읽게 하는 책’으로써, 독자들에게 원작 전체를 읽도록 동기를 촉발하는데 있다.

싯타르타(영어로 읽는 세계 고전명작)

<싯타르타(영어로 읽는 세계 고전명작)> 《싯다르타》(독일어: Siddhartha)는 동양 사상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던 헤르만 헤세가 1922년 발표한 종교소설이다. 인디아의 카스트제도에서 제1계급에 속하는 성직자 계급의 아들 싯다르타가 불교를 창시한 석가모니를 만나기 위해서 출가한 후 다양한 인생 경험을 거쳐 깨달음을 얻는다는 내용이다. 서양인의 눈에 생소할 수 있는 불교가 어떻게 해석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헤르만 헤세 환상동화집

<헤르만 헤세 환상동화집> 이 작품집에서 헤세는 그동안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과 같은 작품에서 다루었던 청춘의 고뇌와 성장과는 다른 내면을 향한 또 하나의 문학적인 시도를 선보이고 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보존’하는 것에서 내면세계를 탐구한 헤세는 어린 시절의 ‘마법적인 요소’들과 만나게 해 주면서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고, 인간이 나아길 길에 대해 의미 있는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20분 고전읽기 20권 싯다르타

<20분 고전읽기 20권 싯다르타> 바쁜 현대인을 위한 스마트한 고전 읽기 <20분 고전읽기> 시리즈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직장인, 청소년들을 위해 고전문학의 핵심가치와 스토리, 철학은 살리되, 중요도가 낮은 서술적 은유적 표현은 최대한 배제해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개념 고전읽기를 제시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이동시간을 고려해 20분에 독파할 수 있는 분량으로 압축요약했다. 세상과 부딪치며 처절하게 자아를 구하고자 했던 구도자의 삶 인생의 참 의미는 무엇이며, 그 안에는 무엇이 있는가? 바라문의 훌륭한 아들 싯다르타는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자 모든 이들에게 사랑받는 존재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은 항상 뭔가 채워지지 않은 듯 불안하고 초조했다. 어느 날 싯다르타는 고행자들을 따라 아버지의 곁을 떠난다. 친구 고빈다도 그의 뒤를 따른다. 싯다르타는 고행자들과 함께 생활하며 온전히 모든 것을 비우고 마음의 평온을 얻고자 고행을 자처한다. 하지만 굶주림과 고통에서 벗어나는 수행들이 결국 인생의 고통과 무의미함을 잠시 마비시키는 것이며, 자아로부터 도망치는 행위임을 깨달은 후 고행자들 무리를 떠난다. 그러던 중 부처라 불리는 고타마를 만나지만 싯다르타는 지혜는 스승에게 배울 수 없는 것임을 깨닫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찾기 위해 사람들로 북적이는 대도시로 들어간다. 친구 고빈다는 고타마의 제자가 되어 둘은 헤어진다. 대도시에서 아름다운 유녀 카말라를 만난 싯다르타는 육체적인 정을 나누는 법을 배우고, 그녀가 소개해준 돈 많은 상인으로부터 돈 버는 법을 배운다. 세월이 흘러 싯다르타는 부자가 된다. 하지만 세속적인 삶 속에서 죽어가는 자신을 발견한 후, 그는 참된 기쁨에 대해 깊이 성찰하며 결국 모든 소유물을 버린 채 거리를 떠난다. 그는 이제 강나루 뱃사공이 되어 강이 들려주는 수천 가지 소리를 들으며 진리를 깨닫는다. 하지만 카말라가 그 강가 근처에서 독사에게 물려 죽음을 맞이하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아들을 키우면서 그의 평온했던 영혼은 다시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데……. 끊임없이 세상과 부딪치며 처절하게 자아를 구하고자 했던 구도자의 삶을 통해 인생의 참 의미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된다.

