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
신경숙
평균평점 3.50
엄마를 부탁해
3.5 (1)

섬세하고 깊은 성찰, 따뜻한 시선의 작가 신경숙이 절정의 기량으로 풀어낸 엄마 이야기,엄마를 통해서 생각하는 가족 이야기, 가장 큰 사랑 이야기. 세상 모든 사람은 엄마의 자식, 우리 모두에겐 나만의 엄마가 있다. 때로 좋기도 밉기도 고맙기도 원망스럽기도 한, 그러나 굳건한 땅처럼 분명하고 단단한 엄마. 어느날, 그 엄마를 잃어버린다. 나이 들고 몸도 성치...

아버지에게 갔었어

<아버지에게 갔었어> 익명의 아버지들에게 바치는 신경숙의 찬란한 헌사 가족의 나이 듦을 비로소 바라보게 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 소설가 신경숙의 신작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가 출간되었다. 단행본으로는 8년 만이고 장편으로는 11년 만에 출간하는, 작가의 여덟번째 장편소설이다. 2020년 6월부터 12월까지 6개월간 ‘매거진 창비’에서 연재한 작품을 공들여 수정·보완하여 새롭게 선보인다. 이번 소설은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상실을 통해 비로소 아버지라는 한 사람에게 가닿게 되는 과정을 절절하게 그려낸 이야기로, 소설가 신경숙의 작가적 인생을 한 차원 새롭게 여는 작품이기도 하다. 오래도록 소설을 써온 작가는 이번 작품에서 삶과 세상에 대한 무르익은 통찰과 철학, 그리고 가족을 향한 연민에서 비롯된 깊은 사유를 응축해내면서 가족의 나이 듦을 처음 바라보게 된 우리 모두의 이야기를 시리고도 찬란하게 펼쳐놓는다. 한편 2008년 출간된 『엄마를 부탁해』는 미국을 비롯해 41개국에 번역 출판되고 한국 문학작품으로는 최초로 미국 제작사에 드라마 판권이 판매되기도 하는 등 수많은 화제를 낳았다. 엄마를 향한 가슴 절절한 이야기로 250만명의 독자를 감동시킨 작가는 이번 신작 장편소설로 정통 가족서사의 귀환을 알리며 아버지뿐 아니라 가족 전체의 관계에 대한 고민을 묵직하게 풀어놓는다. 삶과 인간에 대한 무르익은 통찰 가족을 향한 연민에서 비롯된 깊은 사유 한국소설에서 그간 비어 있던 ‘아버지’의 자리를 여성작가의 시각으로 새로이 써낸 이번 소설은, 엄마가 입원하자 J시 집에 홀로 남게 된 아버지를 보러 가기 위해 ‘나’가 5년 만에 기차에 오르며 시작된다. 눈앞에 펼쳐질 듯 생생한 묘사로 그려진 J시와 그 안에서 평생을 살아온 아버지의 지나온 삶이 겹쳐지며, 순식간에 ‘나’는 아버지의 삶 속으로 빨려들어간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트라우마로 고통받아왔으며 “젊은 날에 당신의 새끼들인 우리가 음식을 먹는 걸 보면 무서웠”지만 그것이 도리어 살아갈 힘이 되었다고 말하는, ‘아버지’ 하면 으레 떠오르기 마련인 가부장적인 억압과는 완전히 거리가 먼 인물이다. ‘아버지’ 인물의 생생함은 그가 가진 서사의 리얼리티로도 드러난다. 한국전쟁부터, 돈을 벌기 위해 갔던 서울에서 목도한 4·19혁명, 자식 여섯을 대학에 보낼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소 값이 폭락하자 그 소를 타고 참여했던 80년대 소몰이 시위까지, 그 자체로 근 70년의 한국현대사가 한 인물에게 고스란히 담겼다. 역사를 개인의 관점에서 그려내기도 한 이번 작품은 가족의 삶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아픈 역사 속에 내던져진 인간 내면의 깊이를 보여준다. 이외에도 또 한명의 아버지인 ‘큰오빠’가 겪은 80~90년대 중동 이주노동,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이제는 치킨 두마리도 마음 놓고 시키지 못해 미안해하는 조카 등은 아버지-아들 세대를 아우르는 다양한 가족의 모습과 여러겹의 아버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한편 ‘나’는 몇년 전 사고로 딸을 잃는 상실을 겪었다. 아버지가 수면장애로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을 가족에게 전해 들었음에도 그동안 마음을 쓰지 않았던 ‘나’는 그 뼈아픈 상실을 계기로 비로소 아버지의 고통과 대면하며 “아버지를 한번도 개별적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 그러면서 둘째 오빠와 엄마, 아버지와 함께 전쟁을 겪어낸 ‘박무릉’ 등 다른 인물의 목소리를 빌려 그간 소외되어 있었던 아버지와 그를 둘러싼 가족의 삶을 다각도로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경험은 종내 가족의 지난 시간과, 멈춰져 있던 ‘나’의 글쓰기를 돌아보게 하는데, 그 깨달음은 독자로 하여금 눈앞이 시릴 만큼 절절한 고백을 목도하게 한다. 아버지가 니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은 잘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하마터면 아버지, 나는 나 자신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아요,라고 할 뻔했다. 나는 하고 싶어서 쓰는 게 아니라 살고 싶어서 쓰는 것 같아요,라고. (…) 아버지, 나는 부서지고 깨졌어요. 당신 말처럼 나는 별것이나 쓰는 사람이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런데 나는 그 별것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해요. (93면) 존재의 근원인 가족과 글쓰기에 대한 성찰과 절절한 울림 ‘나’가 이제야 아버지를 개별적인 한명의 사람으로 바라보게 된 것은 아버지의 늙음을 마음 깊이 받아들였기 때문이리라. “이제 부모의 보호자가 되는 일을 두려워하지 말자”라고 하는 소설 속 큰오빠의 말처럼, 우리는 모두 언젠가, 혹은 조만간 부모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그렇게 부모의 나이 듦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 때 부모를 개별적인 한 사람으로 처음 바라보게 될지도 모른다. 저마다의 삶이 다르듯이 아버지와의 관계 또한 같을 리 없으나, 소설 속 이 가족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우리 각자의 아버지들이 불려나오게 될 것이다. 아버지는 나의 근원이자 시작이되, 그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 어떻게 늙어가는가 곱씹어볼 기회를 얻을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한 인간에 대한 궁구에서 시작하여 관계와 가족에 대한 반성과 이해를 얻는 독서가 될 것이다. 체험의 진정성 문제를 깊이 파고들어간 신경숙의 이번 신작 장편은 그렇게 ‘아버지’의 자리를 새로 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이 소설을 받아든 우리가 각자의 아버지에게 가야 할 차례이다.

