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못해 이젠 해외까지 뻗치셨네.”“네?”아버지의 권유로 재미 교포 이세령과 마주하게 된 현인 그룹의 유일한 후계자, 강혁준.“나랑 결혼하면 아버지가 어디 계열사라도 하나 주신답니까?”“뭘 줘요?”혁준은 첫만남 자리에서 부터 세령에게 독설을 퍼부으며 제풀에 떨어져 나가길 기대하지만, “왕자병도 진짜 중증이지, 지가 무슨 세기의 왕자라도 되는 줄 아나 봐.”만만치 않은 세령은 무례한 혁준의 태도에 일침을 가하며 그를 당혹스럽게 한다.삐걱거리며 시작된 두사람의 관계.그 결말은 과연 운명일까, 정략일까! ***“뭐라고? ……방금 한 말 다시 해 봐.”세령은 그의 목소리가 굳었다는 사실을 미처 인지하지 못한 채 아예 가슴 앞으로 팔짱까지 끼며 흥, 다시 한번 대차게 받아쳤다.“못 들었으면 말고요.”“……왕자병이 어쩌고 저째?”무서우리만치 서늘한 목소리에 세령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갑게 굳은 두 눈을 마주친 순간, 세령은 자신이 방금 전 그에게 무슨 말을 뱉었나,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아 몰라, 이미 엎질러진 물이야.“들렸어요? 굉장히 소극적인 혼잣말이었는데.”세령은 애써 침착한 어조로 대답하며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자신의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그런 그녀를 여전히 서늘한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혁준의 한쪽 입꼬리가 비릿하게 올라갔다.“굉장히 적극적인 큰소리였어. 그리고…….”그녀를 직선으로 마주한 그의 눈빛이 찰나였지만 반짝거렸다.“방금 그 결정, 제대로 한 것 같네.”“네. 전 당신이랑 결혼 같은 거 할 생각…….”“해야겠어, 이 결혼.”세령은 잠시 자신이 무슨 말을 들었나 했다. 그녀의 눈이 자연스레 동그래졌다.“…뭐라고요……?”“이 결혼 해야겠다고. 매일 밤 후회하게 해 주지.”
기억을 잃은 그룹의 상속녀 지수연 앞에 어느 날 한 남자가 나타났다.“난 당신을 믿지 않아요.”“마찬가지야. 그 이상은 성가시기만 하고.” 건성으로 대꾸하는 그가 느릿하게 시선을 들었다.국가의 비자금 증서를 가진 채 기억을 잃은 여자, 지수연.비자금 증서가 목적인 국가 정보국 요원, 고태준.서로를 믿지 않는 두 사람의 은밀한 계약이 시작된다.* * *“도와 달라고 해 봐.”그 순간, 수연의 뺨이 당혹스럽게 굳었다.내리꽂히는 태준의 눈빛이 냉랭하게 차가웠다. 이런 자신을 따끔하게 혼내기라도 하듯 다그치는 태준의 눈빛에 수연이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잘근 씹었다.“가지 마. 해 보라고.”그럼에도 선심이라도 쓰듯이 느긋하게 쳐다보는 그의 눈동자에 심장이 따끔하게 뛰었다.해 봐. 내가 널 도와줄 테니까.그런 그를 보며 기분이 묘했다.그래도 될까. 이내 혼자만 들릴 정도의 작은 읊조림이 선명하게 울렸다.“도와줘요.”빙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희미하게 치솟는 웃음으로 바뀌어 갈 무렵이었다.“가지 말아요.”마찬가지로 그의 입매가 느른하게 치솟았다.모든 감정의 시작은 놀이였다.콧대가 높은 건지, 자존심이 센 건지, 아니면 무식할 정도로 무모한 건지.단순히 확인하고 싶어 시작한 오만한 놀이.그 장난 같은 불꽃 한 줄기가 그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킬 불길이 될 줄은 그도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