20분 고전읽기 9권 데미안

<20분 고전읽기 9권 데미안> 바쁜 현대인을 위한 스마트한 고전 읽기 <20분 고전읽기> 시리즈는… 시간적 여유가 없는 직장인, 청소년들을 위해 고전문학의 핵심가치와 스토리, 철학은 살리되, 중요도가 낮은 서술적 은유적 표현은 최대한 배제해 ‘쉽게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신개념 고전읽기를 제시한다. 지하철이나 버스 등의 이동시간을 고려해 20분에 독파할 수 있는 분량으로 압축요약했다. 알을 깨고 나오려면 누구나 아프고 힘들다 방황하는 십대들에게 추천하는 세계 최고의 성장소설 주인공 싱클레어는 정신적 낮과 밤 사이에서 갈등하는, 금지된 세계의 유혹에서 방황하는 십대 소년이다. 부유하고 경건한 집안에서 순탄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런 생활이 권태롭고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하루는 평판이 나쁜 프란츠 크로머라는 아이에게 물방앗간 과수원에서 사과를 훔쳤다는 거짓말을 하게 되고, 크로머는 그 사실을 고발하면 2마르크를 받을 수 있다며 협박한다. 그 일을 계기로 싱클레어는 완전히 어둠의 운명 속으로 빠져들고, 크로머의 노예가 된다. 이런 상황에서 데미안이라는 상급생이 싱클레어의 학교로 전학을 온다. 그에겐 어린애 같지 않은 엄숙함이, 시간을 초월한 신비함이 있었다. 데미안은 ‘카인과 아벨’ 이야기를 재해석했고 쾌락과 공포, 선와 악을 동시에 가진 새로운 신, 아브락사스에 대해 이야기한다. 타락과 냉소, 반항으로 세상과 부딪치지만 내면은 한없이 외롭고 나약한 싱클레어. 결국 데미안과 그의 어머니인 에바 부인을 통해 사랑과 진리에 눈뜨고, 자신에게 다다르는 법을 깨닫게 된다. 오랜 성장통이 끝났을 때, 싱클레어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 없는, 온전한 자아를 만나게 된다.

지성과 사랑

<지성과 사랑> 명석한 정신을 갖고 엄격한 고행을 통해서 사고의 영역에 봉사하는 나르찌스와 언제나 어머니의 모습을 가슴에 품고 형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관능아 골드문트라는 정신적 욕구의 양극을 대표하는 두 인간상을 조형하여, 작가 자신의 분열적 성격과 갈등, 즉 감상세계에 몸을 맡기려는 욕구와 그 욕구를 제어하고 방해하려는 의지·지성과의 항쟁을 적나라하게 그려낸 헤세문학의 정수!

황야의 늑대

<황야의 늑대> 원서명 : Der Steppenwolf 현대 '독일의 양심'을 대표한 작가로 알려진 헤세가 그 양심에 비춰진 오십대의 자신의 본성을 깊이 파 헤쳐 낸 작품이 바로 이 <황야의 늑대>이다. 삶의 의지를 잃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내적 고뇌를 '황야의 늑대'란 별명을 가진 인간을 통하여 자극적인 수법으로 묘파해 낸 이 작품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현대의 파우스트라고 일컬을 수 있으리라.