리진 1

<리진 1> <추천평> 리진의 생애는 한국의 근대와 전 근대가 만나는 지점에서 점화된 비극으로 읽힌다. 작가 신경숙은 역사와 소설적 상상력을 맞붙여놓음으로써 몰윤리와 과잉윤리의 뜨거운 접점을 포착해냈다. 신경숙은 최대한 몸을 구부림으로써 리진의 시선이 될 수 있었고 , 리진의 몸이 이끄는 대로 비극적 사건을 향해 나아감으로써 좌절당한 한국적 근대의 한 실재를 포착해낼 수 있었다. 아마도 그것은 자신을 깊이 사랑한 작가를 향해 주인공 리진이 돌려준 선물이었을 것이다. - 서영채(문학평론가) 오랜만에 새 소설을 낸다. 장편소설로는 『바이올렛』을 2001년에 냈으니 육 년 만인가보다. 책만 내지 않았을 뿐 나로서는 필사적으로 문학을 생각했던 시간들이었다고 해도 육 년 만이라니…… 작가 신경숙이 육 년이라는 오랜 침묵을 깨고 내놓은 장편소설 『리진』. '내가 리진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사 년 전이다.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했던 것을 본 대가로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에 움켜쥔 채 피 흘리고 있는 백 년 전 한 여인의 고통이 나를 엄습했다. R에게 전화를 걸어 A4용지 한 장 반 안에 갇혀 있는 그 여인을 소설로 되살려내보겠노라 했다. 그날로부터 나는 하던 일을 접고 리진을 찾아 헤맸다.' 작가 신경숙은 그렇게 이 여인, 리진과 조우했다. 그날부터 책이 나오게 된 오늘까지, 꼬박 사 년 동안 작가는 그녀, 리진에게 들려 있었고, A4용지 한 장 반 안에 갇혀 있던 그녀의 짧은 생은 신경숙의 손끝에서 자신만의 역사를 가지고 새롭게 태어났다. '행여 파리에 그녀의 흔적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을까 싶어 틈이 나면 파리로 건너가 그녀의 행적을 뒤졌다. 백 년 전에 어쩌면 그녀가 살았을지도 모를 아파트 주위를 배회했다. 파리의 19세기 풍경을 짐작해보려 복식박물관이며 밀랍박물관이며 백 년 전 파리 건축물의 외형 빛깔을 거의 비슷하게 간직하고 있다는 본의 거리들을 온종일 헤매다니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작가는 19세기 말 그녀의 행적을 원고지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작가가 쫓아다닌 그녀의 삶은 과거의 그것이 아닌, 그녀만의 것이 되어 오늘의 지도를 만들고 있다. 그가 누구인가. “마음의 현존을 그려내는 현재형 묘사의 작가”, 그것을 통해 90년대 문학의 한 흐름을 만들어냈던 이가 아닌가. 이 작품이 역사 속의 실존인물을 주인공으로 하면서도 역사소설이 아닌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어느 시대이든 소설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무슨 이야기를 써도 인간적인 삶은 어떤 것인가에 시선이 가게 되어 있다. 나는 이 소설을 역사소설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리진이라는 여자를 복원시키는 일은 서로 완벽한 타자들이었던 존재들이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삶 속에 끼어들고 어떻게 친밀감을 느끼고 어떻게 서로를 구경하며 종내는 어떻게 생을 다하는가 재구성하는 일이기도 했다. 리진의 주변 인물을 통해 상황논리에 의해 강한 자가 밀고 들어오는 근대가 아니라 스스로 타자를 인식한 소박한 개개인이 성취해나간 근대인의 초상 같은 걸 그려보고자 함도 있었다.' 작가 자신, 이 소설을 역사소설로 보고 있지 않지만, 왕비의 총애 속에서 궁중의 무희로 자라나, 조선의 궁 안에서 나비와 같이 춤을 추고, 물빛 드레스를 입고 파리의 거리를 거닐고, 모파상의 작품을 불어로 낭독하던 여인은 19세기 말 과거의 여인이 아니라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는 여인과도 같다. 급격하게 변화하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개인의 역사는 또다른 줄기를 이루며 흘러가게 마련이다. 그렇게, 리진은 자기 자신만의 역사를, 기억을, 사랑을, 관계를 만들어나간다. 시대의 역동 속에서 그녀는 자신의 운명을, 여자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의 소박한 자신의 일생을 스스로 다스려낸 것이다. '생각해보면 리진을 생명을 가진 인간으로 태어나게 해 다섯 살 때 아기나인의 신분으로 어두운 궁궐로 들여보낸 것까지만 내가 한 일 같다. 리진이 궁중 무희로 성장한 후부터는 이 아름답고 총명한 처녀가 오히려 글을 쓰고 있는 나를 그윽이 바라보며 안내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늦으면 기다려주고 내가 헤매면 등불을 비춰주었다.' 그것은 작가 자신에게뿐만 아니라, 독자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순간 ‘리진’은 소설 속 아리따운 주인공에서 그치지 않고, 역사 속에서, 그리고 자신만의 역사 속에 홀로 선 한 개인이 되어 읽는이에게 다가온다. '리진을 쓰는 동안 나는 충만했다. 나 자신이 외국인이 되어 백 년 전의 조선 땅을 여행하는 듯했다. 친숙한 것, 내가 다 아는 것이 아니면 소설로 쓸 엄두를 못 내던 내게는 새로운 영지였다. 서사를 요구하는 시대지만 나는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격렬한 서사의 숨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활극이나 신파나 인간승리의 작품이 되는 것을 저어했기 때문이다. 소설은 승리보다는 패배의 서사와 운명을 같이한다고 여긴다. 어떻게 윤리적으로 바르게 잊혀지는가가 인생이기도 하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날 사람은 만나듯이 리진의 서사는 내가 밀어넣어도 넣어도 고개를 디밀고 올라왔다. 저절로 찾아든 이야기의 두께가 리진의 몸통이 되어준 것은 이 작품을 쓰며 거둔 즐거운 수확이었다.' 따뜻하고 웅숭깊은 시선으로 현대인의 인간 내면을 찬찬히 들여다보던 작가는 이 작품 『리진』에서 19세기 말이라는 문제적 시대를 배경으로 조선의 궁정에서 프랑스 파리의 샹젤리제에 이르는 광대한 스케일의 여정을 따라가는 한편 밑바닥 서민층에서 귀족과 왕족, 상인과 지식인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다양한 인간군상을 선보이고 있다. 또한 기존의 섬세하고 울림이 큰 문체를 유지하면서도 부피 있는 서사를 접목시켜 역사의 격류에 휩쓸린 한 여성의 운명과 사랑을 현대적인 감각으로 되살려놓았다. 한 호흡에 읽히면서도 다채로운 의미를 내장하고 있는 장편소설 『리진』은 신경숙 문학의 새로운 전환을 알리는 변곡점이 될 것이다. 오래 전에 글을 쓰는 일은 무엇인가를, 누군가를, 잊기 위한 마음 연약한 자가 의지하는 마지막 보루 같은 행위라고 했던 적이 있다. 쓰는 자는 잊고 타자가 기억해주기를 . 소설가로 산 지난 이십삼 년 동안 나는 씀으로써 잊을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근자에 그 잊어버렸다고 생각한 일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밤들이 늘어났다. 다 잊을 수 없었던 것은 가까이 다가가 원없이 소진시키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시 내 앞에 밀려드는 또다른 시간 속에선 사람을 대하는 일이든 글을 쓰는 일이든 한 발짝 더 가까이 가보려고 한다. 자, 이제 백 년 전의 한 여인을 백 년 후의 이 세상으로 내보낸다. 리진…… 당신이 사람들 속에 사 랑스럽게 섞여 다시 잊혀지는 일 없이 현재형으로 존재하게 되기를 바란다. 리진은 이제 작가의 손을 떠나 사람들 사이에 홀로 섰다. 길지 않은 일생을 아름답고도 외롭게 살았던 한 여인에게 곁을 내어주고 함께 호흡하기를, 그의 생이 뿜어내는 향기에 흠뻑 취해보기를…… 왕실의 무희는 매우 아름다운 용모로 다른 무희들과는 구분되었다. 그것은 유럽인의 눈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 젊은 외교관이 이 무희의 우아함과 매력에 깊은 인상을 받아 그녀를 원하게 되었다.. 유럽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은 그 대리대사는 매일매일 그 젊은 한국 여인에게서 발견되는 지적인 매력에 이끌려 그녀와 헤어지기를 원치 않게 되었다. --- 이폴리트 프랑댕

