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든 가의 시든 꽃을 주워버린 비운의 공작. 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업체를 이끌어 갈 마르키시오 가문의 공작과 몰락한 남작가 여식이 한데 묶일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었다. “후원을 받아, 메디아 프리든. 괜한 자존심 세우지 말고.” 여자의 표정 위로 떠오른 감정들을 하나, 둘 낚아챘다. 부끄러움과 수치, 원망이 뒤섞인 작은 얼굴이 곧 발갛게 물들었다. 말로는 감사하다, 큰 은혜를 입었다 하면서도 여자의 파란 눈에는 어떤 간절함이 있었다. 저로서는 도무지 모를 심정이었다. 모르니 짜증만 날 뿐이다. “후원이 싫으면 적선으로 치든가.” 남작이 진 빚을 내가 대신 변제해 줄 수 있어. 그 이상의 재력을 네게 안겨줄 수 있어. 네가 숨기고 있는 게 뭐든, 그게 네 발목을 붙잡고 있는 그 빌어먹을 빚 때문이라면 내 그늘 아래에 숨어들어. 그렇게 해, 메디아. 제발. 이기적인 본심이 불쑥 올라왔지만 그건 결국 내뱉지 못할 염원이었다.
“왜 모른 척하지, 아까부터. 섭섭하게.” 특별할 줄 알았던 연애는 금세 빛을 잃었다. 그 밤, 도망치듯 짐을 챙겨 비행기를 탔을 때만 해도 시연은 결코 예상할 수 없었다. 그와 같은 회사의 본부장과 비서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그리고… “그날 말이에요. 이시연 씨가 나 버리고 날랐던 그날. 왜 말도 없이 떠났던 겁니까.” 말도 안 되게 뻔뻔한 문제우 때문에 속이 뒤집히게 될 줄은. 여전히 시연은 사로잡혀 있었다. 그에게, 그로 인한 동요에, 그를 향한 원망에. 단 하루도 그 밤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뭐…? 우리가 무슨 사이였다고? “키스하고, 잠까지 잤는데. 그게 연인이 아니면 뭡니까.” “키스하고, 몸만 섞는 사이였겠죠?” 외면해야 했다. 다시는 속지 않도록 밀어내야 했다. 하지만 그는 그 절박한 발버둥조차 단숨에 묶어 버렸다. “이리 와요.” 여전한 오만함과 위태로움으로 가뿐히 우위를 점하며. “오라고. 얼른.”