데미안 : 전혜린 번역

<데미안 : 전혜린 번역> 비운의 천재 전혜린의 번역으로 만나는 고전 『데미안』 독일 문학의 거장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헤르만 헤세가 쓴 청년의 고전 『데미안』. 불안과 좌절에 사로잡힌 청춘의 내면을 다루어 지금까지 수많은 청년세대의 마음을 흔들었던 걸작이다. 이번 책은 1965년 31세로 요절한 천재 독문학자 전혜린의 열정적인 번역으로 선보인다. 1960년대의 번역이지만 전혜린 특유의 깊이와 문학적 감성이 돋보인다. 또한 전혜린이 생전에 《문학춘추》에 발표했던 작품해설을 함께 수록하여 작품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과 문학적 깊이를 보여준다. ‘성장에 대한 가장 대담한 소설’로 꼽히는 이 작품에는 헤세 자신의 격렬한 청년기가 반영되어 있다. 작가의 필명이기도 한 ‘에밀 싱클레어’는 낮과 밤, 의식과 무의식, 아폴로와 디오니소스, 지성과 관능, 각성과 도취 등 두 가지의 대립적인 세계 속에서 방황한다. 그런 그의 앞에 두 세계 중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고 다만 자기 자신에게 속해 있는 데미안이 나타난다. 헤세는 두 소년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잃어버린 인간의 고뇌, 고독하게 모색하고 지치도록 갈망하는 청춘의 고뇌를 그려냈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사랑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순수한 첫사랑부터 노련미가 넘치는 카사노바의 사랑까지, 느닷없이 찾아온 사랑에서 오래 묵은 사랑까지, 이루어질 듯 말 듯한 사랑에서 사랑의 거부까지. 헤세의 이 모음집은 헤세의 전 작품과 편지글을 아우르며 이처럼 다양한 사랑의 양상을 짚고 있다. <얼음 위에서>처럼 그 사랑은 불현듯 찾아와서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거나, <아이리스>에서처럼 평생을 찾아 헤매야 비로소 얻게 되기도 하고, <픽토어의 변신>에서처럼 변하고 변하고 또 변한 후에 알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 탓에 독자는 아련하게 잊혀졌던 사랑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기도 하고, 현재진행형인 사랑의 모습을 만나기도 하며,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사랑– 그것이 미래의 사랑이든, 도저히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사랑이든 –을 만나게 된다. 그리하여 누구든 자신의 사랑경험에 비추어 ‘사랑에 관하여’에 나름의 형용어를 더할 수도 있을 것이다. ‘덧없는 사랑에 관하여’라든지, ‘미칠 것 같은 사랑에 관하여’라든지, ‘사랑, 그 영원한 미완의 경험에 관하여’라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사랑의 얼굴이 여럿인 것처럼 사랑과 반대편에 서 있는 감정들도 다양하다. 넓게 보자면 헤세의 사랑론은, 사랑과 같은 편에 서 있는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에 대한 성찰로도 채워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사랑과 같은 편엔 ‘상상력’과 ‘감정이입 능력’이 있고, 그 반대편엔 ‘악’과 ‘불신’이 있으며, 상대방에 대한 ‘판단’과 ‘폭력’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부드러운 것은 단단한 것보다 강하다. 물은 바위보다 강하다. 사랑은 폭력보다 강하다.” 혹은 “상상력과 감정이입 능력은 사랑의 형태 이외의 다른 무엇도 아닙니다.” 반면 사랑을 잃는다는 것은 ‘악’이며 ‘불신’이자 결국 전쟁에까지 이르게 하는 무엇이다. “악은 언제나 사랑이 충분치 않은 곳에서 생겨나는 것입니다.” 어둠을 밝히기 위해 혹은 빛이 사그라들지 않도록 하기 위해 에너지가 필요하듯이, 사랑을 하기 위해서도 에너지가 필요하고, 그 에너지가 줄어들기 시작할 때면 그 즉시 우리의 마음엔 어둠이 내려앉는 것이다. 따라서 헤세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완성되지 않은 세상, 도저히 완성될 것 같지 않은 세상에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직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 것뿐이다. 그는 그 외에 필연적으로 도달해야할 어떤 최종 결론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말한다. 그 이유는 어떤 결론을 단정지어 말한다는 것이, 설령 그것이 이 땅의 불의와 악의를 치유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으로 집단행동과 반대운동을 거쳐 전쟁과 폭력으로 이어지는 것을 헤세 자신이 직접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헤세는 자신의 독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보낸다. “약한 사람이나 쓸모없는 사람을 가리지 않고 인간을 사랑”하되 “그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다음과 같은 그의 절실한 외침을 기억해야 한다. “원하라! 희망하라! 사랑하라! 그러면 대지는 다시 너희 것이 되리라.”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것을 축하하는 방송에서 그가 외친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사랑이 없는 한 대지는 우리의 것이 아니다. 결국 그가 거듭해서 사랑에 대해 말하는 것은, 대지가 여전히 혹은 아직 우리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전쟁과 같은 일상 속에서 사랑하는 힘을 잃고 황폐화된 대지 위에서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 것이다. 이를 반추하고 사랑을 위한 에너지를 축적해 서로 나누는 것만이 우리의 누추함과 염치없음을 극복하는 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사람들이 그를 잊는다면 돌과 샘, 꽃과 새 들이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것이다 ━ 가톨릭교회의 성인이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창립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헤르만 헤세는 10여 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의 삶에 깊이 몰두했다. 그리고 첫 소설을 발표하던 해에 그 결과물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내놓았다. 