외딴방

<외딴방> 1993년 12월, 한국문학의 새로운 플랫폼이고자 문을 열었던 문학동네가 창립 20주년을 맞아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을 발간, 그 첫 스무 권을 선보인다. 문학의 위기, 문학의 죽음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그래서 문학의 황금기는 언제나 과거에 존재한다. 시간의 주름을 펼치고 그 속에서 불멸의 성좌를 찾아내야 한다. 과거를 지금-여기로 호출하지 않고서는 현재에 대한 의미부여, 미래에 대한 상상은 불가능하다. 미래 전망은 기억을 예언으로 승화하는 일이다. 과거를 재발견, 재정의하지 않고서는 더 나은 세상을 꿈꿀 수 없다. 문학동네가 한국문학전집을 새로 엮어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은 지난 20년간 문학동네를 통해 독자와 만나온 한국문학의 빛나는 성취를 우선적으로 선정했다. 하지만 앞으로 세대와 장르 등 범위를 확대하면서 21세기 한국문학의 정전을 완성하고, 한국문학의 특수성을 세계문학의 보편성과 접목시키는 매개 역할을 수행해나갈 것이다.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009 신경숙 장편소설 외딴방 문학동네 한국문학전집 제9권 신경숙 장편소설 『외딴방』(1995)은 80년대의 암흑기 속에서 문학에의 꿈을 키워나가던 신경숙의 시원(始原)을 만날 수 있는 자전적 성장소설로, 현재진행형의 글쓰기를 통해 오로지 문학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이와 아름다움을 표현해내어 독자와 언론의 열렬한 관심은 물론 문단의 다양한 진영에서 일치된 찬사를 이끌어냈다. 내용과 형식 양면에서 새로운 리얼리즘의 가능성을 열어 보인 『외딴방』은 90년대 한국문학이 거둔 최고의 수확일 것이다. 서른두 살의 소설가인 ‘나’는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그동안 닫아놓았던 외딴방의 문을 조심스럽고 섬세하게 열어젖힌다. 낮에는 구로공단에서 음향기기를 만드는 공장 직원으로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급의 학생으로 생활하던 그 시절은, 현재의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고, 여고 시절을 그녀의 삶 속에서 누락시키게 한다. 하루에 이만 개씩 포장해야 하는 사탕 때문에 손이 딱딱해진 안향숙과 월급봉투를 받으려다 해직당한 유채옥, 그리고 결코 과거가 될 수 없는 희재 언니가 있던 외딴방을 향해 ‘나’는 머뭇거림과 망설임을 반복하면서도 결국은 그것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떠나온 시간 속을 거슬러올라가는 글쓰기의 모험은 그러나 특정인의 체험에 갇힌 폐쇄회로에 머물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가 이 작품에서 보게 되는 것은 몇몇 인물의 운명의 부침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난 한 시대의 거대한 풍속화이다. 열여섯 살부터 스무 살 무렵까지의 고단하고 지난했던 시간들을 신경숙 특유의 아름답게 정제된 필치로 그려낸 이 경이로운 작품은 한편, 글쓰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가장 치열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소설이기도 하다.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을 필사하며 작가를 꿈꾸던 소녀가 자신의 내면을 남김없이 글쓰기에 내어주는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이 읽는 이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어 시간을 뛰어넘는 깊은 감동을 준다. 아니 에르노의 자전적 소설, 프루스트의 소설, 에밀 졸라 작품 속 노동자들의 서사시를 한데 엮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방대해 불가능에 가까워 보인다. 그러나 신경숙은 놀라운 힘과 열정적 감수성으로, 그러면서도 무겁지 않은 필치로 이 모든 것을 녹여냈다. 그녀는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의 탄생, 노동자들의 삶, 여성의 권리 그리고 작가 자신의 성장기에 대한 놀라운 작품을 선보였다. _리나페르쉬 상(Prix de l’inapercu) 선정 이유 『외딴방』은 소녀와 희재 언니의 슬픔과 기쁨을 섬세하게 말하고 그 이야기를 끝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나 할말이 없어진 후에도 『외딴방』의 글쓰기는 끝날 수가 없다. ‘슬픔과 기쁨’에 대한 말하기는 언제나 다시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단편 「외딴방」을 써놓고도 장편 『외딴방』을 다시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이며 다시 『엄마를 부탁해』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이 풍부한 ‘슬픔과 기쁨’에 대한 섬세한 말하기들. 말하기의 미래가, 글쓰기가, 결국 그것을 끊임없이 끌어올리고 있지 않은가. _권희철(문학평론가)

