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레나향기
세레나향기
평균평점 5.00
오만하신 나의 주인에게
5.0 (1)

한때는 그가 다시 없을 유일한 구원자라고 여겼다. 그녀의 주인이 지금껏 내준 호의는 그 누구도 보여준 적 없는 것이었으며, 지금처럼 웃고 떠들게 된 것 또한 그가 그녀의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절…… 애정하신다고 하셨잖아요.” “난 대답하지 않았어.” 그렇다면 서로에게 섞여들었던 수많은 밤은 전부 무엇이었단 말인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고.” 그가 보인 호의, 배려 그 모든 것에 부여된 의미 같은 건 없었다. 둘 사이에 끊어낼 만한 건 애초에 아무것도 없다. “고작 거둬준다는 그 말만 믿고, 감히 공작 부인이 될 꿈이라도 꿨나?” 신뢰는 깨져버렸다. 비로소 그를 떠나야 한다는 마음이 완벽히 굳어졌다. *** 성벽 난간 끝에 아슬하게 선 그녀의 발 뒤로 모래가 푸스스 떨어졌다. “젠장. 일단 내려와서 얘기해.” “더는 주인님 곁에 있을 이유가 없어요.” 그 즉시 검을 버린 플로라가 두 팔을 넓게 들어 보였다. 조심스럽게 접근하려던 남자의 발이 일순간 그 자리에 못 박혔다. “당신은 더 이상 나의 주인이 아니니까.” 다음 순간, 플로라의 작은 몸이 뒤로 기울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클로드가 절박하게 뛰쳐나간 것과 동시였다. “플로라!” 오만하신 나의 주인에게. 오늘부로 난 당신을 버리겠어요.

얼어붙은 밤의 짐승

후계자의 실수로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지게 된 리벨루아 백작가. 배상금을 충당하지 못한 오라버니를 대신해, 앙느는 가족들에게 떠밀리다시피 북부로 떠나 대공비가 된다. 그곳에서 만난 대공 데이몬드 크롬운드는 소문처럼 늙지도 않았고, 어딘가 비밀스러운데…. “후계자를 낳으면, 떠나게 해 주세요.” “건방지군. 아이를 원한다면, 매일같이 밤마다 나를 만나야 할 텐데 말이야.” 제안에 흔쾌히 응하는 대공의 모습에 안심한 것도 잠시, 앙느는 절규했다. 자신을 안을 때마다 분노에 휩싸이는 얼굴. 밤이 지날수록 힘껏 그녀를 안는 데이몬드. 화를 참아내면서도 끊임없이 저를 안는 대공의 모습에 앙느는 혼란스럽다. 금단의 단어라도 뱉어버린 걸까? *** 그는 하룻밤 새 10년은 늙어버린 얼굴이었다. 저를 똑바로 응시하는 얼굴에 숱한 감정이 깃들었다. 혼란, 자책, 후회, 죄책감 그 비슷한 단어들이 그녀의 눈으로도 확실히 보일 정도로. 그러나 그가 결코 불쌍해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앙로란느.” “제가 기억을 되찾아서 무척 억울하겠어요. 당신이 했던 짓이 전부 드러났으니까.” 땅이 꺼질 듯이 한숨을 뱉은 그가 부르튼 입술을 기운 없이 들어 올렸다. “용서를 바라진 않아. 앞으로는 그대를 위해서, 원하는 걸 뭐든 들어주며 내 평생을 헌신하며 속죄하지.” 그가 하던 대로 앙느는 입가에 조소를 한껏 머금었다. “가소롭네요. 알량한 죄책감과 얕은 후회 따위로 포장한 겨우 그런 사과가 받아들여질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 두고두고 후회해 봐요.”

우아한 나의 군림자 (15세 이용가)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정신없이 올라온 수도, 에델. 새어머니의 믿기지 않는 변화, 이미 한참 전에 끝나 버린 아버지의 장례식. 더군다나 불시에 휘말리게 된 총기 사고는 아를렌을 혼란의 소용돌이로 몰아간다. “사내의 코트가 탐이 나는 게 아니라면, 돌려주시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건네진 따듯한 온기. 아를렌은 우아한 손에 담긴 상냥함을 붙잡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게 정녕 구원이 맞는지 알 수는 없었다. *** “아를렌.” 느릿하지만 나직한 음성은 마치 매 순간 불러왔다는 듯이 침착했다. 입술 사이로 속삭이듯이 흐른 목소리에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눈에 띄게 흠칫한 앙상한 어깨를 따라 올라간 시선 끝에 새하얗게 질린 얼굴이 맺혔다. “내 눈에 띄지 않게 더 멀리 도망갔어야지.” 대륙 서너 개 정도는 넘었을 줄 알았건만. 참으로 시시한 도주에 남자의 안면에 서늘함이 드러났다. 그러게 지금까지 뭐 했냐는 타박 같은 음성과는 달리 아를렌이 지금 있는 곳은 대륙을 떠나 배를 타고도 두 달은 걸리는 먼 곳이었다. “리암….” 심장을 찔러도 뜨거운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차가운 남자를 마주한 아를렌의 입술 끝이 파들거렸다. “난… 당신 곁으로 안 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아를렌.” 내리깔렸던 남자의 눈꺼풀이 서서히 들리고, 서늘함이 고인 눈매가 가늘어졌다. “널 찾아냈으니 네 목숨은 이제 내 거지.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잖아.” 아를렌을 선명히 응시하는 눈빛. 시리디시린 회청색 눈동자에 명징한 빛이 들어찼다.