한 인간의 뜨거운 정신이 르네상스 시대를 열었다 그의 이름은 프란치스코이다 ━ 헤르만 헤세가 10여 년간 탐구한 성 프란치스코의 삶 가톨릭교회에 대한 이해가 깊지 않은 사람들도 ‘빈자의 성인’으로 유명한 성 프란치스코의 이름은 들어 알고 있다. 2013년 새 교황으로 부임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대한 관심과 사랑이 뜨겁다. 그가 실천하는 ‘겸손’과 ‘변화’가 깊이 와 닿는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 정신의 뿌리인 성 프란치스코의 삶에 대해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헤르만 헤세가 1904년에 발표한 전기 소설이다. 헤세의 첫 소설이자 헤세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 『페터 카멘친트』가 발표된 것이 1904년이니 초기작에 해당한다. 그러나 헤세는 첫 소설을 쓰기 전 10여 년에 걸쳐 성 프란치스코의 삶을 깊이 탐구했다. 그 결과물로 내놓은 이 책은 짧은 분량임에도 성 프란치스코에 대한 헤세의 깊은 이해가 담겨 있다. 열림원은 <헤르만 헤세 컬렉션>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로 시작하기로 했다. 헤세의 문학세계를 ‘구도’의 여정으로 보고, 이 작품을 ‘헤세적 인간’의 탄생을 알리는 귀중한 작품으로 보았다. 헤세가 새롭게 쓴 ‘성 프란치스코의 삶’과 직접 뽑은 ‘성인담’ 6편으로 이루어진 본문 외에도, 르네상스의 대화가 조토의 프레스코 연작 “프란치스코 성인담” 28점, 프란치스코의 유년 시절을 아름답게 그린 단편 소설을 수록하여 깊이를 더했다. ‘성자’ 프란치스코 이전의 ‘인간’ 프란치스코 이 책은 헤르만 헤세가 1904년에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보다도 유명하고 위대한 인물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너무나 익숙해진 탓에 갈수록 잊히고 있는 인물인 성 프란치스코를 다시금 조명하고 일깨우기 위해 쓴 책입니다. _<옮긴이의 말> 중에서 헤세가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발표할 당시, 가톨릭 전통이 강한 유럽에서는 오히려 성 프란치스코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고 있었다. 그랬기에 성 프란치스코를 재조명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이해와는 다른 새로운 이해를 보여주어야 했다. 결론적으로 말해 헤세는 ‘성자(聖者)’ 프란치스코가 아닌 ‘인간’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써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의 성인 전기는 다분히 종교적인 목적 아래 쓰였다. 즉, 성인들이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얼마나 성실히 하느님의 뜻을 따랐으며 얼마나 열정적으로 하느님을 증거하는지에 모든 지면을 할애했다.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지어진 글인 것이다. 그러나 헤세가 이 책을 쓰며 주목한 것은 세속적 명예와 영화에 흠뻑 젖어 있던 한 남자, 한 인간의 ‘고뇌’와 ‘선택’이었다. 그리고 헤세는 그 결정적 순간들을 포착하여 프란치스코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헤세가 포착한 결정적 장면 1 – “초라한 귀향”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나 화려한 생활을 하던 청년이었다. 함께 어울리던 귀족 자제들 사이에서 “프린쳅스 유벤티투스”, 즉 “젊은 황제”라고 불렸다. 헤세에 따르면 “기사와 트루바두르(서양 중세 때 남프랑스를 중심으로 활동한 시인이자 음악가들)가 되는 것이 그의 가장 강렬한 꿈이자 소원이었다.” 그러던 중 남부 이탈리아에서 당대 최고의 기사이자 영웅으로 통하던 발터 폰 브리엔(발터 3세)가 교황 이노첸츠의 편에 서서 무기를 들었고, 많은 귀족 청년들이 그를 따랐다. 프란치스코도 그중 하나였다. 그러나 누구보다 화려한 무구를 갖추고 말 위에 올라 의기양양하게 작별 인사를 외치고, “황금 월계관”을 예감하며 고향 아시시를 빠져나간 프란치스코는 출발한 첫날, 홀로 고향으로 돌아온다. 여행 첫날에 젊은 프란치스코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심장이 고동치며 욕망과 허영심에서 비롯한 달콤한 상상들이 녹아 없어지는 일이 일어났다. 그때에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어떤 목소리가 그 놀란 영혼을 무너뜨려 굴복시켰는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어느 한 사람의 고유한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은 신성한 비밀처럼 영원히 어둠 속에 덮여 있다. 프란치스코는 자신의 생각이나 내면의 모습에 대해서 결코 한 번도 말을 꺼낸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 갑자기 삶과 죽음의 수수께끼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어떤 성스러운 힘이 그를 자기 일생의 목표를 찾아 선택할 수밖에 없도록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고 나서 스폴레토에서 그는 열병에 휩싸였다가 곧 혼자서 소리 없이 풀이 죽은 채로 아시시로 되돌아왔다. 그는 빛나는 무구를 어느 가난한 귀족에게 선사했다. _본문 헤세가 이 대목을 이야기하는 방식은 기존의 성인 전기와 결정적으로 차이가 있다. 프란치스코의 제자였던 토마소 다첼라노가 1246년 무렵에 쓴 『성 프란치스코의 두 번째 전기』에는 프란치스코가 전쟁에서 갑자기 돌아오는 이 대목에서 프란치스코가 하느님과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눈 꿈을 꾸었다고 적고 있다. “누가 네게 더 좋은 것을 주겠느냐? 주님이냐 노예냐?” 프란치스코가 대답했다. “주님입니다!” 그러자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서 너는 주님 대신에 노예를 섬기느냐?” 프란치스코가 대답했다. “주님, 제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이 대답하셨다. “고향으로 돌아가라. 내가 너를 영적으로 가득 채우겠다.” 그러나 헤세는 이 대화를 인용하지 않음으로써 그 이유를 영원히 비밀로 남겼다. ‘명령과 구속’보다는 ‘결단과 의지’의 측면을 강조하고, ‘외부의 충격’에 의해서가 아니라 ‘내면의 요구’로 이루어지는 변화를 보여주는 것에 헤세는 방점을 둔 것이다. 헤세가 포착한 결정적 장면 2 – “깨닫지 못하고 아파하는 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가 돌아오자 “그의 부모와 아시시의 다른 사람들은 깜짝 놀라 화를 내고 비웃고 유명한 군주가 금의환향했다며 놀려댔다.” 