|바이올렛

<개정판|바이올렛> 이십 년의 시간을 넘어 풀잎처럼 되살아난 ‘그녀’들의 목소리 한국문학을 말할 때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성취를 이루어낸 작가 신경숙의 네번째 장편소설 『바이올렛』이 영어판 출간과 발맞추어 개정판으로 독자들을 다시 찾아온다. 작가의 소설은 한국을 넘어 전 세계 독자들을 매료시키며 한국문학의 아름다움과 깊이를 알려나가는 중이다. 영어판 『바이올렛』 또한 “마음을 단단히 먹고 읽어야 하는 작품” “미묘하고 깊고 독특한, 진정한 문학작품”, “고립된 젊은 여성을 바라보는 충격적이고 훌륭한 시각”으로 “자신의 욕망을 추구하는 절박함을 능숙하게 포착”한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영국과 미국에서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2001년 여름 초판 발행된 『바이올렛』은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신경숙 소설 특유의 처연한 슬픔과 은은하게 서린 정염이 어우러지다 끝내 폭발적인 전율을 일으킨다. 소설은 그 제목이 함축하듯 야생화처럼 가녀리지만 끝없는 생명력을 지닌 여성들의 마음속에 감춰진 욕망과 그 주변을 둘러싼 위험을 관통한다. 자기 자신을 있는 힘껏 파괴하는 것 말고는 욕망을 표현할 방법을 부여받지 못해 사그라져야 했던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 작품은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주요한 자산이 되었다. 『바이올렛』 개정판 출간은 그 미약한 존재들의 목소리를 잊지 않고 되살려내려는 신경숙의 소설쓰기와 궤를 같이한다. 이십 년의 시차를 좁히고자 단어와 문장을 살뜰히 손질하고 새로운 표지를 입힌 이 개정판은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여성들의 일상 속에 자리잡고 있는 폭력의 공고함을 상기시킨다. 그리고 세상에 홀로 버려졌다고 느끼는, 작은 풀꽃처럼 눈에 띄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생을 추동하는 고유한 욕망이 있음을 힘주어 말한다.

겨울 우화

<겨울 우화> “나에게 이십칠 년 전이 있었듯이, 누군가 이 책을 읽으며 이십칠 년 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기쁨이겠다.” 등단 27년, 여섯 권의 소설집, 일곱 권의 장편소설, 그리고 짧은 소설과 산문집. 그사이 전 세계 독자들과 함께 읽게 된 신경숙의 소설. 그 첫 시작인 『겨울 우화』가 새 장정으로 선보인다.(고려원에서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은1998년, 문학동네에서 『강물이 될 때까지』로 출간되었다가, 이번에 다시 그 첫 이름을 얻었다.) 이제는 한국문단을 넘어 해외에서도 널리 읽혀지는 작가 신경숙의 첫 소설집 『겨울 우화』는, 작가의 도저한 문학세계의 뿌리이지 원류에 해당한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책이다. 삶의 밑바닥까지 맑고 투명하게 드러내는 여린 감수성과 서정적인 문체, 가슴 속살 깊이 박아두려는 애절한 사랑의 무늬들, 시적인 문체로 문체 미학의 아름다움을 최고로 끌어올린 작가, 신경숙. 쓸쓸하고 애잔한 삶의 밑그림을 섬세하면서도 감각적이며, 시리도록 아름다운 문체로 표현하면서 시적 상징으로 가득 찬 언어 구사를 통해 일상의 결핍을 극복할 수 있는 문학적 풍요의 공간을 제시하고 있는 신경숙 소설은 우리 문학의 가장 소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겨울 우화』는 이와 같은 신경숙 소설의 특징이 모두 담겨 있는 그녀의 첫 소설집으로, 책 속에는 소설 장르에 새로운 예술성을 부여함으로써 단편 미학의 전범을 낳았다고 평가받은 초기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1990년 그 가을, 신경숙을 처음 만난 독자들은, 그사이 이십여 년을 그녀와 함께해왔다. 소녀는 아주머니가 되었을 테고, 그때 태어난 아이들은 이제 다시 처음부터 그녀를 읽어 앞으로 또 그녀와 함께할 것이다. 이제, 또다시, 그녀를 읽을 시간이다. <추천평> 신경숙은 흔히 그 서정적인 문체로 ‘시적’인 소설가라는 평을 듣는다. 하지만 실은 어느 특정 대목이나 묘사의 서정성보다 ‘상징’의 신축 섬세한 구사를 포함하여 언어가 가진 잠재력을―마치 시인이 단순히 ‘산문적인 의미’뿐 아니라 연과 행의 구조, 운율, 비유, 상징 등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듯이―최대한으로 활용한다는 뜻으로 ‘시의 경지’를 추구하는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_백낙청(문학평론가) 신경숙에게 있어서 글쓰기라는 ‘보루’는 흘러가는 시간의 위협 속에 놓인 ‘나’를 담는 장소 혹은 숨기는 장소이다. 신경숙만큼 작가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깊고 넓게, 그리고 빈번히 작품 속에 수용, 용해, 변용식키고 있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작가와 체험 사이의 관계는 “보바리 부인은 나 자신이다”라고 강조한 플로베르의 경우보다 훨씬 더 직접적이다. _김화영(문학평론가, 불문학자) <책 속으로> 「겨울우화」는 내 등단작품이다. 85년 겨울의 일이니 27년 전의 일이다. 1985년 가을에 광화문 우체국에서 펀치를 빌려 원고지의 구멍을 뚫던 생각이 난다. 그 시간에 누군가 태어나기도 했을 것이다. 그때 나는 스물둘이었고 지금은 오십을 눈앞에 두고 있다. 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지고 두렵다. 하지만 어느 상황에서나 쓸 수 있었으므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앞으로 나를 ‘저기’까지 가게 할 것 또한 내가 글을 쓴다, 는 것 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에 안도한다. (……) 누군가 이 책을 읽으며 27년 전이 있었듯이 27년 후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기쁨이겠다. _3판 작가의 말 중에서