사신이 네 죽음을 바란다면 (15세 이용가)

모든 것이 계획된 배신이었다. 믿었던 친구에서 남편이 된 남자에게 속아 넘어가 황위를 넘긴 결혼식 날, 리제트는 원인 모를 광증의 발현으로 궁에 유폐되고 만다. 남편을 향한 배신감과 어리석게 속아 황위를 넘겨 버렸다는 자괴감에 절망해 목숨을 끊으려는 찰나, 그가 찾아왔다. “감히 누구 마음대로 죽으려는 겁니까?” 죽음을 부르는 사신. 반란을 일으킨 사내. 페르난 폰티나우스 카일론 대공이. “당신은 광증을 앓는 게 아니야. 발정 난 거지.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이 가진 이능 때문이고.” 무도한 수식어와 달리 미려한 사내가 심장이 떨릴 만큼 서늘하게 미소 지었다. “이왕 죽을 거라면 그 목숨값을 내게 팔아. 요긴하게 써 줄 테니까.” 어쩌면 끔찍한 찬탈자가 될지도 모르는 남자의 손을 잡았다. *** “경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북부령 센티니움의 자치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인정하죠. 오늘부로 당신은 북부령으로 돌아가 센티니움의 왕이 되어….” “하, 쓸모없어졌으니 이제 와 꺼지라는 말을 꽤나 고상하게 지껄이는군.” 진심을 담아 꺼낸 제안을 단칼에 자른 그가 본 적 없는 냉소를 터트렸다. “내가 끝까지 고분고분하게 당신 사냥개 노릇이나 할 줄 알았나?” 쾅! 그의 주먹이 내리친 황좌의 대리석 기둥이 빠지직 갈라졌다. 리제트의 얼굴 바로 옆에 꽂힌 주먹에서 그의 눈동자와 한 치도 다르지 않은 붉은 선혈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서늘한 검지 끝이 리제트의 턱을 무례하게 들어 올렸다. “잘 들어, 황녀. 난 처음부터 당신 사냥개가 아니라 주인 잃은 개새끼였어.” 이따위 황좌는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는 듯이 남자의 핏빛 눈동자가 잔인한 빛을 띠고 일렁였다. “내가 그대에게서 멀어지는 일 같은 건 없어. 누구 하나 죽어 사라지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안정에 이른 그 순간, 상황이 반전되었다.

비열하고, 우아하게

신대륙 금광의 꿈에 부푼 투자 열풍 뒤로 찾아온 경제 공황. 타국의 재화로 눈을 돌린 나라들의 탐욕으로 빚어진 잦은 전쟁과 내란 속에서 부상한 군수업체들 중에서도 독보적으로 성장한 라인 클라인트사의 총 경영자 칼라일 폴쉐어드 공작.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권위적인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불행했던 지난 3년간의 결혼생활은 그녀가 이혼 서류를 내밀며 끝을 맺는 듯 보였다. “재밌네. 이번엔 꽤 신선했어. 이혼을 대대적으로 광고해서 남자 하나 꿰차려고 한 것 말이야.” 쇠붙이를 연상시킬 만큼 서늘한 남편을 다시 마주한 이본느가 긴장한 숨을 들이켰다. “다시 돌아와야겠어.” “지금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은 있는 거예요?” “물론. 몹시 명확해.” 커다란 체격이 움직이자, 긴장한 이본느가 뒷걸음질 치기도 전에 붙잡힌 몸이 그와 바투 맞붙었다. 맞닿은 옷 너머로 전해지는 단단한 복근의 감촉과 뜨거운 체온에 심장이 잘게 뛰었다. “윽, 이거 놔요.” “외로워서 다른 놈 찾는 건 알겠는데. 그 새끼랑 놀아나는 꼴은 못 보겠네. 적어도 내 씨로 생긴 아이 하나는 낳아주셔야 수지가 맞지.” 무심하기 짝이 없던 남자의 눈동자가 비열한 욕정으로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