프란치스코는 “화살에라도 맞은 것처럼 마음 깊이 아파했다.” 그의 영혼은 허무함과 죽음의 두려움으로 가득 찼고, 근심과 고통에 시달렸다. 자신의 꿈과 희망이 헛되다는 것을 인정했지만 아무도 그에게 구원의 길을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에 프란치스코는 내내 자신의 영혼 속에서 고난을 겪고 있었고, 우울과 죽음의 공포가 그를 삼켜버렸기에 상처 입은 마음으로 하늘을 향해 구원을 바라며 울부짖었다. 이렇게 분투하고 견뎌내고 자신의 삶에서 무상함을 느끼는 동안에도,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유로 고통을 받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어두운 감옥에서 죄수들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고 있다는 것을 그는 알지 못했다. 또한 그는, 지금 자신이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위해 버텨내고 구원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것을 알지도, 상상하지도 못했다. _본문 헤세는 성인(聖人)의 인간적인 고뇌를 아름다운 문장 속에 담아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성 공감하고 동참하게 한다. 헤세가 포착한 결정적 장면 3 – “영웅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되기로 결심하다” 이 글을 읽는 누군가는 프란치스코의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비웃거나 미치광이를 만났을 때처럼 고개를 흔들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무엇을 목마르게 그리워하는지, 지혜도 교회도 쾌락도 풀어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냈다. 이 세상에서 인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삶과 죽음 사이에서 방황하는 순례자나 덧없는 손님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고통스럽게 깨닫고 나서, 그는 새로워진 사랑의 열정으로 하느님의 품 안에 자신을 던지며 오로지 순박하고 빛나는 마음으로 진정한 삶에 이르는 길을 찾으려 노력했다. 돌아갈 고향을 찾는 그의 눈에 그리스도와 그의 첫 사도 베드로의 모습이 보였고, 이와 동시에 그는 모든 굴레에서 해방되어 법률이 아니라 오로지 사랑에 소속될 것과, 땅의 동물과 하늘의 새를 그들의 음식으로 주시는 하느님께 한 어린아이가 되어 자신을 맡길 것을 결심했다. _본문 헤세는 프란치스코가 ‘성자’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태어나 끝까지 싸우고 뛰어넘어 더 높은 세계로 나아간 것임을, 그리하여 다른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와 새로운 삶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었음을 이야기한다. 간절히 꿈꾸던 영웅이 되기를 포기하고 어린아이가 되기로 결심하고 그러한 삶을 살아낸 프란치스코는 헤세에게는 다시없는 ‘영웅’이자 르네상스라는 거대한 작품의 시작이었다. 아, 어여쁜 작품들을 완성한 유명한 작가와 시인 들이 그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하늘의 천사가 씨앗을 뿌리듯 민중에게 근원적인 힘과 가슴속에서 불타오르는 말과 영원에 대한 생각과 태곳적 인류의 그리움을 뿌리는 사람은 드물다. 그리고 아름답게 꾸민 글과 예술이 아니라 오로지 순수하고 고귀한 존재로 수 세기에 걸쳐 사랑과 찬미를 받고, 지고지순한 곳에서 우리를 비추는 복된 별로 서 있으며, 어둠 속에서 이리저리 헤매는 인류를 위해 미소 짓는 찬란하고 온유한 길잡이와 통솔자인 사람 또한 드물다. _본문 ◆ 책 속에서 프란치스코가 교황의 설교 허가를 받았다는 소식이 아시시에 퍼지자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말을 듣고자 하는 엄청난 열망이 치솟았다. 그는 (다른 성당은 너무 작았기 때문에) 대성당에서 강론해야 했다. 그의 압도적인 열정이 폭풍처럼 몰아쳐 구름같이 몰려온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즈음에 또다시 가난한 사람들과 고상한 귀족들과 아시시의 지배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불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의 설교와 본보기는 엄청난 영향을 끼쳐서 이미 많은 사람들이 진실로 그가 각 파벌의 다툼을 중재해주길 바라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온 도시가 그의 온화한 판결에 순종했다. 그는 적들은 서로 화해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이익을 가져가게 했고, 귀족과 평민 사이의 계약서와 동맹 서약을 기초하고 성실히 지키게끔 했다. 파괴된 것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도시에 감사와 기쁨이 넘쳐흘렀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프란치스코의 동반자가 되려고 몰려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의 형제회를 두고 “하찮은 이들의 수도회Orden der Minoriten”라고 불렀다. 모든 사람들이 점점 더 그를 사랑하고 존경했으며 당시에 이미 성인으로 부르기까지 한 사람들이 생겼다. _본문 헤세가 프란치스코를 단 한 편의 시를 남겼지만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하고, 가장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았지만 화려한 삶을 살았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 가장 강렬한 예술적 모티브가 된 인물로 우러른 것은 그가 얼마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정신을 성취했는지를, 그리고 그것이 지금까지 어떻게 이어지고 살아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프란치스코야말로 세속적인 화려함과 위대함을 버리고 가장 겸손하고 가난하게 살아감으로써 새로운 시대정신을 낳고 세계를 근본적으로 바꾼 인물이라고 헤세는 말하고 있습니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고 하지만, 펜보다 강한 것은 가난과 겸손함입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에서 비롯한 세계를 우리는 “르네상스”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_<옮긴이의 말>