깊은 슬픔

<깊은 슬픔> 신경숙 첫 번째 장편소설 『깊은 슬픔』개정판(양장본). 한 여자와, 그녀가 짧은 생애 동안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작가의 예민하면서도 따뜻한 시선과 미세한 삶의 기미를 포착해내는 울림으로 담아내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은서'와 '완', 그리고 '세'. 그들 세 사람을 맺어주고 환희에 빠뜨리며 절망케 하는 매개는 사랑이다. 사랑의 올이 얽히고 풀림에 따라, 고향 '이슬어지'에서 함께 자라난 세 사람의 운명은 서로 겹치고 어긋난다. 이 책은 사랑과 운명이 자꾸만 어긋나면서 서로의 기대와 희망을 배반하는 과정을 덧없는 슬픔과 안타까움이 실린 시선으로 정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오래전 집을 떠날 때> 상처 입은 어린 영혼들이 삶의 집을 짓는 불빛 같은 일곱편의 이야기 1996년 초판이 출간됐던 신경숙의 세번째 소설집 『오래전 집을 떠날 때』를 새롭게 단장하여 선보인다. 문장을 좀더 정교하게 매만졌고 소설 속 인물들의 쓸쓸함을 잘 보여주는 팀 아이텔의 그림을 표지로 삼았다. ‘빈집’의 이미지를 중심으로 부재와 이별, 귀소의 의미를 탐색하는 작품들을 묶은 이 소설집은 여리고 미미한 것들의 존재를 보듬는 작가 특유의 관찰력과 섬세한 언어감각을 보여준다. 초판 출간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작가가 열렬하게 집중하고 표현했던 소설세계를 고스란히 담아내며 여운을 선사한다. 한편 작가는 지난 3월 신작 장편소설 『아버지에게 갔었어』를 펴내며 삶에 대한 무르익은 통찰, 가족을 향한 연민과 깊은 사유를 묵직하게 풀어놓은 바 있다. ‘빈집’이 주는 쓸쓸함, 다시 돌아와 따스한 불을 밝혀야 할 공간 「오래전 집을 떠날 때」와 「마당에 관한 짧은 얘기」는 ‘빈집’을 떠도는 어린 영혼, 어느날 밤에 우연히 만난 소녀를 등장시키며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작품들이다. 두 소설 모두 ‘빈집’이 주는 쓸쓸함이 공포로까지 변모하는 과정을 통해 스산한 현재를 보여준다. 「벌판 위의 빈집」과 「빈집」에서도 그 ‘비어 있음’의 모티프가 이어진다. ‘빈집’과 ‘비어 있음’이 상징하는 절대적인 상실은 화자가 표현하는 일상적인 무서움, 불안, 외로움과 절묘하게 연결되며 소설에 독특한 매력을 부여한다. 「깊은 숨을 쉴 때마다」는 제주도로 여행을 온 주인공이 바닷가 호텔에 머물며 같은 호텔에 투숙하는 한 여자와 그 여자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소녀를 통해 현실에서 멀어져온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작품이다. 그 돌아봄이 자신의 글쓰기로 번져가기도 한다. 「감자 먹는 사람들」과 「모여 있는 불빛」은 평생 가족을 위해 살아온 부친에 대한 애틋한 정이 절절하게 묻어나고 가족에 대한 따뜻한 사랑이 감지되는 작품들이다. 「감자 먹는 사람들」은 입원한 부친을 간병하는 딸이 ‘윤희 언니’에게 쓰는 편지 형식의 작품으로,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해 절박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작품에 삽입된 고흐의 그림 ‘감자 먹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의지와 펄펄 살아 숨 쉬는 생을 가만히 들여다보게 한다. 「모여 있는 불빛」은 일견 ‘소설 쓰기’에 대한 작가의 질문으로 읽히기도 한다. “쓰는 일이란 게 무엇인지?” 스스로 물으며 어린 시절 이야기에 매료됐던 과거를 돌아보는 화자의 질문은 “나의 소설은 무엇을 성장시킬 것인가”라는 물음으로 가닿는다. 이 책 말미에 수록한 ‘새로 쓴 작가의 말’에서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저자인 나의 자리를 언어의 익명성에 물려주라, 한 블랑쇼를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다시 이 책을 향해 작가의 말을 쓸 날이 내게 올 것인지. 온다면 그 미래의 내 마음은 이 몇줄조차 없이 침묵에 가장 근접해 있기를 바라본다.” 25년의 시차를 뛰어넘어 다시 읽는 소설들이 더욱더 깊이 마음을 파고든다.

종소리

<종소리> <추천평> 신경숙 소설의 여성들은 현대사회로부터 추방되어 가까스로 연명하는 마법을 그들이 살아가는 도시의 외지고 그늘진 삶 속에서 구현한다. 곡진한 친밀성의 언어에 감싸인 그 마법의 세계에서는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적대적 대립을 넘어 우주적 공감의 형태로 나아가는 마음의 순화가 기적처럼 일어난다. 모든 삶의 원초적인 동일성에 감응하는 감성의 윤리학. 온갖 모독에 시달리며 쫓겨다닌 ‘인간적인’ 또는 ‘문학적인 것’은 신경숙 소설에서 새로운 성소(聖所)를 찾은 듯하다. - 황종연 / 문학평론가 마음이 아프고 원통해도 멀리멀리 가라. 가서는 다시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마라. 멀리 가라, 멀리 가라. 돌아오지 마라, 돌아오지 마라. 2002년 출간되었던 신경숙의 다섯번째 소설집 [종소리]가 새 장정으로 선보인다. 10년, 적지 않은 시간을 두고 다시 읽는 소설들은, 그 시간의 힘까지 더해, 더욱 깊숙이 가슴을 파고든다. 여전한 것이 아니라, 더 깊어진 감성. 작품은 변한 것이 없는데, 그 힘은 더 커졌다. 수백 년 수천 년 전의 고전들을 다시 읽는 이유, 와 다르지 않을 터다. 이 겨울, 신경숙 다시 읽기를 권한다. 신경숙 소설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리 문학사에 소중한 개성으로 자리잡았다. 신경숙 소설의 특징이라 할 어떤 흐름이 있고, 신경숙의 문체라 할 독특한 빛깔이 있고, 신경숙이 바라보는 어떤 것, 그의 말을 빌자면 "말해질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응시가 있다. 그중에서도 이 책 [종소리]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책 곳곳에 넘실대는 물의 이미지다. 그 물들은 단순한 소재나 배경으로서가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중요한 메타포로 작동하고 있다. 어쩌면 작가는 물, 땅속으로 아득히 이어져 우물로 솟아나는 물, 복개되어 콘크리트에 갇혀 흐르는 도랑물, 악어(다방 여자의 무덤이자 사원)가 잠겨 있는 물, 옛 항아리 속의 물, 인간의 도시를 휩쓸어버리는 홍수의 물 등을 통해 인간의 생과 세상의 괴로움과 덧없음을 그리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친밀성의 부재, 관계의 단절 혹은 고독으로 현상하는 현대인의 불행한 실존을 다루는 신경숙 소설의 한 흐름과, 오래전 집을 떠날 때의 그 기억, 아우라, 풍경을 전경화하고 있는 또다른 흐름이 이 소설집에서 하나로 엮여든다.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살아 있으라 마지막 한 모금의 숨이 남아 있는 그 순간까지 이 세계 속에서 사랑하고 투쟁하고 분노하고 슬퍼하며 살아 있으라 “태어나서 살고 죽는 사이에 가장 찬란한 순간, 인간이거나 미미한 사물이거나 간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는 그런 순간이 있다. 우리가 청춘이라고 부르는 그런 순간이.” ‘청춘’은 깊고 거친 들숨과 날숨, 절망과 상처를 동반하는 것일까.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파랗게 빛나는 이 시기에, 우리는 가장 크게 웃고, 울고, 기뻐하고, 좌절하며, 사랑하고, 헤어지고, 그러면서 성장한다. 어떤 시대를 지나온 세대라도 마찬가지. 이 아름다운 시기에 우리는―청춘들은―누구보다 비극적인 시간을 만나고, 오래, 깊이 고민하고, 질문하고, 답을 찾는다. 가장 깊이 절망하고 고민하고 상처받았기에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빛나는 시간.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는 바로 그 청춘의 이야기이다. 작가는 비극적인 시대상황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사랑과 젊음의 의미를 탐색한다. 성장소설이고 청춘소설이며 연애소설이기도 한 이 작품은, 그래서 고통스러운 아름다움으로 빛난다. 그것은 지나간 시대에 대한 애틋한 초상인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맞아 새롭게 삶의 의미를 찾아나선 젊은 세대에게 바치는 연가이기도 하다.