데미안 Demian :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

<데미안 Demian :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 비극적인 시대에 인간성의 깃발을 드높인 시인’ 헤세의 기념비적 작품 ‘자기 탐구의 길’을 개척한 성장소설의 걸작 1946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이자 한국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독일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인 헤르만 헤세. 그의 작품 중에서도 청소년기 학생을 주인공으로 한 《페터 카멘친트》 《데미안》 《수레바퀴 아래서》 등의 성장소설들은 답답한 교육 현실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찾지 못해 고민하고 방황하는 한국의 청소년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오랜 세월 사랑을 받아왔다. 특히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라는 구절로 유명한 《데미안》은 자아와 내면 탐구의 길을 개척한 작품으로서 그 명성이 높다. 하지만 종교와 철학 및 심리학적 맥락을 파악하고 읽어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에 다소 난해하다는 평을 받고 있기도 하다. ‘에밀 싱클레어의 젊은 날 이야기’란 부제를 단 이 소설은 싱클레어라는 청년의 회고록 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데미안이라는 신비로운 인물을 만남으로써 자기 본연의 모습을 각성하고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며 성숙해가는 청년의 내면세계를 그리고 있다.

문예 20세기 문학 세트 (45권)

<문예 20세기 문학 세트 (45권)> since 1966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선 고전문학 세트(전 45권) 오랜 시간 좋은 책으로 수많은 독자의 가슴에 감동과 빛을 던져준 문예출판사의 세계문학선 중 20세기를 대표하는 작품 45종을 묶었다.

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싯다르타 / 인도의 이력서> 인도를 배경으로 한 ≪싯다르타≫와 ≪유리알 유희≫의 삽화 <인도의 이력서>를 함께 묶었다. 동양을 영혼의 본향으로 여기고 동양 사상을 통해 만유의 단일성에 도달한 헤세의 정신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들이다. 국내 첫 헤세 박사이자 한국헤세학회장을 지낸 이인웅 교수의 약 80쪽에 달하는 해설이 방랑하는 헤세의 영혼을 따라 독자를 안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