모르는 여인들

<모르는 여인들> <추천평> [모르는 여인들]이 함축하는 것은 우리의 삶이 극단적인 고립 속에서 경화(硬化)되는 것을 막고, 사람들 사이의 관계의 그물로 짜여지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인간적 조건들이다. 타인의 낯섦과 연약함과 누추함을 보듬고 그것과의 관계맺음을 향해 나아가며 서로 함께 존재함으로 세계의 구성방식을 조금씩 바꿔놓기. 그러니까, 그것은 사랑이며 또한 인생이다. - 권희철 / 문학평론가 지독한 세속적 일상 속에서 신화적인 체험을 길어올리는 미학적 시선은 여전히 신경숙 문학의 힘이다. - 정여울 / 문학평론가 신경숙의 소설은 사회에서 가장 멀리 있고도 특수한 지점(개인)에서 출발하지만 그 때문에 일반적인 자리에서는 볼 수 없었던 인간과 사회에 가장 가깝고도 단독적인 문제를 드러내게 된다. 그녀 소설의 보편성은 개인들의 차이를 최대화하면서도 절대화하지 않는 데 있다. - 김남혁 / 문학평론가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종소리] 이후 팔 년 만에 여섯번째 단편집을 낸다. 지난 팔 년 동안 나는 장편 [리진] [엄마를 부탁해]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를 쓰는 데 집중했다. 그 사이사이에 이 책에 실린 단편들을 쓴 셈이다. 교정을 보기 위해 작품들을 다시 읽는 동안 잠깐씩 아득해지곤 했다. 팔 년이란 시간 때문이었을까. 깨끗한 신발을 신고 집을 나가 부랑아로 떠돌다가 굽이 다 닳은 해진 신발을 끌고 돌아온 기분이랄까. 개인적으로 이 책에 실린 단편소설들이 씌어진 시간들은 특별하다. 청탁을 받아서 썼다기보다 내가 쓰고 싶을 때마다 자발적으로 쓴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여기에 수록된 일곱 편의 작품들은 지난 팔 년 중에 내가 가장 침울했을 때나 내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씌어졌다는 뜻이다. 동시대로부터 혹은 내가 맺고 있는 관계로부터 마음이 훼손되거나 쓰라림으로 얼룩지려고 할 때마다 묵묵히 내 책상 앞으로 가서 이 작품들을 썼던 기억들. 하늘에서 내려온 사다리를 두 손으로 붙잡는 심정이었다고 하면 과장이겠지만 그런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누구에게 읽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때마다 이 작품들을 쓰지 않으면 다른 시간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았기에. 이 불완전한 세계가 발화시키는 슬픔과 분노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하지만 어쩌든지 완성을 하고 나면 피가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들 속엔 익명의 ‘모르는 사람’들이 그려내는 성화(聖畵)가 있을 것이다. 주요인물로 등장하든 바람처럼 스쳐가든 이 작품들 속에 등장하는 모르는 사람들을 나는 나의 동시대인들이라고 느낀다. 이 세계의 중심부에 있지 않고 주변부를 떠도는 잘나지도 독특하지도 않은 사람들. 군중 속에 섞여 있으면 잘 보이지도 않을 사람들. 하지만 우리가 현대인이 되는 동안 상실해버린 인간적인 체온과 연민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내가 나의 내적 요구에 의해 이러한 사람들을 비밀스럽게 하나씩 낳아서 세상에 섞어놓은 것은, 이 별스럽지도 않은 사람들의 인생이 한쪽으로 치우친 이 세계의 한 끝을 끌어올려 균형을 이루어주길 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지난 팔 년 동안 써놓은 작품들을 모아 읽으며 내가 새삼스럽게 알게 된 것은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 서로 연결되어 있는지도 모르는 채 우리는 서로의 인생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따금 나를 행복하게 했던 나의 문장들도 사실은 나 혼자 쓴 게 아니라 나와 연결되어 있는 나의 동시대인들로부터 선물받은 것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이 우울하고 고독한 시대에도 문학이 있다는 것에 나는 아직도 설렌다. 인간이 저지르는 숱한 오류와 뜻밖의 강인함과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나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작가의 말’ 전문) 8년 만에 출간되는 신경숙 문학의 마스터피스, 일찍이 거기에 있었으나 부름받지 못한 모든 것들에게 보내는 간절한 발신음 다시, 손을 꼽아본다. 2003년 [종소리] 출간 이후 정확하게, 팔 년 하고도 팔 개월 만이다. ‘작가의 말’에 밝힌 대로 그동안 작가는 세 편의 장편소설을 상재했다. 오랜 준비 끝에 2007년 책을 펴낸 [리진] 이후 거의 일 년에 한 편꼴로 장편소설을 선보인 셈이니, 쉴 틈 없는 부지런한 발걸음이었다. 그 잰 발걸음을 놀리는 동안 발표된 일곱 편의 단편들은 작가에게 어떤 숨고르기였을까. 긴 시간을 두고 새로 읽는 그의 단편들은 한 글자 한 글자, 마치 점자를 읽듯 천천히 눈으로, 손끝으로, 마음으로 더듬어 읽어내려가게 된다. 글자 하나 단어 하나 문장 하나하나에, 그 사이사이 행간에, 작가의 낮은 숨결이, 들숨과 날숨이 그대로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해서인지, 책을 읽는 동안 그 문장의 숨결을 따라, 저절로 심호흡을 하게 된다. 천천히 그리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가 다시 또 천천히 깊은 숨을 토해내는 사이 그의 숨결과 나의 숨결이 엉키어든다.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 그리고 독자가 뿜어내는 더운 숨결이 한데 엉키어드는 것. 어떤 독서가 이런 체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일까. 언젠가 소설가 김훈은 그의 소설을 두고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세상의 낯선 시간과 공간과 관계 속에 하나의 인간 존재가 놓여질 때 그 존재에게 숙명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것들을 향하여 신경숙의 글은 간절한 발신음을 보낸다. 그에 답하는 희미한 수신음들이 신경숙의 글 속에서 매우 정밀하고 단정하게 포착되어, 글의 켜와 글의 결을 이루고, 그 숙명적 결핍에 대한 인간의 교감이 그의 글을 아름답게 긴장시키고 있다.” 팔 년 만에 선보이는 신경숙의 단편들을 앞에 두고 새삼 오래전 그의 말이 떠오르는 것은, 이 일곱 편의 단편이 신경숙 문학의 가장 깊은 곳에서 떠올리는 한 바가지 샘물과도 같아서일 것이다. 늘 그 자리에 그렇게 있었으나 눈에 띄지 않는 것들, 작고 희미하게나마 끊임없이 제 존재를 드러내지만 끝내는 수신되지 못하던 그 목소리들,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듣지 못했던 그들이 보내는 희미한 발신음을 포착해내고 불러내어 보듬어주는 작가의 예민하고 섬세한 손길, 눈길, 그리고 숨결…… 세상 모든 숨겨진 존재들, 사물들, 풍경들이 뿜어내는 희미한 숨결과 그를 어루만지는 작가의 더운 숨, 그리고 그 하나하나가 어쩌면 이름없는 존재인 동시에 그 순간을 함께 호흡하게 되는 독자들의 깊은 숨이 한데 엉키어드는 일. 이것은 분명 신경숙의 문학이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첫 소설을 선보인 지 어느새 이십육 년, 그동안 적지 않은 변화와 발전을 거듭하면서도 변하지 않았던 것들. 그의 말을 빌려 그대로 독자들에게 되돌려주고 싶다. “인간이 지닌 숱한 결핍과 오류와 온갖 종류의 고통과 누추함과 간혹 탄식을 내뱉게 하는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향한 말 걸기이기도 한 그의 작품들이 가능하면 슬픔에 빠진 사람들 곁에 오랫동안 놓여 있기를 바란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 산다는 것.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 일상의 순간들에 스며들어 그리움이 되고 사랑이 되는 것들… 작가 신경숙이 들려주는 명랑하고 상큼한 유머, 환하게 웃다 코끝이 찡해지는 스물여섯 개의 보석 같은 이야기 “그 밤에 문득 나는 달에게 우리의 이야기들을 들려주는 짧은 형식의 글을 쓰고 싶어졌다. 그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것이었으면 하는 마음도 함께 일렁거렸다.” ‘문득’이라 말했지만, 이 이야기들은 작가의 마음 한구석에서 꽃피울 날을 기다렸던 것 같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글, ‘달이 듣고 함빡 웃을 수 있는 이야기’ ‘달이 듣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이야기’를 엮은 짧은 소설집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작가 신경숙의 작품들 가운데 가장 경쾌하고 명랑한 작품집이 아닐까 싶다. 패러독스나 농담이 던져주는 명랑함의 소중한 영향력은 나에게도 날이 갈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다. 명랑함 없이 무엇에 의지해 끊어질 듯 팽팽하게 긴장된 삶의 순간순간들을 밀어내며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_‘작가의 말’에서 낮의 긴장을 풀고 밤의 고요 속에서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보면, 그 안엔 일상의 순간순간이 전하는 소소한 기쁨과 슬픔들, 크고 작은 환희와 절망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있다. 가만 들여다보면 그것은 곧 나와 당신의 이야기, 내 친구와 가족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평범하고 소소한 일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발견해내는 작가 특유의 감수성에 은근슬쩍 숨겨놓은 유머의 뇌관들로 인해 슬몃 입꼬리가 올라가다 저도 모르게 하하 소리 내어 웃게 된다. 그런 환환 웃음 뒤에는 이 세상이 결국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자신의 삶을 일구어나간 사람들로 인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소박한 깨달음이 뒤따른다. 읽다보면 달이 차고 기우는 것과 같은 우리의 삶이 애틋해 코끝이 찡해지기도 한다. 무심하고 태연하게 흘러가버리는 날들을 가만히 보듬어주는 작가의 너른 품, 그가 끝내 놓지 않는 인간에 대한 호의와 선량함에 대한 기대가 가만히 마음을 울린다. 네가 미래에 어떤 그림을 그리게 될지는 아직 모르지만, 네가 고통을 받아들이며 최선을 다한 것들은 저절로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고 쓸모 있는 것이 될 거야. 그걸 믿고 앞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미래에 네가 그리는 그림이 너의 행복을 넘어서 타인에게도 선하게, 쓸모 있는 것이 되기를 바란다._ 본문 중에서 그렇게 해서 나는 이 겨울을 고양이 먹이를 주며 보내게 됐어. 하루에 한 번 사료가 떨어졌다 싶으면 갖다 부어놓는 게 다였지만, 뭐랄까 텅 빈 접시에 사료를 부어놓을 때의 내 모습이 내 마음에 들었어. 타자를 위해 공을 들이고 있는 자기 자신의 모습은 뜻밖에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해. _ 본문 중에서 “이 이야기들이 당신의 한순간에 달빛처럼 스며들어 반짝이길” 아직 그리 깊지는 않은 밤, 문득 올려다본 서쪽 밤하늘 한켠에 새침하게 초승달이 떠 있다. 그럴 때면 문득, 누군가에게 안부인사를 전하고 싶어진다. ‘달 좀 봐.’ 작가 역시 꼭 그랬나보다. 갑자기 마주친 것들 중에 나 혼자 보기 아까우면 종종 봄비 온다, 백합 피었네, 같은 단문의 문자를 떠오르는 얼굴들에게 안부 대신 보낼 때가 있다. 그날도 누군가에게 달 좀 봐봐, 하려다가 멈추고 저 달이 지금 내게 뭐라는 거지? 한참을 올려다보았다._‘작가의 말’에서 이 이야기는, 그러니까, 작가가 다른 어떤 지인도 아닌 우리에게 보내는 꼭 그 마음이다. 작가의 어느 한순간에 스며든 어떤 마음. 모르는 이의 뜬금없는 안부인사가 지친 일상을 잠시 보듬듯, 그렇게 우리를 쓰다듬는 손길. 이 이야기들은 늘 어느 한순간에 의해 쓰였다. 새벽의 한순간, 여행지에서의 한순간, 일상을 꾸려나가는 한순간, 책을 읽는 한순간, 당신 혹은 우리가 만났던 한순간들. 그러니까 내가 머물러 있던 어떤 순간들의 반짝임이 스물여섯 번 모인 셈이다. (…) 달에게 먼저 전해진 이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들이 가능하면 당신을 한번쯤 환하게 웃게 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봄날 방을 구하러 다니거나 이력서를 고쳐쓸 때, 나 혼자구나 생각되거나 뜻밖의 일들이 당신의 마음을 휘저어놓을 때, 무엇보다 나는 왜 이럴까 싶은 자책이나 겨우 여기까지? 인가 싶은 체념이 당신의 한순간에 밀려들 때, 이 스물여섯 편의 이야기들이 달빛처럼 스며들어 당신을 반짝이게 해주었으면 좋겠다._‘작가의 말’에서 더운 손끝의 작가 신경숙이 들려주는 당신의 이야기, 그리고 나의 이야기. 내 안에만 있을 때는 아무것도 아니던 것들이 작가의 손길을 통해 다시 나에게로 돌아올 때, 그것은 또다른 의미가 된다. 가만히 돌아보면 지나온 일상의 순간들만큼 소중하고 그립고 아름다운 시간들이 또 없다. 어떤 일상도 새로운 감동이 될 수 있다. 당신의 한순간에 달빛처럼 스며들어 내일의 그리움으로 빛날 이야기들을, 이 봄, 당신과 함께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